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 YikYung
한국백자와 金益寧의 작품
윤용이 | 원광대 교수, 도자사
Ⅰ
백자는 고령토란 순도 높은 백토로 그릇을 빚은 다음 투명한 장석유의 유약을 입혀 1300℃의 고온에서 구운 자기로서 인류가 만든 위대한 창조물의 하나이다.
한국에 있어, 백자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1세기 초로서 1000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처음에는 용인의 가마에서 제작되었으며, 12~13세기에는 부안의 가마에서 청자와 함께 같은 형태로서 제작되었다. 14세기말에서 15세기전반에 걸쳐, 새로운 조선백자가 만들어 졌으며, 상감백자의 예가 남아있다. 15세기 후반 성종년간에 사옹원의 분원에서 양질의 백자와 청화백자가 제작되었으며, 16세기에 들어 순백의 뛰어난 백자들이 광주의 도마리, 우산리요에서 제작된다. 17세기에는 회백색의 백자와 철화백자가 특색있게 제작되었고, 18세기에 들어 설백색의 고전적인 금사리요의 백자가 만들어져 조선백자의 완성을 이룬다. 설백색의 백자를 바탕으로 풍만하게 이루어진 둥근 달항아리를 비롯한 다양한 항아리와 굽이 높아진 각종제기(祭器), 각(角)과 면(面)을 다듬은 호와 병, 청화(靑畵)로 간결하게 매화, 대나무, 패랭이, 난초, 국화 들이 시문된 병, 사발, 호, 접시 들이 만들어 졌다.
19세기에는 청백색의 분원리요 특유의 유색으로 맑고 청초한 청백색의 백자가 음각, 양각, 투각, 상형의 뛰어난 순백자로 다양하게 제작되었다. 필통, 연적 등의 문방구류, 제기접시의 방형(方形)과 원형의 크고 작은 모습, 합, 유병, 술병, 술잔, 접시 등의 생활용기가 다양한 형태로 제작, 사용되어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준 백자의 전성기였다.
청화백자의 문양에 있어서도 한국적인 세계를 보여주는 십장생의 사슴과 불로초, 운학과 거북, 소나무와 바위, 해와 달의 멋들어진 모습과 운룡(雲龍)의 힘찬 필치, 분원 앞 한강, 그 앞의 삼산(三山)을 보여주는 산수문양의 정취 그리고 연화, 잉어, 모란문 등의 간결하고 활달한 모습이 다양한 기형과 잘 어울린다.
이처럼 19세기 백자는 분원리가마 특유의 청초한 청백색의 백자제작을 바탕으로 조선적인 정취어린 세계를 보여주는 데 큰 공헌을 하였다. 특히 병이나 호의 각과 면을 다듬은 독특한 방법과 단순하면서도 실용적인 감각의 제기들, 그리고 환상적일 정도의 다양한 상형의 각종 연적들과 필통들의 제작 그리고 산수, 초화(草花), 장생(長生)등의 서정적인 문양을 나타낸 조선백자 사기장들의 솜씨가 깃들어 있다.
이러한 조선백자의 모습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걸친 격동기를 거치면서 분원의 민영화와 그 후원자이던 조선왕실의 몰락 그리고 일본 근대자기의 물밀듯한 침투와 상품시장화로 급기야는 일본 제국주의와 침략으로 식민지 국가로 전략되어 가뜩이나 현상태의 유지에 급급하던 조선백자 제작에 큰 충격을 가져와 끝에는 전통의 단절이라는 위기의 모습을 보여준다.
Ⅱ
金益寧의 백자작품은 이러한 1000여 년 간에 걸친 한국백자의 전개과정에서 보면, 20시게 후반의 백자작품을 대표하는 것으로 기형(器形)과 유색(釉色), 제작기법에서 일관성을 발견할 수 있다.
20세기 후반은 전통의 단절이 있었던 20세기 전반의 도자를 전통의 회복과정에서 재현으로 나타나, 수많은 작가들이 옛 것을 그대로 그 나름대로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기는 한 것이 하나, 충분치 않은 것 이다.
김익령은 1960년대부터 40여 년 간에 걸쳐 조선백자의 전통에 바탕을 둔 현대 한국백자를 창조하고자 온 힘을 기울여 온 점에 있어서, 여타의 도자기 작가들과는 다른 길을 걸어왔다고 생각된다. 그는 처음부터 조선도자의 본질 자체를 이해하고 파악하고자 노력해왔다. 미국 뉴욕주립 알프레드 요업대학원을 수학한 뒤에 곧 귀국하여 국립박물관에서 3년간 당시 발굴 조사된 전남 광주 충효동 무등산록의 수많은 작품을 통해서 파악하고자 노력하였다. 많은 도자기 작가들이 이러한 이해 없이 조선도자의 재현에만 온 힘을 쏟고 있는 동안, 그는 그가 파악한 조선도자의 본질을 바탕으로 그의 작품을 새롭게 만들어간다.
그의 초기에 백자작품들이 광주 충효동에서 보아온, 조선 초기의 제기(祭器)인 오곡을 담아 제사지내는 보나 궤의 형태를 간략화하고 단순한 면처리로 바꾸고 있음을 본다. 그후에도 계속 제작한 불감(佛龕)이나 반합(飯盒)을 기본으로하여, 크고, 작게, 비례를 재구성한다. 면을 치기도 하고, 방형(方形)으로 만들기도 한다. 뚜껑의 손잡이를 붙이기도 하고 굽을 높게, 낮게 만들어 새로운 느낌을 주게 한다. 예리한 각선(角線)과 대담한 면(面) 처리를 ㅌㅇ하여 단순함과 엄숙한 분위기를 나타나게 한다. 방형(方形)과 원형의 제기를 재구성하거나, 보, 궤의 제기를 과반형태로 단순하게 만들기도 한다. 보의 제기를 물확처럼 만들어, 큼직함에서 오는 큰 맛을 느끼게 해준다. 특히 조선후기의 백자나 석간주호에서 보이는 면을 깎고, 다시 감을 깎듯 손질을 가하는 기법이 그의 작품에서는 자연스럽게 면처리에 널리 응용되는 것을 보기도 한다.
그는 오리형 용기에서 보이듯 목기의 오리에서 보이는 면을 응용하여, 단순하면서도 깔끔한 새로운 백자오리를 만들어 낸다. 조선후기에 널리 만들어진 사각, 팔각의 연적들, 각병, 정감어린 연환문이 투각된 필통들, 반상기, 찻잔, 각접시, 원형접시, 벼루 등 오늘의 생활에도 널리 쓰일 수많은 생활용기들을 전통의 바탕 위에서 재창조 하고 있다. 그의 백자의 작품들은 그가 조선백자의 전통 위에서 새롭게 창조한 형태에 그의 특색이 더욱 나타난다. 각과 면을 통해 단순하고, 따라서 더욱 기품있게 보이는 작품들이다.
수많은 도자기 작가들이 까다롭고 다루기 힘든 백자를 떠나 분청자의 제작에 주로 매달려 있을때도, 그는 어려운 백자를 주로 하는 작품에 몰두해 왔음을 본다. 더 나은 유색의 백자 유약과 태토를 찾아 끊임없는 실험을 해 왔으며, 전통에 바탕을 둔 새로운 기형을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해왔던 것이 지난 40여년의 작품과정이었다고 생각된다. 그의 백자작품은 용기(用器)로서뿐만 아니라, 감상용으로도 잘 어울려 현대 우리들의 생활속에서도 잘 쓰이고 있다. 단순함이 갖는 멋과 힘이 그의 작품 속에 그대로 나타나 있다. 20세기 후반기의 40여년간에 걸친 그의 작품들은 조선백자의 오랜 전통 위에서 그대로 이어져 이시기를 대표하는 작품으로서의 성격을 지니고 있으며, 바로 이점이 우리가 김익영의 작품에 주목해야 할 점이라고 생각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