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백자 문방구
– 쓰임과 품격의 만남
朝鮮後期의 白姿文房具
尹龍二 (圓光大博物館長, 美術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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現存는 白姿文房具의 대부분은 朝鮮後期 社會의 産物이었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으로 시작된 조선후기 사회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 朝鮮 士大夫들이 이루었던 모든 것들이 전쟁을 통해 사라져 갔다. 더욱 그들을 당혹시켰던 것은 淸의 등장이었다. 淸은 오랑캐로 불리던 女眞族이 세운 나라였고, 여진족은 이전까지 우리나라를 부모의 나라로 모셨었다. 그 당시 조선 사대부들에게 영향을 미친 儒學의 가르침의 宗主國은 中國이었는데 이 중국의 주인이 하루 아침에 오랑캐로 바뀌어 버린 것이다. 후에 老論 세력을 형성한 우암 宋時烈을 비롯한 西人들에게 있어서는 중국이 죽어버린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어디에 목표를 두어야 하는가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 그들이 발견한 것은 「조선이 중국이다」라는 것이었다. 결국 중국은 사라졌고 우리가 중국이며 우리 자체 내에 진리가 있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18세기의 조선회화 특히 겸제 정선(鄭敾)이 추구하였던 바도 금강산이라는 眞景山水 즉 조선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통해서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이 우리 내부에 있다는 것을 밝히는 작업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우리 자체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뿌리를 찾는 實學도 우리 것에 대한 새로운 관심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한국적이라고 하는 세계의 뿌리는 이러한 자기 자신에 대한 재발견에서 시작된 것이었다.
조선후기는 경제의 발전이 이루어졌으며 실학의 발전이 두드러졌던 시기였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조선시대 白姿에 있어서 고전적인 乳白色의 白姿와 간결한 靑畵白姿가 제작되었으며 18세기 제작의 중심이 廣州의 金沙里와 分院里의 가마였다.
특히 金沙里 가마에서는 유백색의 백자를 바탕으로 풍만하게 이루어진 둥근 항아리를 비롯한 다양한 항아리들과 굽이 높아진 각종 祭器, 면을 다듬은 병과 호 그리고 靑畵로 간결하게 시문된 秋草紋이라 불리는 야생의 풀들이 시문된 靑畵白姿등의 제작이 이루어 졌다.
分院里 가마에서는 초기부터 청화백자가 활발히 제작되어 다양한 무늬의 器皿이 제작된다. 항아리의 경우 어깨부분과 底部에 加意頭紋帶나 造辯紋 등이 장식되기 시작하였고 무늬의 주제도 山水, 梅鳥, 人物 등의 회화적인 것이 보이며 角, 角, 각접시 등의 器皿이 더욱 활발하게 만들어 졌고 筆筒, 硯滴 등의 支房具類와 祭器類의 제작이 출발해진다.
19세기의 백자는 광주 분원리 가마에서 더욱 활발히 제작되었고 특히 청화백자를 중심으로 음각백자, 양각백자. 투각백자, 상형백자가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수많은 象形의 硯滴과 筆筒, 祭器와 生活器皿들이 제작되어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준 白瓷의 전성기였다.
紋樣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十長生의 사슴과 不老草, 雲鶴과 거북, 소나무와 바위, 해와 달의 모습, 雲龍의 힘찬 필치. 雲鳳의 활달한 모습. 分院 앞 한강 그 앞의 三山을 보여주는 山水紋의 정취가 맑고 청초한 靑白色의 白瓷釉色과 함께 어울려 더욱 정취 길은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준다.
또한 전국에서는 백성들의 생활용의 그릇들을 제작하는 沙器店이 전국 곳곳에 설치되어 활발한 제작활동을 이루어 갔다. 주로 사발, 대접, 접시등의 그릇들과 술병, 단지 그리고 제기류와 문방구류들이 투박하면서 견실하게 제작되어 일반인들의 생활에 긴요하게 쓰여졌다.
이러한 조선 후기의 白瓷의 모습은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걸친 격동기를 거치면서 分院의 민영화와 그 후원자이던 조선 왕실의 몰락 그리고 일본 근대자기의 물밀듯한 침투와 상품시장화로 급기야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으로 식민지 국가로 전락되어 끝내는 조선백자의 단절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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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房具란 支房에 갖추어 두고 사용하는 器物을 뜻한다. 文房은 文士의 房 즉 선비의 방을 의미하며 흔히 사랑방(舍廓房)이나 서제를 지칭한다.
丈房具로는 종이(紙), 붓(筆), 먹(墨), 벼루(硯)등의 필기구가 기본적이며, 종이를 담는 紙筒과 붓을 꽂는 筆筒과, 筆架 그리고 먹을 담는 墨壺와 먹을 놓는 墨床 그리고 벼루와 벼루에 물을 따르는 硯滴등이 있다.
文房인 선비의 방은 주인의 거실이자 서재였으며 응접실도 겸하였다. 문방은 주인인 선비의 취향에 알맞게 꾸며졌다. 대체로 청빈 검소함을 생활이념으로 하는 선비의 곧고 맑은 정신은 방에 갖추는 문방구에도 그대로 나타나 번잡한 장식이나 과다한 배열을 하지 않았다. 주인의 자리인 아랫목에는 보료를 깔고 그 앞에는 경상이나 서안과 함께 연상을 두었다. 주인의 좌우편 벽면에 문갑을 붙여 놓고 그 위에 필통, 지통, 연적 등을 얹었다. 사방탁자나 책장 등 가구들도 벽면에 붙여 놓아 좁은 방을 넓게 쓰도록 배려하였으며 붓걸이와 고비는 벽에 걸었다. 이밖에 촛대나 향을 피우기 위한 향꽂이와 향상 및 끽연구 등을 구비하였으며, 주인의 취향에 따라 수석과 난등 완상품과 거문고, 퉁소 등을 갖추기도 하였다.
이러한 支房은 조선시대 초기의 선비(사대부)들부터 필수적으로 갖추고 있었으나 18세기의 영, 정조대에 주택양식의 세련과 문예부흥의 기운에 따라 발달하였으며 19세기에 들어 일반에 까지 널리 유행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는 현존하는 대부분의 文房具들이 조선후기의 18, 19세기의 작품들로 뒷받침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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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 後期의 白姿文房具들로 다양한 기법과 형태의 硯滴들과 筆筒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紙筒과 筆架, 筆洗, 硯 그리고 墨壺와 豊床 등이 함께 제작되어 남아 있다.
白瓷硯滴은 현존하는 白瓷支房具 중에 가장 많은 형태로 남아있다. 이미 12세기 고려청자 중에 오리, 복숭아, 거북, 원숭이형의 연적으로 남아 있으며, 조선초기에 들어와 寶珠으로 만들어진 粉靑瓷印花紋硯滴과 粉靑瓷鐵畵草紋硯適 등이 있고, 白瓷靑畵梅花紋硯滴과 白瓷靑畵雲龍紋硯滴 등이 있어 15~16세기에도 白瓷연적이 만들어 졌으며 寶珠形을 이루고 있는 점이 공통적인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寶珠형은 17세기까지도 그대로 이어져 白瓷鐵書草紋硯滴 등에도 나타나나, 18세기에 들어 四角, 八角, 원형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기 시작한다. 특히 18세기 후반이후 깔끔하고 청초한 白瓷硯滴과 靑畵白瓷 연적들이 다양하게 제작되어 남아 있다. 이번 전시에 보이는 白瓷靑畵梅竹紋四角硯滴과 白瓷靑畵秋草紋四角硯適, 白瓷靑畵山水紋八角硯滴, 白瓷靑畵梅花紋八角硯滴 등의 뛰어난 작품들이 남아 있으며, 18세기말에서 19세기 전반전에 만들어진 다양한 형태의 象形硯適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개구리, 두꺼비, 해태, 토끼, 잉어, 복숭아, 금강산, 무릎, 사각, 팔각, 두부, 생황등의 다양하고 아름다운 형태의 뛰어난 연적들이 만들어져 남아 있어, 연적의 놀라운 발전을 이룬 시기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이들 연적은 각종 형태를 본떴지만, 顔料를 다채롭게 사용하여 장식하고 있으며, 음각, 양각, 투각의 기법을 유감없이 발취하여 보는 이들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하고 있으며, 詩文을 나타내거나 기호를 나타낸 예도 있다. 이러한 연적의 제작은 19세기후반까지 이어졌으며, 사각 부채꼴 외에 천도복숭아, 금강산, 잉어, 해태, 감모양의 환상적인 연적이 만들어지나, 안료를 칠하여 채색을 한 것이 많아진다.
조선후기 사회의 양반층의 확대에 따른 양반 노릇의 하나로 오랫동안 가지고 싶었던 문방구 중의 연적은 가장 사랑 받았던 것으로 사회적 요구의 확대에 따라 다양한 형태로 활발하게 제작되었던 것으로 뛰어난 작품의 예가 많이 남아 있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도 백자연적류가 단연 가장 많은 수량을 차지 하고 있다.
붓을 꽂는 白瓷筆筒은 圓筒形, 四角形, 八角形으로 제작되었으며 크고 작은 것으로 이루어졌다. 그 중 가장 많은 것이 圓筒形이며, 外面에 陰刻이나 陽刻, 透刻의 方法과 靑畵, 鐵書의 안료로 그린 것 등이 남아 있다. 원래 이러한 白瓷筆筒은 조선초기와 중기에는 대나무 필통으로 사용하였는지 남아있는 예가 없으며, 현존하는 것은 대부분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에 걸쳐 제작된 작품들이다. 특히 陽刻과 透刻의 方法으로 장식된 筆筒 중에는 이번 전시에 보이는 白瓷透刻十字形筆筒 그리고 白瓷靑書蘭草紋筆筒, 白瓷透刻雲龍紋筆筒의 뛰어난 작품들이 남아 있다. 이외에도 陽刻의 松虎紋과 梅竹紋이 시문된 筆筒과 透刻의 蓮花紋 松鶴紋, 蓮環紋, 葡萄紋, 十字紋 등이 시문된 뛰어난 작품들의 예가 남아있다. 이러한 작품들 중에는 18세기말 19세기의 分院白瓷의 특색인 靑白色 白瓷의 깔끔하고 청초한 작품의 예가 많은 것이 특징이다.
白瓷紙筒은 四角이나 八角, 圓形으로 윗부분이 넓게 벌어진 것이 특징으로 외면에 靑畵로 梅竹紋이나 草花紋 그리고 陽刻의 長生紋 등을 시문한 예가 남아있다. 대체로 18세기후반에서 19세기에 걸쳐 제작된 것으로 白瓷筆筒과 같이 조선 후기에 주로 제작되었으며, 대나무지통과 함께 쓰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남아 있는 작품이 드물다.
白瓷筆架로는 五山形의 筆架들로 靑畵로 山紋이나 陰刻의 山水紋을 새겨 나타낸 예들이며, 銅料로 전부 칠하거나 鐵料로 칠한 예들도 드물게 남아있다. 대부분 19세기 分院의 작품들로 추정되며, 五山, 七山形을 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白瓷筆洗로는 넓은 圓形의 筆洗가 일반적이나, 접시모양의 필세와 四角形, 圓形모양인 필세가 드물게 남아있다. 19세기 分院白瓷들도 靑白色의 갓맑은 白瓷로 제작된 것이나, 드물게 靑畵로 梅竹紋을 나타내거나, 靑料, 銅料로 칠해 나타낸 예도 있다.
白瓷墨壺로는 은행알처럼 옆으로 벌어진 小壺形과 四角形에 뚜껑이 있는 것들로 먹물를 뜨도록 숫가락 모양의 작은 銅器가 함께 있는 예가 있다. 外面에는 순백으로 남겨둔 것과 靑畵로 八卦紋 雲龍紋을 그리거나, 靑彩를 한것 또는 도롱용을 부착시킨 것도 있다. 모두 19세기 전반경 分院白瓷에서 제작된 것들로 깔끔한 것이 특징이다.
이외에도 長方形의 白瓷벼루들과 먹을 놓는 黑床, 香꽂이, 촛대 등이 文房具의 하나로 제작되어 남아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白瓷文房具로는 白瓷硯滴과 筆筒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紙筒, 筆架, 筆洗, 墨壺, 硯, 墨床등이 다양한 형태에 다채로운 채색으로 장식되어 깔끔하고 청초한 작품으로 남아 있어 조선후기 백자문방구의 세계를 빛내고 있다.
<參考支獻>
1. 尹龍二 「韓國陶磁史硏究」 支藝出版社, 1993
2. 國立中央博物館, 「朝鮮時代 支房諸具」, 통천문화사, 1992
3. 肥塚良三, 「李朝의 文房具」 大阪市立東洋陶磁美術館, 1994
4. 美敬淑, 「韓國陶磁史」 一志社, 198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