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Whan-Ki
김환기의 선과 멋
이구열 l 한국근대미술연구소장
김환기는 시종 한국의 자연과 한국인의 서정을 노래한 화가였다. 또한 그는 한국의 멋의 문화를 열애한 예술가 이기도 했다. 그는 시인의 시상(詩想)과 같은 그림의 착상을 정감 얹힌 간결하고 명쾌한 선의 생동적 리듬과 구체적인 이미지로 형상한 드로잉을 생애를 통해 끊임 없이 지속하였다. 그 드로잉을 시초로 하여 유화작업의 전형적 김환기 세계가 무수히 창작되었고, 많은 역작•명작도 낳았다.
많은 사람이 아는 바지만, 현대미술에서 드로잉의 개념은 화가나 조각가가 본격적 작품을 착수하기 이전에 갖는 일상적인 스케치 성격이상으로 독립성이 인정되는 그 자체의 작품 행위이다. 그 역량은 한 미술가의 예술적 저력을 명료하게 드러내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드로잉 행위만으로 보는 사람이 크게 감명하고 찬탄의 감상을 하게 되는 화가와 조각가가 있는 것이다. 김환기의 드로잉과 그 성격의 연필화, 펜화, 그리고 거기에 수채 또는 과슈가 부여되기도 하는 그림들이 그러한 내면으로 이루어 줬다.
1963년에 뉴욕에 정착한 뒤로는 유화작업에서 점(点)의 형상이 화면을 지배하는 변화를 나타나 있지만, 그 이전의 모든 김환기 회화는 사실상 선의 그림이었다 자연적인 주제와 인물 또는 항아리 같은 모티브가 모두 뚜렷한 선 형상으로 부각되게 그려졌다. 그것은 김환기 그만큼 모든 표현대상과 자연내지 현실주제를 선으로 파악하고. 그렇게 선 작업으로 순수한 화면 구성과 조형적인 노래를 즐기려고 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로써 그는 자신의 회화예술 창조의전 형을 구축할 수 있었다.
김환기의 선-특히 검은 펜 작업의 선은 아주 자연스런 유연함과 리듬의 생명감이 두드러질 뿐 아니라 한국적이고 동양적인 풍류의 멋이 수반된 형상미가 두드러지는 독창적인 선이다. 그것은 이 작가의 생태적인 멋의 감각과 풍류적 심성, 그리고 남달랐던 한국미 내지 동양 미의 교양과 안목을 반영한 것 이었다.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의 그의 작품에 끊임없이 등장한 자연적인 주제요소는 비사실적으로 양식화 시킨 건강한 여인상과 조선시대 백자항아리의 풍미한 한국미를 비롯 하여, 한국자연미의 전통적 표상들 이었다. 곧 학과 구름, 해와 달, 산과 물과 사슴 등이었다. 김환기는 그 대상의 본색 및 본질의 자연적 정취를 멋과 풍류를 함축시킨 선으로 나타냈다. 곧 김환기의 독자풍의 선이었다.
그러한 선들은 본격적인 유화작업에서 형상될지라도 사실상은 드로잉이었다. 그 풍부하고 변화에 넘치며 멋스러운 김환기의 확실한 저력의 단면을 이 노화랑 기획전에서 충분히 만나게 된다 전시작품은 20여점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 담긴 김환기의 선과 멋은 그를 이해하는 관람자와 감상자의 눈을 찬탄으로 충족시킬만하다. 작품의 시기는1950년대가 중심이지만, 1941년의 사인이 들어 있는 도쿄 체류기의 연필과 크레용 수채의 추상드로잉도 하나가 나와 있어 일찍 부터의 놀라운 드로잉 역량을 확인 시킨다. 그런가 하면 뉴욕정착시기의 펜과 과슈의 구성적 표현을 보여주는 작품도 하나가 곁들여져 있어 전시내용을 매우 폭 있게 하고있다.
여기서 놀랍게 처음 보게 되는 어느 특정 유화작품의 애초 드로잉 2점은 l952년 전후의 부산 피난시기로 여겨지는 <항아리와 여인>이다. 푸른 바다와 해변을 배경으로 전라(全復)또는 반라의 여인들이 다른 여러 작품에도 거듭 그려지는 커다란 백자항아리를 들거나 머리에임 움직임으로 구도된 낭만적인 주제의 대작 유화 <항아리와 여인>이 개인소장으로 화집을 통해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이다.
앞서와 같은 드로잉과 유화의 연결이 이 전시의 다른 여러 드로잉에서도 확인된다. 연필과 크레용으로 즉흥적인 드로잉이 이루어진 l954년 사인의<답교(踏橋)>는 그 해 대작 유화로 연결되었음을 ‘김환기 25주기 추모전’(갤러리현대)카탈로그에서 확인 할 수 있다. 또 시기가 밝혀져 있지 않는 연필과 크레용의 드로잉<화실>도 앞의 카탈로그에 수록된 대작 유화<달밤의 화실>(1958)에서 살펴지는 실내중앙의 삼각 이젤과 배경 창밖의 둥근 달 등의 구도내용과 일치한다.
김환기 그림의 그와 같은 주제 및 구도내용은 드로잉에서부터 작가의 문학적인 감성과 낭만적 상상력이 얼마나 항상 그의 회화창조와 밀착돼 있었는가를 확연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는 그 표현을 스스로 ‘민족의 노래’라고 말하기도 했다. 특출한 화가로서 특출한 문필가이기도 했던 그는 「편편상(片片想)」으로 명제한 수필에서 ‘예술이란 강력한 민족의 노래인 것 같다’고 쓰고 있는 것 이다.
순수 추상회화나 다름없는 뉴욕시기의 평면적인 점 작업을 할 때에도 일기에 ‘내가 찍는점, 저 총총히 빛나는 별 만큼이나 했을까(찍었을까=주). 눈을 감으면 환히 보이는, 무지개 보다 더 환해지는 우리강산…’이라고 간절하게 쓰기도 했다. 그렇듯 그는 끝까지 한국의 자연과 강산을 노래하려고 한 화가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