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ang, Min Soo
강민수의 달항아리展
임창섭(미술평론 ․ 문학박사)
최근에, 아니 몇 년 전부터 달항아리에 대한 관심과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듣는다. 달항아리를 소재로 한 작품들도 예전보다는 훨씬 더 자주 전시장에서 만나게 된다. 그만큼 달항아리에 대한 애정이 늘어간다는 반증일 것이다. 하지만, 달항아리는 조선시대 후기에 만들기 시작한 백자라는 선입감인지는 몰라도 늘어가는 관심과 애정이 어딘지 못마땅한 점이 없지는 않다. 그저 지나가는 한때의 시류가 되는 것은 아닌지 하는, 한편으로는 조금 더 진지한 접근이 필요 한 것은 아닌지 하는 기우 때문이다.
불과 20여 년 전만 하더라도 도자기를 만드는 작가 중에서도 달항아리를 만드는 작가는 흔치 않았다. 하물며 달항아리를 소재로 사진을 찍거나 그림을 그리는 작가는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지금은 미술의 여타 장르만이 아니라 다양한 재료를 동원해서 달항아리를 소재로 하거나 변형해서 제작한 작품을 쉽게 볼 수 있다. 예전에 개인적으로 이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왜 우리나라 작가들은 우리의 문화와 역사 그리고 그것이 가지고 있는 정신에 관해서는 무관심할까? 그리고 그런 것들을 왜 작품으로 만들지 않을까? 왜 우리 것에 그렇게 무관심할까? 라는 생각을 했었던 적이 있다.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관심이 넘쳐난다. 예전의 산수화나 문인화를 새롭게 해석하여 제작하거나 미디어 매체로 제작하는 작품도 흔하게 접할 수 있다. 그만큼 우리의 전통적인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가했다.
강민수는 달항아리를 빚는다. 필자가 2년 전에 경기도 광주 쌍령동 마을에 있는 그의 작업실을 찾았을 때가 생각난다. 그때 글에 이렇게 적었다. ‘강민수는 젊다. 그런데도 달항아리의 구조와 형태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오로지 달항아리만을 만들고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은 다 버렸기 때문이다. 좁은 작업장에서 큰 것은 60센티나 되는 항아리를 혼자 물레를 돌려 만들고 건조시켜 유약을 입힌다. 이정도 크기의 그릇에 유약을 혼자 입힌다는 것은 웬만한 힘과 기술이 아니면 실패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강민수는 조수 하나 없이 이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한다. 조선의 사기장은 자신이 만드는 달항아리를 예술품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강민수는 이 모든 행위를 예술을 위한 고독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또 예술이 아니면 어떤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달래고 어르고 기쁨을 주면 그것으로 달항아리를 빚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조금 긴 인용이지만 그냥 달항아리가 좋다고 말하는 그는 여전히 달항아리를 만들고 또 그것을 보여주기 위해 지금 또 다시 자신을 준비하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동안 우리가 지나치게 무관심했던 역사와 전통을 다시 상기시키고 되살린다는 점에서 달항아리를 비롯한 이전의 문화에 대한 재-제작은 바람직한 현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21세기 달항아리는 21세기 정신이 들어있어야 하고, 거기에는 우리를 이해시킬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강민수는 요즘 젊은 작가들처럼 영악하지 않다. 행동도 잽싼 편은 아닌 것 같다. 그저 2년 전이나 지금이나 그와 그의 작품을 보면서 느끼는 것은 그저 자기가 좋아서 달항아리를 만든다는 생각이 들게 행동한다. 아마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그가 달항아리를 빚는 것에 대하여 생각을 하게 되고,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아니 어떻게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들이 달항아리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정서는 거의 다르지 않을 것이다. ‘달’에 대한 정서를 공유하는 것처럼 말이다. 한편으로는 다음과 같은 현대사회 현상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다. 실내장식이나 건물 디자인뿐만 아니라 영화, 음악, TV광고, 미술 등 각 장르 사이의 상호-텍스트적 관계를 수없이 목격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서로 모방하면서 껍데기만을 증식하고 있는 것이다. 패션 잡지와 비평 전문지 사이의 간격 소멸, 존재론적 형이상학에 대한 혐오 내지는 폄하, 과격해지는 감정 노출과 아울러 과감한 신체노출, 신세대의 집단적인 절망과 직접적인 행동, 과도한 수사학의 사용이 날로 늘어나고 있다.
또한 표피적 의미생산의 증식, 한계를 모르는 상품 물신주의가 넘쳐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다. 유명 스타의 스타일에 대한 맹목적 추종, 문화적 정치적 실존적 파편화의 과정과 그 위기, 주체의 탈-중심과 상실, 대서사에 대한 불신, 의미의 파괴와 복합, 문화적 질서의 붕괴, 마이크로 테크놀러지의 과도한 기능과 악-영향, 미디어로 향한 사회경제적 전도, 극한의 소비주의와 새로운 다국적 관계의 생성과 소멸 등등 이루 말할 수 없이 현대사회는 복잡하다. 이런 사회 현상 속에서 한편으로는 그래도 여전히 달과 달항아리에 대한 공통의 정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마음 한 구석에 말이다.
강민수의 달항아리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아니 있었던 달에 대한 감성, 둥근 항아리에 대한 감성을 드러내고자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약육강식의 시대가 아닌 적자생존의 시대에 무언가 느슨하고 어딘지 모르게 나태한 느낌마저 드는 형태의 달항아리가 우리에겐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달항아리의 둥근 형태에 때 묻지 않은 백색에 마음을 의지하는지 모른다.
강민수의 달항아리는 예전보다 더 온화한 색과 더 편안한 형태로 발전했다. 아닌 변화했다고 해야 하는지 모르지만, 그만큼 달항아리에 매진했을 것이다.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다.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고 해도 달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척박한 마음을 달래줄 변하지 않는 그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 우리에게 강민수는 달항아리를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