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n Un-Sung
과일채집
한운성의 「과일 채집」은 ‘생명의 미술’ 이다. 곤충을 채집하고 식물을 채집하듯 그는 과일을 채집한다.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하여 머지않아 이상야릇하게 변해 버릴지도 모를 과일을 부지런히 그리고 성실하게 화면 위에 채집한다. 생명의 본디 모습을 지키려는 노력이다. 그런 점에서 그의 그림은 미술의 본질과 맞닿아 있다. 본디 미술이란 생명을 표현하고, 생명을 북돋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생명체-관심의 전환 한운성이 <과일 채집>시리즈를 본격적으로 제작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를 보내고 21세기라는 새로운 세기를 맞는 고개 마루에서였다. 그래서, 이 작품에는 새로운 세기에 대한 설렘과 두려움 등이 얼 섞인 상징적인 의미가 담겨져 있다. <과일 채집>에 대해서 작가 자신은 이렇게 설명한다.”1999년에 개인전을 가질 때 저물어 가는 20세기를 보내며 감회가 남달라 무언가 한마디하고 싶다. 세기가 바뀌는 해를 맞는다는 것은 어찌 보면 선택된 사람만이 겪는 경험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21세기를 조망하건대 분명 유전공학이 컴퓨터공학에 버금가리 만큼 발 빨리 움직이겠고, 유전자조작 이라거나 혹은 생명복제라는 단어가 요즈음의 컴퓨터라는 난어만큼이나 비일비재하게 인간의 입에 오르내리라고 우리는 쉽게 예측할 수 있다. 요즈음 원고지에 적힌 글을 보기 힘들 듯이 오리지날한 생명체의 모습이 조금씩 모습을 감추리라는 생각에 서둘러 <과일 채집>에 손을 대면서 저물어 가는 20세기에 대한 변을 대신하고자 했다.”
사람들이 곤충 채집이나 식물 채집을 할 때는 우선 사라져 가는 것들이나 희귀한 것들을 집중적으로 채집하게 된다. 본능적으로 그렇게 된다. 한운성이 보기에는 이 과일들도 곧 사라져버릴 ‘채집 대상’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래서 안타까운 마음으로 그는 과일을 채집한다. 그리하여 후대 인간들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이다. “옛날 옛적에는 이런 과일이 있었단다”라고…
그러나 한운성이 화면에 채집하고 있는 과일들도 사실은 조물주가 창조한 과일의 본디 모습과 비교하면 엄청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브가 에덴 동산에서 따먹었다는 ‘선악과’라는 사과의 원래 모습을 우리는 알 수가 없으나 지금의 사과와는 많이 다른 모습일 것이다. 어쩌면 모든 과일의 모습이 변하였을 것이다. 이른바 ‘개량종’인 것이다 ‘개량’이라는 말부터가 철저하게 인간 중심적이고 폭력적이다. 과일을 생명의 본질과는 상관없이 인간의 입맛에 맞게, 또는 수익성을 높이기 위하여 마구잡이로 바꾸어 버리는 것이 이른바 ‘개량’인데 그런 과정에서 과일은 과일다움을 상실해 버리기 한다. 예를 들어 씨 없는 수박이나 씨 없는 포도 같은 것들이다. 상품으로는 우수할 지 몰라도 ‘씨앗’ 즉 ‘생명’이라는 과일의 본질을 거세 당한 과일은 이미 과일이 아니다.
이제 과학이 더 발전하여 유전인자를 마음대로 조작할 수 있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한운성의 초기 작품인 <눈 먼 신호등>처럼 앞길을 예측하기 어렵다. 그래서 그런 끔찍스러운 일이 벌어지기 전에 과일들의 지금의 모습이라도 부지런히 채집해 놓자는 것이 한운성의 생각인 것이다. 그림을 통해 생명의 본질을 지키려 애쓰는 일, 그것이 미술가의 몫이라고 믿는 것이다.
단순히 그런 목적이라면 사진으로 찍어 놓는 것이 더 효과적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한운성의 ‘과일 채집’ 은 그림이라는 방법을 통해서 힘과 설득력을 갖는다.
메시지 – 절대자의 묵시 한운성의 <과일 채집>을 처음 접했을 때, 좀 느닷없다는 느낌이었다. <월정리 역> <박제된 호랑이>같은 한국적 현실에 뿌리를 둔 의미심장한 작품들에 뒤이어 등장한 것이 <과일 채집>이었기에 더욱 그랬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곧 이해할 수 있었다. 한운성의 작가적 관심이 생명의 문제로 옮겨진 것이다. 복잡한 사회구조 속에서 괴로워하는 사람의 문제에 집중되었던 그의 관심이 생명, 신과 과학의 문제 등의 좀 더 본질적인 쪽으로 옮겨 간 것이다. 매우 바람직한 변화라고 여겨진다. 물론 그 싹은 오래 전부터 이미 작가의 안에서 자라고 있었다.
“그림은 무엇보다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그림을 통해 절대자의 의지를 전달하려고 합니다. 절대자는 세계를 움직이는 어떤 거대한 존재로, 인간의 오감을 초월하는 어떤 것이지요. 절대자는 우리 인간에게 사소한 현상들을 통해 그의 의지를 묵시 (默示)한다고 봅니다. 그래서 나는 작업과정에서 구체적인 사물들을 빌어서 그 뜻을 암시적으로 전달하려고 합니다.”
– <월간미술> 1990년 4월 ‘이달의 작가 연구 기사 중 오병욱과의 대담 중에서 –
그러니까 한운성의 <과일 채집>은 절대자의 의지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과일이라는 구체적인 사물을 통해 절대자의생명에 대한 묵시를 포괄적이고 구체적으로 표현하려고 한 것이다. 어떻게 보면 한운성의 과일들은 이전에 그가 다룬 소재들에 비해 훨씬 더 효과적으로 강렬하게 ‘신의 묵시’ 라는 메시지를 전해준다.
한운성의 <과일 채집> 시리즈는 변화를 거듭하며 진행되고 있다. 이 변화는 작가의 관점이 건강하게 달라지고 있음을 말해준다. 이 시리즈는 82년 잠시 시도되었다가, 세월이 흐른 뒤인 97년이 되어서야 본격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초기의 작품들은 여러 개의 과일이 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구도의 작품들이다. 그의 초기 작품인 ‘지혜가 느린 그림자’ 에 과일을 대입시킨 듯한 구도이다. 마치 길게 드리운 그림자가 어떤 세기말의 징후를 암시하고 있듯이 말이다. 그러다가 하나의 과일을 클로즈업하는 쪽으로 시각이 옮겨지며 특히 과일의 꼭지 부분을 정 가운데 위치한 그림들로 변화되어 오면서 어둠 속에 기울어 가는 달의 모습을 연상케 하고 있다. 과일을 그릴 때는 대부분의 경우 옆모습을 그리는 것이 보통인데, 한운성의 시선은 과일의 꼭지 부분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과일의 꼭지 부분은 생명의 상징이다. 생명의 근원인 나무와 붙어 있던 ‘생명선’ 이 바로 꼭지 부분이다. 그러니까 작가의 시선이 과일을 ‘정물’로 차갑게 바라보던 시각에서 생명의 상징인 꼭지로 옮겨진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한운성의 과일 그림은 일반 정물화와 그 궤를 달리 한다. 과일의 이름도 ‘채집’의 일반적인 유형을 따라 학명을 기재하고 있음도 유념할 필요가 있다.
작가와 현실 – 긴장과 풍자 한운성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 사회의 상황을 상징적인 물체를 통하여 들어내 보여준 작가이다. 강렬하고 분명한 메시지를 단순한 코카콜라 캔으로 표현한<욕심 많은 거인>을 위시하여 <눈 먼 신호등> <지혜의 기둥> <받침목> <매듭> <박제된 호랑이> 등으로 이어지는 그의 그림들은 사회적 관심의 산물들이었다. 날카로운 문명 비판이요. 고통스러운 자기 고백 시대의 아픔을 함께 아파하려는 자세… 그는 자신의 작품들에 담겨진 메시지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 적이 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현대사회의 상황과 위기의식입니다. 벌레 먹은 나뭇잎이나, 찌그러진 콜라 캔, 눈먼 신호등, 받침목, 매듭 등을 제시 함으로서 풀어야 할 많은 문제를 가진 오늘의 우리 상황을 나타내고자 합니다.”
이렇듯 한운성의 현실인식 비판의식은 요란한 ‘구호’를 내걸고 겉으로 강하게 드러나지 않는, 나지막하게 읊조리듯 울림이 큰 목소리로 본질을 이야기한다. 이를테면 그의 접근 방식은 매우 철학적이다.
한운성은 대학 시절 필자에게 코린 월슨의 <아웃사이더>를 읽은 적이 있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이 ‘아웃사이더’의 정신은 바로 한운성의 작품세계를 관통하는 기존 색깔이다. 그가 이야기하려는 사회 문제는 시사적인 문제나 정치적인 쟁점 같은 한시적(限時純)인 것이 아니다. 인간의 소외와 고독, 인간을 일그러뜨리는 구조적인 모순, 뒤죽박죽으로 얼크러진 가치관의 혼란, 앞이 보이지 않는 절망감, 좀처럼 풀릴 것 같지 않는 매듭과 같은 근본적인 문제점들이다. 현실을 직시하고 그것들의 문제점을 들어내는데 있어 소재는 다양하게 변화했지만, 소재를 관통하는 문제의식은 항상 일관되어 있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한운성이 그 동안 다루어온 주제들은 매우 심각하고 어둡고 무거운 것들이다. 찌그러지고, 눈멀고, 답답하게 얽혀 있고, 묶여 있고, 박제되어 있고 채집되어 있고… 이런 식의 부정적인 모습들이다. 그런데도 그의 화면은 밝고 건강함을 잃지 않는다. 여기서 우리는 한운성의 풍자 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한운성의 현실 비판이 설득력을 갖는 것은 현실에 대한 정확한 인식과 복합적인 풍자 정신을 바탕에 깔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풍자는 문명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비판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예를 들어 한운성의 <욕심 많은 거인>에서 코카콜라 캔은 자본주의 경제 대국인 미국 소비문화를 대표하는 상징물이다. 그것이 미국인의 삶의 중심축의 하나인 자동차 바퀴에 깔려 납작하게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그러니까 미국의 상징물이 또 하나의 미국의 상징물을 깔아뭉개 초라한 모습으로 납작쿵을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런 한편으로 제목을 ‘거인’ 이라고 달아 놓았다. 통쾌한 풍자다. 한운성의 현실 비판과 풍자는 다양하게 전개된다. 우리 민족의 호방한 기개를 상징하는 호랑이는 박제가 되어 관광객들의 기념사진 모델 신세로 전락했고, 갓 심은 어린 가로수의 버팀목은 제 구실을 할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신호등은 고장이 나서 눈이 멀었다. 그리고 온 세상은 매듭으로 답답하게 얽혀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과일 채집>도 고차원의 풍자다. 과일을 채집하겠다고 나서는 일부터가 일상적이 아니다. 그러나 풍자는 근원적으로 곧 사랑이요. 안타까운 연민이자, 희망이다.
<욕심 많은 거인>에서 <과일 채집>에 이르기까지의 한운성의 풍자는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아니 오히려 더 강력하다. 이것은 한운성의 중요한 작가적 미덕이기도 하다. 잘못 돌아가는 세상의 어두움이나 삶의 본질적인 문제들을 밝고 건강한 목소리로 이야기하면서 큰 울림을 준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것을 가능하게 하는 힘은 그의 건강한 풍자 정신과 철저한 조형정신, 현실과의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는 긴장감 등에서 비롯된다. 그리고 현실에 대한 사랑과 끝내 희망을 버리지 않는 마음 때문이다.
한운성은 사회적 메시지를 존중하면서도 ‘그림은 그림다워야 한다’ 고 믿고 그렇게 실천하는 작가다. 그는 자신이 말하려는 바가 그림으로 완전히 녹아들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면서 손과 머리와 가슴이 일치되는 경지를 열망한다. 원래 한운성은 그림을 썩 잘 그리는 작가이다. 그래서인지 때로는 기교가 지나쳐서 메시지가 약화되어 보일 때도 있다. 그럴 조짐이 조금이라도 보이면 그는 미련 없이 다른 소재를 찾아 나선다.
한운성의 작품을 대하면서 느끼는 필자의 개인적인 아쉬움은 ‘시적(誇的)여유’ 에 관한 것이다. 그의 주제가 어쩔 수 없이 논리적이고 이지적일 수 밖에 없는 노릇이지만, 한운성의 작품들은 항상 주제와의 팽팽한 긴장관계를 강조하고 있기 때문에 보는 사람들도 긴장시킨다. 그래서 편치가 않다. <월정리 철길>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시적인 울림이 <과일 채집>에서 되살아나고 있어서 반갑다.
곰곰이 짚어보면 우리 미술 풍토에서 한운성만큼 조형성과 메시지가 평평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한 몸을 이룬 작가를 찾기 어렵다. 한운성만큼 화면 위에 탄탄한 드라마를 펼칠 줄 아는 작가도 흔치 않다. 그런 만큼 한운성이 펼쳐나가는 작품세계에 거는 기대 또한 크다.
2002년 7월, 캘리포니아 밸리에서
장 소 현 | 미술평론가ㆍ극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