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Man Young
Han, Man Young
시간과 공간을 유희하는 한만영의 회화
임창섭 미술평론
연속되는 시간의 흐름을 한순간 한칼에 잘라내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그 누구도 인식하지 못한 채 우리는 우주에서 사라질 것이다. 바로 그 순간이 우주종말의 시간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시간을 휘어서 서로 맞대어 붙이면 어떻게 될까? 이 시간이야기를 하려면 약간의 물리학 이론이 동원되어야 한다. 정지한 기차 속에 앉아있는 내가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지는 때가 가끔 있다. 이 느낌은 옆 기차가 움직이고 있는데 마치 내가 탄 기차가 움직인다는 현상現象 사실을 착각하는 현상現狀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이런 현상을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1632년에 출판한 ‘두 체계에 관한 대화’에서 ‘상대론’relativity으로 설명한다. 그러니까, 내가 정지해있거나 움직인다는 것은 상대와 거리가 얼마나, 어떻게 변하는지를 나타내는 상대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뉴튼 역학의 기본이 되는 이 갈릴레이 상대론은 ‘빛의 속도는 지구의 공전속도에 영향을 받지 않고 일정한 값을 가진다는 것’이 밝혀짐으로써 부정확하게 되고 말았다. 즉 나의 상태에 관계없이 모든 물리량은 동일하게 측정되지만 속도만 다르다고 말한 갈릴레이의 주장은 맞지 않게 된 것이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이 바로 아인슈타인의 ‘특수상대성이론’Special Theory of Relativity이다. 모든 관측자에게 동일한 물리법칙이 적용된다는 갈릴레이의 상대성이론을 따르면서, 빛의 속도가 누구에게나 항상 같으려면 물리량이 달라야 한다고 아인슈타인은 생각한 것이다. 바로 여기서 물체가 E 만큼의 빛 에너지를 방출하면, 그 물체의 질량은 E/c2(c=빛의 속도)만큼 줄어든다는 것에서 우리가 알고 있는 E=mc2가 탄생한 것이다. 이 현대물리학 이론을 통해 시간과 공간은 절대가 아니라 상대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이해하고 나면, 시간을 휘어서 맞대어 붙인다는 상상도 그다지 억지 같은 생각은 아니게 되는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이용한 것이 바로 영화 ‘스타 트렉STAR TREK’이다. 공간을 빛의 속도로 이동하는 기술로 위기를 모면하는 이 영화의 장면이, 아인슈타인의 이론에 빚지고 있는 것임을 이해하면, 시간과 공간도 변화한다는 시각적 좋은 보기라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충분하다.
이 정도 설명으로 시간이 휘어진다고 하고, 유럽의 바로크시대와 고려문화의 전성기였던 12세기 서로 다른 두 장소의 시간을 연결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장식이 넘치고 화려한 색채로 치장한 유럽의 황실문화와 정교하고 섬세하지만 기품이 있는 고려 귀족문화가 잘 어울릴 듯싶다. 어떤 험악한 일이 일어날 확률이 더 높겠지만 말이다. 18세기 신윤복의 「미인도」와 마네의 「올랭피아」 그림에 나오는 모델이 대략 60여년 시간차를 극복하고 만난다면 무슨 이야기를 나눌까? 야릇하지만 서로 다른 밤 문화에 대하여 이야기하면서 호기심어린 눈빛을 주고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서로 다른 시간을 연결하는 이런 허황한 상상력을 필자에게 떠올리게 만든 것은 한만영의 작품이다. 지금까지 줄곧 그가 제작하고 발표한 작품은 재미있는 상상의 서사narrative라고 먼저 정의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작품은 시간과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과 공간이 겹쳐지면서 생겨나는 익숙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생경하고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익숙한 장면과 시간이 겹쳐서 익숙하지 않은 사건을 생각하게 만드는 한만영, 그는 ‘세상일은 하나다’라고 독백한다. 익숙한 것도 익숙하지 않은 것도, 사랑도 미움도, 평범함도 비범함도 결국은 우리의 인식 한계를 뛰어넘으면 다 같은 것이 되고 만다는 뜻일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몰라도 그의 작품은 군더더기 하나 없이 정갈하고 깔끔하다. 한겨울 코끝에 찡하며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 같다. 한만영은 1970년대부터 80년대까지 「공간의 기원origin of the space」시리즈를 그리고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시간의 복제reproduction of time」시리즈를 발표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 여러 평론가가 눈여겨 본 부분은 오브제가 지속적으로 등장한다는 것이었다. 불상, 토우, 병마도용, 고서, TV모니터, 디스크 혹은 서양의 회화가 그려진 달력 등 일상생활에서 볼 수 있는 물건들을 오브제로 캔버스 화면에 차용되는 점에 착안하여 평론을 했다. 이 부분은 그들의 평가와 해석에 맡겨두고 이번에 발표하는 그의 작품에 눈을 돌리면 이전과 같은 성격의 오브제는 보이지 않는다. 즉 이번 작품에서는 오브제가 가지고 있는 시간성時間性과 장소성場所性을 캔버스에 옮기는 작업을 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다.
다만 「시간의 복제-폭포Reproduction of time-Fall」에 작은 돌멩이 하나를 화면 아래쪽에 올려놓은 것이 전부이다. 하늘색을 칠한 작은 공간을 만들고 그곳에 다소곳한 느낌이 드는 돌멩이로 화면전체를 생동감 있게 만든 것이다. 그의 위트witty이자 재미play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돌을 작품 속에 집어넣어 만든 작품, 그 폭포를 보는 순간 우리는 명쾌하게 해석한다. 언젠가 내가 보았던 내 머리 속에 있던 풍경이 환하게 들어온다. 그리고 또 하나, 그가 사물을 묘사하는 능력은 알만한 사람은 모두 인정하는 사실이지만, 300호 크기에 그려진 매화는 영문법 시제로 말하면 ‘현재진행형’이다. 그만큼 생생한 매화가 내 눈 앞으로 다가온다. 마치 조금씩 시간 차이를 두고 피어나오는 매화를 보고 있는 듯하다. 그렇게 핀 꽃은 나뭇가지가 오래 아주 오래 간직한 시간 이야기를 우리에게 속삭여 준다.
한만영은 그동안 서양미술사에 나오는 유명한 그림에서 차용한 이미지를 자신의 작품에 옮기는 작업을 해왔다. 그동안 그 이미지를 그대로 그리거나 인쇄된 종이로 옮기는 방법을 사용했지만, 이번 작품에서는 아주 다르다. 오브제를 차용하거나 이미지를 그대로 옮겨 그리는 대신에, 그동안 시도하지 않았던 새로운 방법을 동원한 것이다. 그것은 이미지를 실루엣으로 전환해서 철판에 옮겨 선 그대로 잘라낸 것을 화면에 부착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지를 선으로 바꾸고 그것을 ‘컴퓨터 절단’기술로 철판을 잘라내서 실루엣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다. 그렇게 만든 철판을 자동차용 도장을 한 뒤에 단색으로 미리 섬세하게 칠해놓은 캔버스 위에 마네의 「피리부는 소년」이나 드가의 「소녀」 같은 이미지를, 아니 철판을 붙이는 것이다.
그런데 한만영은 여기서 작업을 끝내는 것이 아니라, 이 중간에 한 가지 더 과정이 있다. 실루엣으로 생긴 공간을 채우는 것이다. 실루엣으로 생긴 공간 모양대로 캔버스보다 약간 높은 상자를 만들어 덧붙이고 그 위에 철판을 붙이는 것이다. 이 상자는 당연히 바탕 화면과 다른 색으로 칠한다. 그런데 이 상자와 철판은 약간 이미지가 서로 엇갈리게 겹쳐서 부착한다. 이미지가 중첩하는 효과를 만드는 것이다. 사진을 찍을 때 마치 초점을 맞추지 못해서 찍힌 것처럼 이미지가 겹쳐서 보이게 되는 것이다. 눈썰미 있게 한만영의 작품을 관찰하면, 이런 장치뿐만 아니라 캔버스에 직접 약간 도드라지게 이미지 실루엣을 물감으로 그려놓은 것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바탕화면, 도드라진 물감 층, 상자, 그 위에 철판이 부착되는 것이다.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작품이라고 했다가 복잡한 작업과정을 늘어놓다보니, 한만영의 작품은 세심하지만 복잡한 의도로 제작된 것이라는 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의 의도가 이미지를 서로 비껴서 중첩하게 한 것은 그것들끼리의 차이와 대립 그리고 서로의 관계에 의해서 생기는 해석은 불완전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마네와 드가의 작품에서 그들이 만든 이미지를 가져왔다는 것은 어쩌면 그 작품의 평가 혹은 해석에 대한 불완전성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까?
한만영의 작품에서 실루엣 이미지는 완벽하게 일치하지 않고, 약간 엇갈려서 중첩하게 만들어낸 작품기호는 ‘공간적 차이’spatial difference와 ‘시간적 지연’temporal deferment때문에 절대적으로 확실한 의미로 고정되거나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는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의 주장을 떠올리게 된다. 그의 주장에서 차이와 지연을 결합해서 만든 용어인 ‘차연’差延differance을 결국 한만영의 작품에서 읽어낼 수 있 것이다. 우리에게 익숙했던 서양미술 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를 차용해서 시간의 부딪침과 공간의 겹침을 시각화 한 것이 한만영의 작업인 것이다.
완성할 수 없는 해석은 무한히 늘어난다. 완성하기 위해 해석을 계속하기 때문이다. 결국 해석은 완성되지 못하고 늘어만 간다. 너무나 많은 것은 없는 것과 같다. 있음有과 없음無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다시 한번 한만영의 독백이 다가온다. “세상일은 하나다.” 어쩌면 우리의 삶과 죽음이 무한하고, 사랑도 미움도 이 세상에 너무도 흔해서 어쩌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