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alleries Art Fair – Jo, Deok-Hyeon
Galleries Art Fair – Jo, Deok-Hyeon : ‘역사의 패러디’
-조덕현의 작품에 관하여-
서성록 | 미술평론가
작가는 현실의 리얼리티(물론이 ‘리얼리티’자체가 무엇인지, 또 어떻게 표출될 수 있는 지 의 문제는 논외로 하더라도)를 발견하기 위해 과연 얼마나 고되게 정신의 혹사에도 견디며 분투노력을 하는가? 이 물음은 물량 제1주의를 향해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 사회 도처의 산업화, 현대화, 효율화 현상을 직접적으로 경험하는 90년대 한국작가들에게 부과된 커다란 숙제로 남아 있는 것처럼 보인다. 특히 그 결과로 증폭되는 모순과 사회 경제적 현실, 의식의 퇴행적 현실 앞에서 이 숙제는 어떤 이념과 경향을 막론하고 공통의 관심사가 되어오지 않았나 생각이 들 정도이다. 수출 드라이브 정책이 야기한 빈부격차, 강탈당한 민족의 정신, 끊임없이 밀려들어오는 외국 기업, 황폐화된 농촌, ‘개발’ 이란 명목으로 무참히 짓밟힌 자연환경, 그 결과로서 필연적으로 야기된 생태계 파괴, 외부의 입김으로 갈라진 두 쪽의 한반도 한편으로 한 층 가속화되는 배금주의 기능주의, 비인간화 현상 등 어둡고 음울한 현실의 표정은 너무나 많이 우리 주변생활 속에 편재해 있다.
더욱이 얼마 전에 체험한 ‘광주 민주화 항쟁’의 상처는 아직도 우리의 기억에 생생하고, 특히 정치권력의 고지점유을 위해서는 어떤 모험도 감행 할 수 있다는 끔직한 사회적 체험은 우리의 이완된 의식을 뒤흔들어 깨우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과연 이런 비극적 현실과 참담했던 과거를 떠올리면서도 대체 어떤 작품을 할 수 있으며 그렇게 한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하는 점은 새로운 문제의 축에도 끼지 못하며, 더 나아가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과연 무엇 인가 하는데 까지 의문이 미치게 되면 우리가 줄기차게 미술에 걸어 왔던 기대에 대한회의감, 좌절감마저 유발되기 마련이다. 그 만큼 우리의 힘으로는 감내하지 못할 무거운 문제가 그 간역사의 도도한 흐름의 마디마디를 엮어오면서 파행적인 비연속성을 초래했던 것이다.
물론 이런 문제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 보이는 ‘초월주의적 경향’ 과 ‘보수적 유미주의 경향’ 에 있어 선이 같은 시대적 과제는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을 수 있다. 이런 경향도 하나의 입장이자 방법 일수는 있지만, 예술이 어떤 시대에도 꾸준히 양심의 거울이 되어왔다고 볼 때 왠지 소명감을 저버리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점에서 우리의 육성으로 현실 문제를 뜨겁게 감싸내려 했던 대항문화에 자연 눈길을 돌리게 된다. 그것은 권위 정치와 군부 독재의 시대에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현실의 비진리적 요소와 비정의적 요소를 옥석을 가려내듯이 추출하고자 하면서 아카데미 속에 편입된 보수미술과 개인 이기주의에 매몰된 미술에 대해 대오각성을 촉구하는 계기를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것 또한 ‘계급이기주의’ 와 ‘혁명적 낭만주의’ 에 빠짐에 따라 이를 애정 어린 시각으로 바라보던 이들에게 동의를 얻어내지 못하고 명분에 집착해 극단적 처방책만 강구 하고 있다는 지적을 상기하게 되면, 이것이 미술을 계급 혁명의 한낱 도구로 인식 하는 것 인지 여전히 시대의 양심세력으로 남아있는 것인지 하는 의혹을 자아내게 한다. 조금 조급한 결론을 내리자면 보수쪽은 무사안일과 기회주의로, 또 그 반대쪽은 급진주의와 강령주의로 치닫고 있음을 경험케 한다는 것이며, 바로 여기서 우리는 ‘제3의 영역’에 대한 가능성을 추론해 보게 된다.
이 ‘제3의 영역’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 대항문화의 실천력을 되찾자는 것이 며 사회적 근대화와 마찬가지로 문화영역에서 그간, 또 지금까지도 빠른 걸음을 재촉하고 있지만, 그런 과정 중 행여 놓쳐왔던 부분이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그 부분을 진지하게 반성하고 탄력적으로 보완하자는 창조력 실천과 비판적 이론을 가리키는 것으로 요약할 수 있겠다. 앞에서 설명 했듯이 우리미술 문화라는 것은 사회 정치적, 그리고 문화적격 변속에서 실상’ 양철 지붕의 상태를 크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실험주의를 지향하는 현대미술에서나 민중미술에서나 공히 마찬가지였다.
가령 현대미술 진영에선 형식의 본질론을 앞세워 많은 양식을 실험했지만 현실 체험에 바탕 하지 않은 관계로 (그것을 오히려 질적 수준을 낮추는 것으로 폄하하여) 공허한 양식재탕이나 끝없는 쇄신주의로 빠질 수 밖에 없었다면, 민중미술 진영에선 획일적 현실 반영론을 과신한 나머지 정치의 예속화, 특정 이념의 선전 선동, 계급적 정치의식화 본거지로 예술을 타락시키는 우를 범하고 말았다는 의혹을 남긴다. 브란덴부르크의 벽만큼이나 높고 강고한 이분법은 한국화단의 중추적 작동 논리로 작용했지만, 그런 이분법의 논리는 몇몇 지각 있는 작가들에 의해 줄기차게 의혹의 타겟이 되어왔고, 그리하여 이들이 지배적 담론이라는 타겟과 싸움을 하고 한편으로 시대 역사적, 문명적 정황에 대한 실체 꿰뚫기 작업을 벌이는데 주력을 하게 되었던 것은 불가피 한 역사적 요청이라 봐도 무방할 정도다. 그리고 이런 ‘제3의 영역’의 터를 닦는데 분투한 작가 중 한 사람으로 조덕현을 떠올리는 것은 자연스런 연상 작용이다. 그다지 오랜 작품 경험을 갖고 있지는 않지만 이 작가는 한국미술에서 본의 아니게 배제하거나 취급하지 못했던 부분들을 충당해주며 새로운 작품 논리로 ‘한계상황’을 극복하고자 하는 노력에 땀흘리기를 주저치 않아 왔기 때문이다. 더 적극적인 의미에서 보면, 회화의 자율성을 사회적 내용 표출을 위해 제물로 바친다거나 반대로 작품형식의 심미화를 위해 현실의식을 도외시하지도 않으면서 그는 첨예한 현실의식과 풍부한 예술성의 상호접맥을 성공적으로 성취한 작가의 한 명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글에서 주시할 조덕현의 작품은 주로 88년 이후에서 근작으로 제한된다. 물론 그 이전작품까지 언급하는 것이 이작가의 작품 전모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의 관심이 현실문제에 투영되어 나타나기 시작한 무렵이 이때부터라 여겨지기 때문에 작품내용의 집약적 설명, 해석이라는 측면에서 시기를 이처럼 한정해두고자 한다.
88년도의 작품주제는 대략3가지로 분류된다. 하나는 <이중구조>로서 이것은 현재까지 계속해오고 있는 작품내용이고 다른 하나는 <하늘>을 주제로 삼은 것, 끝으로 <이십일세기를 위한 명상>이다.
일반적으로 작가는 이 세가지를 가지고 시리즈 작업에 임했다. (도1, 도2, 도3)
이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두 개 또는 세 개로 화면을 나누어 연결시킨다는 공통점이 있지만, 서로 다른 내용의 측면을 지녔던 것으로 파악된다. 가령 <이중구조>의 경우 남녀 무용수가 발레를 하는 모습과 피를 흘리며 쓰러져있는 익명의 인간을 대조시키는 충격적 연출 수법이 감지될 수 있고, 또 바이올린이나 거울 같은 오브제를 붙인 화면과 군중을 그린 화면을 병치하는 수법 등이 부각된다. (도4) <하늘> 과 <이십 일세기를 위한 명상>의 경우, 네모 틀 속에 구금되어 있는 인물상과 청명한 창공을 상호대조 시키는 방법이 사용된다. 따라서 <이중구조>가 시제면에서 과거+현재를 결합시킨다면, <하늘>과 <이십일세기를 위한 명상>은 현재+미래를 결합시킨다고 볼 수 있으며, 또 형태면 에서 전자가 실재(물론 여기서의 ‘실재’란 사진을 그린 일류전이지만)와 오브제의 유기성을 보인다면, 후자는 텍스추어(물론 그것은 암울한 인간이라는 내용을 침전시킨 질료성의 의미를 띠고 있지만)와 기계적 공정을 거쳐 표현된 가상적 일류전의 유기성을 각각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특성 못지않게 초기부터 작가가 고집해 온 또 하나의 ‘틀’ 이 있었다. 그 틀이란 한마디로 ‘인용’내지는 ‘차용’으로 정의할 수 있는데 그에게 있어 그 차용은 단계별로 약간의 차이를 두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즉 고전의 뿌셍과 카라바지오의 작품에서부터 자연 대상을 화면에 가두면서 형식의 질서를 내재화시킨 근대의 세잔느의 ‘사과’ 차용, 그리고 무용 동작 사진의 정교한 재현, 이외에도 거울과 바이올린, 지도 등 오브제의 차용에 이르기 까지 기존 작품이나 사진, 인공품들이 폭넓게 인용된다. 왜 이처럼 작가는 다른 손을 빌어 작품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나이브한 의미에서 ‘타인의존적’ 경향은 과연 어떻게 생각 할 수 있을까? 하는 점이다.
필자는 그것을 재현의 패러디적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고 생각 한다. 과거 원전을 풍자적으로 모방하는 방법, 요컨대 언어로 치면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과 같은 것 이다’ 거나 ‘누구는 이렇게 말했다’ 는 식으로 하고 싶은 얘기를 ‘간접프리킥’으로 골인 시키는 것이다. 이를테면 직설화법 대신 간접화법으로 목표지점에 도달하는 새로운 비판적 재현의 측면이다. 그러나 그것은 재현미술의 정통성을 믿는 사람에게는 하나의 ‘종파적’ 이거나 ‘사이비’ 형태로 간주될 것이며, 권위적 추상주의 자에게는 ‘이교도적인 것’으로 비춰질 것이 자명하다. 왜냐면 여기서 패러디는 지배담론을 완전히 부정하거나 허락하는 것이 아니라 기본 이미지 자체를 발췌, 배열, 모사하는 특징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기성품의 인용, 발췌는 더 극단적으로 말해 이제 현실 자체가 이미지나 구경거리, 좀 더 극단적으로 말하면 허구 이기 때문에 미술이 따로 반영할 것이 없다는 ‘예술의 죽음’을, 말하자면 ‘고갈의 징후’를 함축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또 기성품을 그대로 인용, 편집한 것이 또 다른 작품이 될 만큼 작가의 존재는 작아지고 상대적으로 ‘편집’술의 의미는 커지게 된다는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화면 밖은 ‘진짜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계의 기록’ 이거나 ‘화면들’ 이어서 이 작품이 마치 문서와 비디오 테입의 보관창고, 또는 세상 속의 한 물체와 같은 인상을 준다. 물론 조덕현에게 있어 과거나 오늘의 현실이 ‘구경거리’ 기 때문에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뜻으로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앞으로 밝혀지겠지만, 오히려 더 현실 비판적이고 중요한 문제가 이런 방식에 의해 걸러지고 있다고 생각된다. 이 문제는 그의 패러디 성격과 차용의 면모를 좀 더 차근차근 알아본 연후에 설명하기로 하겠다.
작품의 차용 형식이 좀 더 적극적인 의미를 지니기 시작한 것은 89년도 <터-황산벌>, 90년도의 <터-브란덴부르크문)> (도5)등 과 같은 작품이다.
이 작품들은 여러 개 의 화면을 연결시키면서 역사 의식을 한층 강조하였는데 이때부터 2만 5천분의 1로 축소된 지도가 들어가 구체적 장소의 명시와 더불어 어떤 내용의 함축성을 부여 하게 된다. 물론 이때의 ‘내용의 함축성’ 이란 남북 분단, 역사의식과 관련이 있음은 물론이다. 종전의 작품이 화면 귀퉁이에 희미하게나마 인간이미지를 그려 넣음으로써 서술성을 유지하였던 것에 비해, 그리하여 선명한 주제의식을 표출하고자 했던데 비해, 이 무렵의 작품은 ‘차용’을 더욱 심화시키고 그리하여 간접화법을 한층 강화하는 특색이 있다. 즉 특정 장소의 지형도(휴전선 인접 지도 등)가 등장하는가 하면 지구본을 오브제로 활용, 격변의 세계 질서의 재현 상황 (몰타회담 이후에 불어 닥친 동구권의 몰락, 동서독의 통일, 탈냉전체제의 구축, 탈 이데올로기 열기, 세계의 경제적 블록화 등)에도 아랑곳없이 세계의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의 비극을 매우 상징적으로 표출 하였다. (도6)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역사적 모뉴멘트의 성격을 지니고 있음이 분명하지만 역시 이런 작품 속에서 그의 발언을 극도로 억제시키는 예술전략은 여전히 유효하게 사용된다.
알다시피 지도란 대량 생산된 일개 복제물에 지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구본 역시 그 자체로서 어떤 특수한 의미를 지닌 다기보다는 오로지 ‘조합’과 ‘집합’속에서만 자신의 존재성을 취득하기 때문이다. 그는 오로지 상징성을 띤 기성품들을 조립할 따름인데 따라서 개인적 자율성, 창조적 새로움과 같은 재래의 예술적 관점은 괄호 안에 묶이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91년에 출품된 작품, 그리고 가장 최근의 물놀이하는 어린 아이들을 담은 작품이나 (도7)일제 강점기의 물동이를 머리에 인 소녀들을 재생한 작품, 그리고 같은 시기의 장터 풍경 따위도 작품 모티프는 각각 다르지만 과거 우리 조상들이나 그들의 삶에 깃든 애환을 짙게 풍기는 원작(사진)을 복제생산 한 것이다. 즉 이전 오브제 작품들이 ‘조합’과 ‘집합’의 차용이라면, 근래 작품들은 ‘복제생산’의 차용(물론 이 경우 상품처럼 대량복제가 아니라 단일 복제라는 특수성을 지니고 있지만)의 성격을 띤다. 이렇게 됨에 따라 작가의 주관, 의도, 주제의식은 뒷전으로 밀려난 것처럼 보이고 대신 ‘조합술’과 ‘재생산 기술’과 같은 새로운 용어들이 작품의 의미를 더욱 강화시키는 것처럼 생각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험난한 삶의 여정을 걸어야 했던 조상들의 생활상의 아주 단편적인 측면을 보여줌으로써 그의 작품은 그때 의사회상, 경제상, 나아가 역사적 상황까지 연결시켜 생각할 것을 내심 바라고 있는 듯이 보인다.
말하자면 작가는 새로운 창조적 방법으로 개인생활의 묘사를 통해 사회적 국면을 발전적으로 반추시켜 내도록 유도해 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여기서 왜 주관을 왜소화 또는 무용화시키는가, 그리고 정말로 주관이나 개인의지는 소멸되어 버렸는가 하는 보다 본질적인 문제를 검토 할 필요가 있다. 이 점은 비단작가에게만 한정되는 문제만이 아니라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들의 작품을 비판하는 주요한 문제가 되어왔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특히 남의 것이나 과거의 것을 차용하는 방식에 관해 영국의 비평가 테리이글튼이나 미국의 프레드릭 제임슨은 그것을 ‘깊이 없음’ ‘시시한 키취’, 심지어 ‘정신 분열증’ 이라고 혹독하게 비판한 바 있다. 그러나 새로운 예술의 주된 방법을 패러디라고 믿는 영국의 비평가 린다 허치온은 “자아를 설명하면서 예술작품이 동시에 미적 개념화의 과정과 예술의 사회적 상황에 주목하게 하는 것”으로 패러디의 성격을 규정한다. 허치온에 따르면, 포스트 모던예술은 “우리의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존재적인 현재와 과거를 ‘참고물’로 아니면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다고 하지만,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나이브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은 과거에 ‘궁극적인 목표’로 알려진 것의 실제 가능성을 검증 하기 위한 것 이라고 한다. 말하자면 과거의 사회적, 역사적, 그리고 실존적인 ‘리얼리티’가 예술의 참고물로 활용될 때 ‘담론적인’ 리얼리티가 되어 버리며, 따라서 ‘순수한 역사성’은 그 자체의 담론적이며 지속적인 모습을 공개적으로 인식시키게 된다고 역설 한다. 즉 참고물로서의 과거는 비판자들이 얘기하듯이 말살되거나 붕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움과 또 다른 생명력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이다.
필자는 이와 같은 패러디의 성격이 조덕현의 작품본질을 이해하는데 유력한 단서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믿는다. 특히 이 같은 작품경향은 근래 제작된 작품 속에 잘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근래작가의 관심이 머무는 곳은 한국의 역사, 그 중에서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기록되는 한국전쟁과 치유할 수 없는 상처를 안겨준 광주 항쟁과 같은 ‘대참극’이다. 죽어있는 시체의 운구, 총탄에 맞아 비명을 지르는 병사, 허리를 반쯤 숙이고 달아나는 시민과 시위대, 포화가 멎은 탱크위에 걸터앉아 태평하게 포즈를 취하는 해맑은 표정의 아이들, 작가는 역사적 사건을 아주 짧막한 장면을 통해 환기 시킨다. (도8, 도9)
그러나 작품의 진술내용으로 보아 ‘사건’의 진상을 파헤친다거나 특정 이데올로기로 그것의 시시비비를 가리는 일, 즉 가치평가는 접어두고 있다. 작가가 한국전쟁과 광주항쟁과 같은 서로 다른 ‘사건’을 작품의 줄거리로 잡아 형상화 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맥락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눈 여겨 볼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작품 내용을 해석하는 태도가 종래의 리얼리즘과 사뭇 다르다는 점이다. 다른 점은 몇 가지 사실에서 추출 할 수 있다. 첫째 사진을 ‘그대로’ 그려 옮김으로써 일종. 다큐멘터리 성격을 띠고 있으며, 둘째 작가의 주장을 최대한 ‘객관화’ 시키려 노력하고 있으며, 셋째 여기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 사건을 의미 내용이 다른 공간, 즉 화면의 다중구성과 연결시켜 놓음으로써 역사화 이상의 ‘그 무엇’으로 전환 시키고 있다.
그러면 작가는 왜 이처럼 작가의식을 ‘직접적 프로’ 표출하지 않고 ‘사진’이라는 매개물을 사용하는 걸까? 그것은 이 작가의 예술관을 설명하는 매우 중요한 모멘트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어떤 내용을 가치기준에 절대적으로 의존해 이것은 옳고 저것은 그르다는 식으로 주장하는 것과 객관적 자료에 입각해 진술하면서 그것의 평가를 감상자에게 맡기는 것과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작가는 누군가에 의해 포착된 역사적 현장의 단면을 ‘태연하게’ 재생해 내는 것으로 자신의 얘기를 대신하고자 한다. 거기에 일체의 감정도 깃들어 있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론을 섣불리 강요하지도 않는다.
오늘날 우리는 벤야민이 일찍이 말했듯이 ‘아우라’ 상실의 시대 속에 살고 있다. 또 팝아트 의 ‘교황’ 앤디 워홀이 말했듯이 모든 이미지가 기계적으로 복제 상품화되는 시대 속에 살고 있기도 하다. 불행이든 행운이든 그것이 우리가 맞이하고 있는 시대의 표정이다. 그런데 이 새로운 ‘총체적인 커뮤니케이션 패키지’ 는 거의 동시에 모든 장소에 확산되어 끊임없이 반복 재생산 된다. 또한 현대예술은 인쇄 혁명에서 자신의 입장을 재정리하지 않으면 안될 급박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사진 건판, 일렉트로닉 회화의 출현, 그리고 롤 필름, 19세기 후반의 전화와 축음기의 발명, 이 밖에도 1990년대 경의 라디오 보급과 모션 픽쳐의 대중화, 1940년대 이후 미국과 서구유럽에서의 T.V의 급속한 보급, 이와 함께 서울올림픽에서 보았듯이 인공위성의 발명으로 전 인류가 올림픽게임을 즐기는 80년대적 상황에 이르기까지 기계의 혁신적 발전은 우리의 삶의 방식에 일대전환을 안겨 주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테크놀로지 이미지의 출현으로 순식간에 ‘생산의 시대’로부터 ‘재생산의 시대’로 문화적 변화를 불러일으켰다는 점이다. 그리하여 포스트 모던 문화에서 산업적 생산 관계들은 이러한 후기 산업적 커뮤니케이션 의 생산 관계에 흡수되어 왔다고 하는 주장의 근거도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컴퓨터 스크린과 그것을 출력하는 프린터를 갖춘 비디오 레코더를 소지한 포스트모던 인간은 점차 벤야민 식으로 말하자면 ‘자율적 예술작품’이 지닌 유일무이할 뿐 만 아니라 무엇과도 대체 할 수 없는 ‘아우라’에 대한 전인류적 예배 가치로부터 멀리 떨어져 간다. 그리하여 개인주체는 이제 그 자신의 이미지를 더 이상 만들어 낼 수도 전달 할 수 없게 되었다는 무서운 회의주의에 빠지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가 소유하는 이미지란 이미 우리 앞에 있는 이미지를 재생산 한 복사물에 불과하게 된 것 이라는 신념이 성립하게 되는 것도 이 사실과 결코 무관하지만은 않다.
조덕현의 회화 속에 나타난 ‘리얼리티’ 는 실제의 ‘리얼리티’가 아니라 ‘복제된 리얼리티’, 즉 사진을 그린 데 불과하다. 정확히 말해 진짜의 세계가 아니라 진짜 세계를 기계적으로 재생산한 이미지를 선택적으로 인용, 재생한 것이다. 그리고 이로부터 우리는 커다란 ‘예술’의 변경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하게 된다. 재래의 예술생산이 독창성과 창조성에 의존하여왔다면, 그는 더 이상 창조자라기 보다는 있는 사실이나 자료를 ‘편집’ 하는 일에 주력한다. 말하자면 창조자의 권리를 내놓고 동시에 주관의 의미를 극소화 내지는 무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역사적 현장을 ‘선택된 사진’으로 똑같이 그려내는 일이나 화면모퉁이나 부분에 견장, 계급장, 지도, 그리고 기타장식물을 부착하는 것을 보면, 작가의 소재 편집적 취향이 얼마나 크게 반영되고 있는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흔히 포스트모더니즘 논쟁의 중요한 항목으로 취급되는 이러한 복제된 이미지에 대한 평가는 크게 두 가지로 대별된다. 하나는 그것이 새로운 매스 커뮤니케이션 사회에 있어 포스트모던이미지는 ‘표피성’과 ‘깊이없음’을 노출한다는 입장이고, 다른 하나는 어떤 현실의 재현도 본질적으로 ‘진리’가 될 수 없음을 보여줌으로써 가치, 질서, 통제, 그리고 자기 정체성으로 불려 왔던 원리들의 허구를 비판한다는 입장이다. 즉 전자는 비판자들의 입장이고 후자는 지지자들의 입장이다. 이 두 관점 중 조덕현의 작품은 과연 어디에 속할까?
그의 작품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후자에 속한다. 조덕현이 한국전쟁의 이미지 재생을 통해나타 내려는 것은 남쪽에서 일컫는 ‘적화야욕’도 아니고 한편 북쪽에서 일컫는 ‘조국 해방전쟁’도 아닌 어떤 이데올로기도 개입되지 않은 ‘비극의 씬’이면서도 휴머니즘적 속성을 다분히 풍기는 역사기념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자신 이러한 역사를 다만 ‘뜨거운 애정’을 갖고 표현할 뿐이라고 말한다. 즉 그는 한국 전쟁을 흔히 써먹듯이 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재어 보는 것이 아닌 ‘개인(들) 사회적 경험’을 통해 해석함으로써 역으로 좌/우 통치 이념의 충돌이 빚어낸 민족의 치유할 수 없는 ‘사건’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즐비하게 늘어선 시체의 운구 장면, 살상과 이념 대립에 아랑곳 없이 탱크위에 즐거운 표정을 짓는 아이들, 역사의 비극을 파묻어둔 채 단지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휴전선 인근의 지도 등등은 그가 패러디를 통해 사건의 진실을 또 다른 방향에서 파헤쳐 보려는 진지하면서도 냉철한 역사해석의 색다른 시도에 다름 아니다. (도10)
작품의 형식면에서도 주목할 만한 하나의 현상을 찾을 수 있다. 작가는 그의 작품에서 한 가지 사실만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사실을 보여 준다. 그 내용은 대체로 서양적인 것/동양적인 것, 추상/형상, 환희/고통, 역사적 사건/장식적 형식, 순수/참여, 휴머니즘/정치 이데올로기, 현실/관념으로 나뉘어 진다.
그리고 작가는 이와 같은 이항대립의 문제를 다중구성의 형식으로 교차시켜 가고 있는 것이며, 이를 공인된 말로 표현하자면 ‘탈경계’로 설명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대립개념을 한 공간 속에서 희석, 무력화 시키면서 상호모순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이를 통해 모순의 극복을 역설적으로 호소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것을 ‘주변유도논리’ 라는 것으로 풀이 하면서 그렇게 하는 자신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밝힌다.
“사회학에서 이야기하는 주변유도 논리(周邊誘導論理)란 중심유도 논리(中心誘導論理)와 반대개념이다. 중심유도 논리는 한 문화권을 중심부와 주변부로 나누어 볼 때 주변부의 존재들이 중심체계를 지향하여 예속되어 있는 상태를 뜻하는 것이고, 그에 반해 주변 유도 논리는 주변적 위치의 예외자와 잉여적 존재들이 그 원천을 중심부에 두면서도 자신들의 무수한 관점과 체험으로 독자적인 문화를 생산해낼 수 있게 된다는 논리이다.
그 예로 프랑스, 영국, 독일의 경우 문화적 원천을 고대 그리스와 히브리에 두면서도 각각자신들의 체험과 언어로써 독자적인 사상사를 만들어낸 것을 들 수 있다. 우리 미술사에서 독보적 존재인 겸재 정선(謙齋 鄭膳) 경우도 그 주변유도의 논리를 회화에서 실천한 본보기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17세기후반, 문화적인 자부심이 고조되었던 조선사회를 배경으로 겸재는 그때까지 화단의대 종을 이루던 중국화의 답습에서 탈피하여 우리의 산천을 사생하는 데 가장 알맞은 겸재진경동국화풍(謙齋東國眞景畵風)을 창안한 것이다.
굴절된 형태로 서구문명이라는 세계사적 주류의 도입이 시작된 이후 1세기가 되어 간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아직도 많은 문제가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전통과 현대, 동양과 서양, 순수와 참여 등등 여러 가지 극단적인 이원개념이 우리의 갈등 구조를 이루고 있다.
나는 이 시점에서 그 ‘주변유도 논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온갖 개성이 난무하는 지금의 화단의 현상은 비단 특별한 과거의 아픔을 갖고 있는 우리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세기말 적 인 상황 때문이 라고도 할 수 있겠으나 그렇더라도 우리의 다음 세대에 넘겨줄 수 있는 건강한 정신은 어떡하든 찾아져야 되겠기 때문이다. 그것을 위한 의견으로서 나는 나의 생각이 담긴 그림을 내어 놓는다. 지금의 작업에서 내가 지향하고 있는 것은 다음의 두 가지 관점을 화면에서 무리 없이 만나게 하는 것이다. 하나는 서양미술의 심층적 이해이며 다른 하나는 우리의 주변에 대한 깊은 애정 이다. 아직은 마음이 앞서기 때문에 두 관점은 화면에 서 부딪치고 있지만 그것들이 화목하게 만날 때 나는 ‘주변유도 체계로의 전환’에 한 몫을 한다는 자부심을 느낄 것이다.”
이 글은 작품의 대상이 한낱 작가의 주관영역, 이를테면 환상, 상상력, 직관, 정서에 한하는것이 아니라 예술계의 문제가 되고 있다는 점을 명백히 밝혀준다. 그리고 이런 문제를 특정관점이나 세계관에 편중해서가 아니라 ‘다차원’과 ‘다가치성’에 입각해서 해결하려는 새로운 착상을 제시한다. 물론 이 경우 ‘다차원’과 ‘다가치성’ 이란 세계인식과 작품인식에 있어서 이질적인 두 요소-그것이 상호 모순적인 것이든 상호 보완적인 것이든-를 상존하게 만드는 구속력을 지니고 있음은 두 말할 나위가 없다. 이런 점에서 그의 작품은 ‘탈 이분법적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작품의 ‘탈 이분법적 논리’는 화면의 다중구성과 같은 형태적인 측면에서만 바라볼게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했던 것들의 재편성과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여 진다. 즉 부수적인 것, 시대에 뒤 떨어진 것, 진부한 소재로 낙인 찍힌 것들이 오늘날 새로운 맥락을 형성하면서 지배적인 것으로 격상되는 조짐마저 보이고, 보다 넓은 시야에서 보자면 어떤 역사적 경험을 ‘아무런 주관의 개입 없이’ 객관적 상황으로 재생시킴으로써 새로운 판단의 영역을 ‘뜻밖에’ 불러 일으켜 내는 것이다.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그것은 아무리 무거운 주제라 할지라도 ‘삶의 감성’에 여과되지 못한다면 호소력을 전혀 갖지 못한다는 사실이다. 작가가 사진의 기계적 재생에 의존하면서 도 삶과 죽음의 의미를 강조 하고, 또한 유년시절의 동경, 어려운 고난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의 초상을 재현 하면서 ‘휴머니티’에 보다 큰 의미 부여를 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물론 여기서도 개인의 사회적 경험, 세월의 때가 묻은 오래된 손거울, 베개장식, 가구용 장식과 같은 오브제를 통해 역사성을 환기 시키려는 의도가 역력히 드러나지만 이와 함께 ‘사람다움’을 간직했던 선인들의 자취, 흔적은 오랜 세월의 시간적 침식 속에서도 여전히 그 생명력은 살아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이 사진첩, 자료보관실, 박물관, 기타 역사책 속에서만 ‘살아있음’을 작가는 지적해 내고 있을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