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Yeon-Gyu
화면 구조 와 색 – 변화의 두 측면
윤진섭 / 미술평론가·호남대교수
내게 있어서 김연규하면 떠오르는 것은 자연의 이미지다. 풀, 꽃, 씨앗, 덩굴, 열매 등등이 주된 내용을 이룬다. 그의 그림은 그래서 자연과 불가분의 관계가 있으며, 이것은 그의 작품의 소재이면서 동시에 주제가 된다. 소재인 동시에 주제가 된다는 나의 말이 어떤 사람에게는 매우 이상하게 들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현대회화의 긴 역사를 생각해 볼 때, 이 말은 전혀 어색하지 않다. 구상회화에서 추상회화로 넘어가는 긴 도정의 역사에서 처음에는 분명했던 사물의 이미지들이 해체되면서 단순한 색채 그 자체나 면의 구획, 혹은 몇 가닥의 선으로 환원되는 평면화의 과정을 밟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볼 때, 김연규는 이 추상화의 과정을 매우 빠른 속도로, 그러나 단계적으로 착실하게 밟아온 작가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자연의 관찰에 기인하고 있으며, 그런 까닭에 그의 작품은 대개의 경우 관객에게 자연을 환기시킨다. 자연을 환기시키되 그의 작품은 자연 대상이 지닌 형태 자체의 묘사에 목적이 있지 않고, 자연 대상을 연상시키는 이미지와 이미지 사이에 가로놓인 상상적 공간의 제시에 그 목적이 있는 것처럼 보인다. 상상적 공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결국 관객의 몫으로써, 관객이 느끼고 애써 찾아가야 할 공간이 아닌가. 바로 여기에 현대 추상회화가 미적 체험에 기여한 공로가 있으며, 상사(相似)를 기본원리로 하는 구상회화의 딜레마를 해소한 의의가 있는 것이다.
김연규가 레디메이드로서의 꽃을 화면에 부착하지 않고 직접 만들어 붙인 것은 이러한 문맥에서 파악할 때 매우 자연스러운 행위로 보인다. 가령, 레이메이드로서의 꽃은 그것이 비록 인공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자연의 꽃과 똑같이 닮았다는 의미에서의 상사(相似)인 반면, 김연규의 꽃은 이와는 다른 맥락에서 단지 꽃에 대한 연상적 범위 이상을 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이 상징이나 우의(寓意)로 읽힐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다.
김연규의 그림은 많은 상징들로 이루어져 있다. 구석기시대 동굴벽화를 연상시키는 <나를 찾아서>(1993) 연작에서부터 비교적 근작인 (2004)에 이르기까지 그의 화면에는 관습적으로 뭔가를 연상시키는 이미지들이 비행물체처럼 공간을 부유하고 있다. 그의 작품에서는 축축한 습기가 느껴지는가 하면 뽀송뽀송하고 건조한 느낌이 동시에 우러나오기도 한다. 이 상반성(上反性)이야말로 김연규의 작품이 지닌 매력인 것이다. 그것은 암컷과 수컷, 음과 양으로 대별되는 세계의 근원적 구조에 대한 탁월한 비유이자, 상징이기도 하다. 음을 상징하는 수성물감과 양을 상징하는 지방(밀랍)의 혼용, 마치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상극의 재료를 사용하여 볼만한 시각적 파노라마를 연출하는 그의 예술적 재능은 매우 뛰어나 보인다. 그것은 우선 재료에 대한 감각에서부터 오는 것 같다. 관심이 가는 재료에 대한 끊임없는 연구와 실험이 화면에 담긴 소재와 결합하면서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듯 캔버스 위를 누비게 되는 것이다. 손에 익은 재료에 대한 감각은 선이 어디에서 멈추어야 할지, 밀랍으로 만든 오브제는 어느 장소에 부착해야 할지를 감각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그것은 계산에 의한 것이라기보다는, 특히 김연규의 작업과 같은 스타일에서는 거의 감각적인 수준에서 이루어진다. 그의 작업이 논리나 계산에 의존하기보다는 직관에 크게 기대고 있다는 설명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일 것이다.
김연규의 작업이 때로는 물안개처럼 모호하고 중성적으로 보이는 이유도 따지고 보면 직관과 감각에 의존하는 그의 작업태도에 기인한다. 대개 물성과, 그런 물성이 야기하는 질감에 의존하는 작품의 경우 중층적으로 재료의 층위를 쌓아 가는 기법을 사용하고 있는데, 그 행위의 멈춤이란 것이 딱히 예정되어 있다기보다는 적당한 선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선이란 것이 작가가 마음에 드는 순간임은 물론이다.
이번에 발표할 근작을 통해 김연규는 수성물감 작업과 밀랍 작업의 병치를 보다 극명하게 보여주려는 계획을 실행에 옮기고 있어 주목된다. 십자형 나사를 상하좌우로 일정하게 배열하여 밀납으로 떠낸 캐스팅 작품을 수성의 캔버스 좌우에 부착하는 작품들이 바로 그것이다. 이러한 방식의 작품은 캐스팅 자체도 까다롭거니와 번거로운 공정이 전제되기 때문에 흔히 기피돼 왔다. 매우 정교한 마감질의 과정이 필요하고 또한 많은 시간과 정성이 요구되기 때문이다. 그는 오랜 기간 동안 밀랍성형에 대한 그 나름대로의 노하우를 터득해 왔는데, 이번 전시회를 계기로 돌가루에 대한 그 동안의 관심으로부터 벗어나 밀랍에 대한 보다 다각적인 표현을 시도하는 것으로 읽혀진다. 그 일차적인 관심은 우선 밀랍을 통한 오브제의 즉물적 표현에 두어지고 있다. 캐스팅이란 것이 본(本)이 지닌 형태적 재현에 일차적 목적이 있다고 한다면, 그가 이 방법을 사용한 것 자체가 직관과 감각에 의존해 온 이제까지의 방법론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램을 말해주는 것이 아닌가. 이것은 그에게 찾아온 하나의 변화임에 분명하다.
그와 동시에 김연규는 연한 파스텔 톤의 밀랍성형 시리즈를 선보일 계획으로 있다. 그것은 색상의 계조(gradation)에 바탕을 둔 것으로 일종의 색채에 대한 실험이 될 것이다. 김연규의 작품에서 색은 특히 밀랍성형 작품의 경우, 특유의 은은한 미색 톤으로 거의 통일이 되다시피 했는데, 이번 연작을 계기로 색의 계조가 가져다 주는 변주의 측면을 보여주게 될 것이다. 밀랍이란 특정한 재료를 매개로 물성적 측면을 보여주는 동시에 색이라는, 회화의 본질을 이루는 한 요소에 대한 실험을 제시하게 될 이번 개인전이야말로 변화의 전환점이 될 줄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