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ark Soo-Keun vs Byun Kwan-Shik
Bark Soo-Keun vs Byun Kwan-Shik
박수근 vs 변관식’ , 참으로 재미있는 발상이다. 그렇다고 무슨 대표 선수들끼리의 경기는 아니다. 특정작가의 만남이다. 이런 경우, 작가의 대표성이 관건이다. 선택된 작가는 그가 속해있는 영역을 대표하기 십상이다. 그렇다면 박수근과 변관식은 무엇을 대표하는가. 한마디로 이들 두 작가는 우리 근대미술계의 대표적 작가이다. 각기 유화와 수묵화로 한국성(韓國成)을 수립한 거장들이다. 확실히 박수근과 변관식은 우리 미술계의 대표 작가라고 지칭해도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변관식과 박수근의 이름이 뜨기 시작한 것은 그렇게 오래되지 않는다. 한 20여년 전만 해도 이들의 이름은 정상에 있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범과 이중섭이 꼭대기를 차지했다. 미술판의 대다수는 이상범과 이중섭에게 박수를 보내면서 그들을 칭송했다. 청전 이상범은 우리의 야산을 잔잔한 필치로 양식화했다. 누가 봐도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만큼 아늑한 분위기를 선사했다. 확실히 이상범의 자연은 어머니의 젖가슴 같은 포근함으로 대중적 필치의 낮은 산들은 오히려 도식화되어 깊이 있는 감동을 삭제시키곤 했다. 게다가 대작이 드문 반면 항상 비슷한 화풍의 반복이어서 오랫동안 대중의 눈길을 신선하게 잡지 못했다. 오죽하면 일제시대부터 이상범의 작품은 천편일률이라고 비판받았을까.
이상범의 대척점에 소정 변관식이 있다. 소정은 청전의 섬세함에 비해 역동감이 넘친다. 청전의 여성적 분위기에 비해 소정은 남성적이다. 변관식은 이른바 스케일이 있고 또 패기도 있다. 게다가 고집도 있고 격정적인 면모도 있다. 때문에 그의 그림은 대담한 소재에의 해석과 화면 구성 그리고 적묵(積墨)등의 악센트가 있다. 청전과 차별성을 이루는 부분이다. 청전의 자연은 한국의 산천, 그 어느 곳에나 해당된다. 한국의 어느 곳이나 흡사한 풍경이기 때문에 오히려 실경정신이 취약하기도 하다. 실경인 것 같지만 사실은 관념 속의 인공적 자연과 같다.
변관식의 진경 정신은 현장에서 한국적 자연을 독자적 양식으로 체계화시켰다는 데 있다. 소정의 화면은 논두렁과 초가가 있는 시골 풍경에서 특성을 찾을 수 있다. 논밭이 있는 풍경, 그것은 기왕의 심산유곡이라는 산수화적 이상세계에서 현실이라는 무대로 내려 왔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소정 전성기의 화면은 굵직한 선으로 농촌 풍경을 농축시켰다는데 있다. 거기에는 인간이 있다. 그는 우리시대의 보편적인 인물상이었다. 깊은 산중의 신선이 아닌 것이다.
변관식의 걸작은 금강산도에서도 찾아진다. 대담한 구성과 필법으로, 그는 금강산의 절경을 화면에 담았다. 소정의 진경정신은 이렇듯 현장에서 동시대의 실상을 여실하게 포착하려 한 데 있다. 그는 청전과 달리 대작이 제법많다. 하지만 그는 청전과 달리 웅건한 필치의 걸작이 많다. 한마디로 소정은 기복이 심한 일생을 살면서 자신의 실체를 화면에 그대로 투영시켰음을 알 수 있게 한다. 확실히 소정의 그림 속에서는 청전과 달리 작가의 고민하는 모습을 읽을 수 있다. 그것은 천편일률의 도식적인 세계가 아니기 때문이다.
박수근 역시 굴곡 많은 삶을 살다가 간 화가였다. 그야말로 빈곤가정 출신인데다가 독학으로 어렵게 화업을 일군 화가였다.
그는 생전에 사회로부터 커다란 주목도 받지 못하고 쓸쓸하게 살다가 갔다. 국전에서의 낙선은 그를 더욱 좌절하게 했다. 하지만 ‘국전 귀족들’은 당시의 미술계를 좌지우지하면 득세를 했다. 하지만 오늘날의 평가에 의하면 완전히 거꾸로 역전이 되었다. 귀족들의 이름은 시들어 갔지만 박수근의 이름은 날로 빛을 더하고 있는 실정이다.
박수근의 그림은 한국적 정서를 개성적으로 화면에 담았다는 특징이 있다. 회색의 화강암 표면 질감에 거의 짧은 직선에 의한 선묘(線描)가 돋보였다. 배경은 생략하고 절제된 선으로 주제 의식을 정갈하게 응축시켰다. 박수근의 세계에는 아낙네와 나목이 즐겨 등장되었다.
아낙네는 생활이란 멍에를 안고 있는 도시 주변 혹은 시골 촌부의 모습이다. 그들은 결코 도시적 유한부인이 아니다. 그들은 생황을 담보하고 있는 현장 속의 인물이다.
박수근의 나목은 잎새 하나 없이 앙상하게 알몸을 보이고 있는 고목들이기 십상이다. 겨울풍경이다. 썰렁한 모습이다. 하지만 나목은 이듬해 봄 새롭게 소생하는 푸른 잎을 예시하고 있다. 박수근의 나목은 심하게 절단되어 있거나 비틀어져 있다. 뒤틀린 사회의 표상이다. 나목 아래에 어린아이를 데리고 지나가는 광주리를 인 아낙네의 모습이 압권이다. 배경의 썰렁함 속에 놓여있는 소재이지만 상징성이 강한 것이다.
박수근의 걸작은 50년대 중반 이후부터 작고시까지 10년 가량에 일구어졌다. 박수근의 세계는 전쟁 이후의 궁핍한 사회의 표상이다. 이 같은 시대 상황과 민족미의 구현은 박수근 세계의 토대이다. 박수근의 작품이 대중적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이유는 이렇듯 타당성에 의한 것이다.
박수근 vs 변관식, 흥미로운 접근이다. 유화와 수묵화의 양대 거장들을 한자리에서 단 둘이 만나게 하는 기획은 참으로 흥미롭다. 대중적으로 혹은 미술사적으로 최정상의 양대 작가를 한자리에서 비교 검토케 할 기회는 소중하다.
박수근 vs 변관식, 여기서 우리 시대 미술계의 단면을 본다. 이제 제 2의 박수근 vs 변관시의 세상도 도래하길 기대케 한다.
윤범모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