Park Hoon-Sung
꽃의 형상 : <이미지와 사물 사이> 이후
박훈성 역시, 어느 시인처럼 꽃을 그린다. 그가 그린 꽃은 형상을 가지며, 이름 없이 스스로 존재한다. 그의 꽃은 실재와 같다. 그러나 실재와 같은 꽃은 재현에 지나지 않음을 확인하게 된다. 재현된 꽃의 형상은 이미지로 남을 뿐이다. 여기서 그는 자신만의 이름을 생각하게 된다. 오랜 동안 끈질기게 추구하여 왔던 그의 꽃은 과연 어떤 이름을 가질까?
화가의 ‘꽃’은 김춘수의 <꽃>처럼 이름 불러주기를 기다리고 있을까?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김춘수,<꽃>) 아니면 김윤성의 <꽃>처럼 이름 없이 그 자체로 존재하기를 바라는 것일까? “바라보면 볼수록 가깝고도 먼 얼굴 꽃이여 그대로 두면 한없이 고이 잠들어 버릴 너는 바람에 흔들리어 피었나니..너는 영원히 깨인 눈 태양처럼 또렷한 의식!”(김윤성,<꽃>) 결국 시인의 꽃에게는 이름이, 화가의 꽃은 이미지로 타자가 불러주는 것보다 자아를 드러냄이 중요한 것이 아닐까 한다.
시인들과 달리 박훈성의 경우는 분명 이미지로 대답한다. 이것을 필자는 “꽃의 주체나 객체 등, 독립된 개념보다 사물의 이미지 재현으로 이미지와 사물 사이의 상상력”(2003년)이 가장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해석하였다. 작가는 이를 이미지와 추상표현의 문제로 보면서 “이미지와 사물과의 관계 작업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 인식과 개념 탐구”라고 설명하기도 한다. 극사실로 그려진 꽃의 형상은 하나의 이미지이며 눈속임 같은 시각적 환영이다. 이것을 작가는 추상과 공존시키면서 상반된 구조의 평면조건을 완성하고자 오늘에 이른다.
결국 그의 꽃은 자아와 타자의 관계이기보다 이미지와 사물 사이를 표현하는 시각예술로 상상력이 개입되고 있다. 실재와 비실재, 현실과 비현실, 자연과 초자연의 대립 사이에 존재하는 상상력의 시각화가 중요하게 나타난다.
2007년 근작의 변화에서 박훈성은 ‘이미지와 사물 사이의 상상력’ 과 함께 ‘꽃의 형상’과 배경에 나타난 추상표현의 ‘행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화폭을 가득 채우고 있는 확대된 그의 꽃은 더 이상 정물(nature morte; 죽은 사물)이 아닌 살아있는 생명체로 형상이다. 정물화의 단순한 모티브가 아닌 꽃은 생명의 형상, 그 자체이며 추상 공간과 대립되면서 더욱 부각된다. 유기체로 꽃의 형상은 극사실 기법에 의해 섬세하게 드러나고 행위의 얼룩으로 가득 찬 배경에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이미지와 사물 사이> 이후 근작의 회화적 특성으로 언급되는 조형적 요소가 있다. 우선 대부분 작품에 등장하는 ‘꽃의 형상’ 변화이다. 초기 장식적 효과가 강조된 장미와 달리 근작에는 소박한 꽃의 형상들로 진달래와 나팔 꽃, 식물 줄기 등 선명한 이미지 묘사이다. 형상의 그로테스크는 과거와 같으나 꽃의 형상은 더욱 극사실적이며 사진보다 더 사진 같다. 오히려 최근의 꽃은 너무나 실재 같아 실재가 아닌 것처럼 보인다. 실재와 비실재의 혼란은 감상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한다.
섬세한 꽃의 형상은 어느 것이 더 리얼한가 보다 작가는 사물의 본질에 의문을 제기한다. 무언가의 본질적인 것은 시각적인 것을 뛰어넘어 개념적이다. 이미지와 사물 사이의 상상력은 본질의 탐구와도 연관성을 가져 왔다. 작가는 허상과 같은 하나의 형상에 가치를 부여하고자 한다. 마치 이름을 불러주어 꽃이 되듯 꽃의 형상은 자아의 존재를 대변하고 있다. 비록 꽃의 형상은 실재가 아닌 이미지에 지나지 않으나 본질에 접근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엿보게 되면서 감상자에게는 자아를 생각하게 된다. 무엇보다 화면을 지배하고 있는 ‘꽃의 형상’이 감상자의 마음에 자리 잡으면서 시각적 유희와 상상력, 그리고 사물의 본질, 그 ‘사이’를 넘나들고 있다.
한편 또 다른 조형요소로 주목되는 것이 ‘꽃의 배경’이다. 추상표현 작업처럼 보이는 배경은 사실적 형상과 거리가 멀다. 배경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꽃의 형상은 대지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모습으로 고립된다. 꽃은 화려한 색채와 섬세한 묘사로 시각적 아름다움을 더해주나 빈 공간에 홀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뿌리 없는 꽃은 외톨이처럼 고립과 소외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현실을 직시하는 형상으로 남는다.
커다란 캔버스에 한 송이 또는 서너 송이 꽃으로 그려진 화면은 단색조 배경으로 너무나 실재와 거리가 먼 다른 세계에 존재한다. 사실 꽃의 형상은 견고하며 단단하다. 비록 뿌리가 없다하여도 화면에 가득 찬 하나의 꽃과 그림자는 그 자체로 존재의미를 갖는다. 꽃의 형상에 기생하는 그림자는 묘한 느낌이다. 그림자들은 고립된 꽃을 받쳐주고 있다. 그림자 역시 배경과 어울리기보다 주인공인 꽃의 형상에 달라붙어 있다. 꽃의 형상에 생명을 불어 넣는 그림자로 역할이 독특하다. 그림자와 같이 꽃의 배경은 서술성에서 벗어난다. 꽃의 형상이 사실적이면 사실적 일수록 배경은 비현실적이다.
사실 꽃의 배경에 그림자보다 더 비현실적인 요소는 드로잉으로 나타나는 ‘행위’의 흔적들이다. 배경은 연필 선이나, 날카로운 칼자국들이 낙서처럼 그어지고 무질서하다. 단순하고 간결하나 질서와 거리가 멀다. 이는 추상표현 작업으로 사물의 모방이나 재현과 다른 내적 필연성의 작업이다. 치밀하게 그려진 꽃의 형상과 달리 배경에 나타난 행위는 사물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자유롭게 그어진 드로잉의 선들은 힘과 자신감에 차있다. 서예처럼 날카롭고 때로 묵직한 흑색 선이 복잡한 현대인간의 심리상태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듯 즉흥적으로 드러나며 감각의 힘을 구조화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배경에 나타난 행위의 흔적은 감각적이며, 배경 전체를 지배한다. 단색조 바탕의 화면이나 힘 있는 간결한 선묘들은 재현 형상과 전혀 다른 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이들은 마치 침묵하는 물질의 표면으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는다. 배경에 나타난 반복된 드로잉 선묘와 이질적 부분들, 의식보다 무의식처럼 보이는 꽃의 배경은 영원성이나 무한을 잉태하고 있는 절대적 공간으로 원초적 힘을 간직한다.
또한 ‘꽃의 형상’과 ‘배경’ 사이를 넘나드는 ‘파괴’의 조형요소가 등장한다. 이는 새로운 공간표현으로 단색조 배경의 수많은 구멍들과 꽃의 형상을 관통하는 원형 부분, 그리고 날카로운 칼자국 등이다. 원형의 구멍은 빛을 흡수하거나 반사시키고 있다. 작고 큰 구멍은 배경 곳곳에 존재한다. 때로 구멍은 꽃의 형상 한 가운데 뚫려져 있기도 한다. 이미지가 있는 곳은 물론 단색조의 배경에도 구멍이 만들어지면서 공간의 변화를 유도한다.
이러한 점들은 꽃의 형상과 대립된 배경에 주목하게 한다. 특히 이번 전시에 출품된 대작들에 나타난 꽃은 극사실 묘사로 인해 초자연적 느낌을 준다. 그러나 그는 더 이상 환상이나 초자연적 이미지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의 신체성을 강조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의 신체성은 욕망의 상징처럼 보이는 꽃을 파괴하고 있다. 즉, 핑크 색이나 청색 등 화려한 단색조 배경에 파괴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파괴의 조형요소는 꽃의 형상을 보조하는 역할과 거리가 멀다. 이는 조화보다 부조화를 내세우며, 초기 작업처럼 사물과 이미지 사이를 넘나든다. 두개 서로 다른 영역이 상반된 구조를 갖는 자신의 작업을 작가는 “우리의 고정된 시각과 개념에 변화를 주고자 하였다.”고 말한다. 장식성과 부조화는 추상표현의 행위를 돋보이게 한다. 꽃의 형상은 파괴되면서 대립된 또 다른 세계가 펼쳐진다. 특히 무질서한 선들이나 형상을 파괴하는 구멍(圓形)은 이미지와 전혀 상관없이 존재한다. 이들은 실재의 사물이나 현실보다 현실 저편의 다른 공간으로 비 물질의 세계를 암시한다.
결론적으로 <이미지와 사물 사이>에서 상상력을 추구하였던 초기 작업 이후 이제 우리는 상반된 두 개의 세계를 발견하게 된다. 형상과 추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이미지와 대립된 공간에 작가의 행위와 조형의 순수성이 드러나면서 꽃의 형상에 ‘생명’을 찾아 나선다. 마치 꽃의 형상이 초자연적 공간에 노출되면서 생명력에 힘을 더하고 있다. 구체적 형상과 추상이라는 비현실적 공간 대립이 근작에 심화되면서 오히려 자연 친화적인 분위기로 바뀌고 있다.
‘이미지와 사물 사이’에서 작가는 상상력과 함께 다시 자연의 생명을 이야기한다. 이는 고립과 침묵, 대립된 세계를 통해 역으로 고립에서 벗어난 초자연적인 것과의 대화이며, 꽃에게 이름을 부여하고 있다. 근작에서 이러한 조형적 변화와 해석은 초기 작품과 같이 “시각적 즐거움과 함께 눈에 보이지 않는 사물의 근원 모색과 상상력 탐구”의 지속이며, 더 나아가 감상자는 작가의 체험을 공유하는 시각적, 관념적 즐거움에 흠뻑 빠지게 된다.
2007.5. 유재길 (미술비평.홍익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