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명진
Green Home
세계의 이면, 바깥으로의 트임
이선영(미술평론가)
[풍경의 표면](2005) 전을 비롯하여, 송명진의 그림에서 알아볼 수 있는 구체적 모티브로 교각, 풀숲 등이 있다. 재현적인 요소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실주의와는 무관한 그림 속 모티브가 필자도 알고 있는 익숙한 장소와 관련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된 후, 그림을 이해하기 위한 실마리로 그 장소를 겹쳐서 보았다. 서대문구, 마포구 등을 거치며 한강에 이르는 홍제천은 요즘 청계천처럼 ‘자연형 하천’으로 복구시킨다고 공사가 한창이다. 비가 오지 않을 때는 건천(乾川)으로 교각의 받침대인 거대한 콘크리트 판과 거친 자갈들, 그 사이사이로 드문드문 자란 잡초들이 볼썽사나운 곳이다. 그나마 요즘은 자전거 및 운동코스로 개발이 된 상태지만, 몇십년 전만 해도 홍수 때 오물이나 돼지가 떠내려 오던 대형 하수도였고, 그 주변으로 도시 빈민들이 몰려 살았다. 물론 공해가 없던 몇백년 전에는 생명의 젖줄이었던 곳일 터이다.
젖줄에서 대형 하수도로, 건천으로, 개발을 다시 개발하려는 시대에 돌입했다. 물이 흐르지 않는 건천 위로는 여러 갈래로 뻗은 교각들이 있고 하천을 가로지르는 수많은 다리들, 얼마 전에 경의선 공사구간으로 폭삭 내려앉은 철도까지 몇 갈래 걸쳐있으면서, 도심 한가운데 산업시대의 풍경이 남아있는 꽤나 야성적인 구간이 곳곳에 존재한다. 작가는 나름 운치 있는 뚝방길의 가로수가 아니라, 드러난 하천 바닥에 드문드문 펼쳐진 척박한 장소에 주목한다. 온통 초록인 송명진의 그림과는 달리, 이곳의 식물은 땅 속에 깊이 뿌리 내릴 수 없다. 비라도 한번 크게 오는 날에는 모두 휩쓸려 내려가기 때문에, 식물은 우기와 우기 사이에 급격히 번성했다가 사라지는 일회성 군락을 이룬다. 그 장소는 현재 자연이 처해있는 모든 상황을 압축한다.
새마을 운동 식으로 어느 한날 쭉 심어놓은 듯한 가로수하며, 계절별로 줄지어 갈아 심어지는 화초들, 몰래 일구어 놓은 개인 경작지, 그리고 오랜 세월로 균열이 간 뚝방 틈사이로 자라난 풀숲에 이르기까지, 그곳을 덮고 있는 식물들은 송명진의 그림에 잘 나오는 네모진 잔디판처럼 깊이와 고유의 질이 제거된 자연이다. 이러한 자연에 대한 인식에 회화적 공간과 환영 간의 공방전이 가세한다. 작가의 작업 지반은 도심의 버려진 바닥부터 회화의 바탕까지 이른다. 바탕을 살짝 덮은 초록 융단같은 시뮬라크르로서의 자연은 암울하고 풍자적인 요소가 암시되어 있을 때조차도 기이한 아름다움으로 남아있다. 그곳은 선개발로 인해 난개발이 이루어지지 않은 곳이며, 전에는 주변부였기에 이제는 오히려 도심의 공백과 숨통을 틔워주는 곳이 되었다.
서두가 길었지만, 2000년대 중반 송명진 회화의 단초가 되었던 곳은 이처럼 원초적인 자연이라기보다는, 시뮬라크르에 가깝다. 그 위를 뒤덮는 녹색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림에 등장하는 몇 안되는 색이 모두 녹색 언저리에 있는 색이다. 간혹 등장하는 붉은 색은 색상환에서 녹색의 보색이며, 갈색 역시 자연의 관점에서 볼 때 녹색이 바랜 색이다. 화이트는 색이라기보다는 공백이나 공간으로, 자연 및 심리적인 색과 상호작용하면서 또다른 차원을 만들어 내는 요소이다. 작가는 자연이 가지는 두툼하고 밀도 높은 초록에 비해 정작 색이름–opaque oxide of chromium–은 무척 인공적이라고 말한다. 2004-5년의 작품에는 색소 이름을 제목으로 삼은 작품들도 꽤 있다. M. 브룬스는 자신의 색채론에서 초록 잎새나 풀들은 만족할만한 녹색을 내지 않는다고 지적한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함유하는 엽록소는 항상 다른 요소들을 동반하기 때문이다. 초록톤을 보다 강렬하고 지속력있게 만들기 위해서 식물성 염료에 비유기적 염료를 부가해야 한다. 생명의 초록이 독약 초록으로 변하는 것이다. 브룬스는 이러한 초록의 속성이 자연의 무질서한 번식력, 즉 생장의 광기로 생명을 가차없이 다시 목조르는 정글, 즉 초록지옥이 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태모처럼 태연히 낳고, 낳은 것을 삼키는 존재와도 같다. 송명진의 ‘초록 자연’에도 이러한 양면성이 내재해 있다. 현대미술이 재현과 멀어지면서 초록은 지루함과 진부함의 색채로 치부되기도 하였지만, 사실 그 색 만큼 눈을 평화롭게 해주는 색도 없다. 색 스펙트럼에서 중앙을 차지하는 초록은 ‘더 이상 나가기를 원하지도 않으며 더 이상 나갈 수도 없다’(괴테). 그러나 지루하고 수동적인 색이 송명진의 작품에서 꿈틀거린다. 초록은 단순히 자연의 인상을 운반해 주는 것이 아니라, 촉수를 가진 동물이나 잠재 에너지로 가득한 광물같은 양상으로 변모하기 때문이다. [Gardening](2006)에서 다양한 녹색 계열의 줄기에 상응하는 붉은 색 계열의 단면은 보색의 생동감을 이용한다. 빨강과 초록 그 양극은 유대관계를 이룬다. 거기에는 무기물을 유기물로 바꾸는 광합성과 붉은 혈액의 동형성이 발견된다.
시각적인 관습상 초록은 자연으로 간주되지만, 송명진의 작품은 초록 물감으로 발려진 평면일 뿐이다. 그래픽 스타일의 형태 및 색채 처리로 전체적으로는 평면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주로 사용되는 아크릴은 빨리 마르고 붓질이 남지 않으며, 필요 이상의 묘사가 생략되는 매체로 깔끔한 형태 및 색면처리가 용이하다. 이 평면에 최소한의 참조점만을 가진 얇은 환영이 드리워져 있다. 그러나 그 환영도 곳곳에서 벗겨진다. 화면에는 환영과 평면이라는 두가지 층위가 존재한다. 또 하나의 요소는 작품 속의 화이트이다. 그것은 노출된 캔버스의 느낌을 주면서 공백과 평면성을 암시한다. 평면성은 회화가 어쩔 수 없이 가지는 공시적 구조, 즉 시간성의 억제를 드러낸다. 어떤 상황을 한순간에 고정시킴으로서 모호한 기념비적 풍경을 만든 첫 개인전 [순간-멈춤](2001)이 이러한 회화적 자의식에 충실했던 전시였다.
그러나 평면으로의 진화는 미술사에서 이미 답이 나와 있기 때문에, 더 이상 화가가 답습할 필요는 없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현대회화에서 감각을 순수 시각적 평면성의 승화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지적한다. 그들이 제시하는 대안은 뒤덮을 것이 아니라, 끌어올리고 모으고 쌓고 가로지르고 일으키고 접어야 한다는 것이다. 송명진 역시 하나로 쏠리는 환원주의가 아니라, 경계에서의 게임을 즐긴다. 초록이 스펙트럼의 중간에서 어떤 역할을 하듯이, 평범한 풍경의 또다른 면이 들추어지듯이, 어떤 결론이 나온 상태를 공유하기 보다는 그 이면의 내밀함을 음미하고자 한다. 가령 송명진의 그림은 풍경 자체가 아니라, 풍경에 편입되는 디테일과 디테일들 간의 관계가 중요하다. 단촐한 몇가지 풍경의 디테일이 변주되면서 팽창하고, 화면은 틀을 넘어 시원하게 뚫리는 느낌을 준다.
작품의 주요 모티브이기도 한 잔디판처럼, 네모난 녹색 판은 일종의 그리드가 되어 흰색 공백 위에 얹혀져 배열된다. 예를 들어 [Two fields](2005)나 [휙-](2003)같은 작품은 단순한 들판과는 다른 시야를 열어준다. 그것은 움직이지 않는 관객으로 하여금 풀밭을 넘어 다른 공간으로 이동시킨다. 풍경의 세부사항이 생략된, 단순화된 인상의 집적은 한없이 펼쳐진 세계로 연결된다. 그것은 황홀하면서도 동시에 불안한 느낌을 준다. 흰 공백은 캔버스 틀을 넘어서 밖으로 트인다. 자연의 기본 샘플같기도 한 녹색 판들은 허공 위에 떠있는 것 같기도 한데, 그것은 애초에 나눌 수 없는 것을 나누려는 불가능한 시도이다. 미셀 세르가 [헤르메스]에서 말하듯이, 현실의 덤불은 이제 격자를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송명진의 몽글몽글한 풍경은 구름을 닮았다. 세르는 구름의 모델이 하나의 중심, 어떤 정적인 집합을 완전히 에워싸는 연쇄가 아니라, 분산과 관련된다고 지적한다.
여기에서 사물은 직선의 연속 또는 그물처럼 짜인 평면 속으로 끌어들이지 않고 다수, 군집, 구름으로 다루어진다. 공백으로 길이 나있는 송명진의 들판은 백색 황야, 일종의 미로이다. 가능한 모든 것이 열린 곳, 그러나 방향이 없는 공간, 우연에 의해 정해지는 방향성은 두려움과 자유를 준다. 공백, 이 준거 없는 공간은 카오스이다. 엄밀한 규칙을 따르는 듯한 송명진의 기이한 카오스의 세계chaosmos가 현대회화와 관련하여 강조하는 바는 무엇인가. 들뢰즈와 가타리는 [철학이란 무엇인가]에서 화폭은 이미 사전에 설정된 기존의 구태의연함 들로 너무도 빼곡히 뒤덮여 있어서, 우선은 지우고 청산하고 눌러서 두께를 줄이고, 심지어는 조각조각 해체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야만 비로소 우리에게 비전을 가져다 줄 카오스로부터 솟아나는 한줄기 공기를 흐르게 할 수 있을 것이다.
2007년도에 공개된 작품들은 조형적 실험에 내러티브가 보강된다. 여기에서 나오는 주요 모티브는 기존의 요소들 외에 집, 건물, 캐릭터 등이다. 그러나 이들 역시 3차원 공간상의 존재들 같은 확고함을 가지지 못하는 가상의 왕국이다. 방공호, 정원, 제단 등으로 나타나는 구조들은 녹색 판대기로 얼기설기 기워져 있는 세트같은 형태이고, 도시같은 정교한 모습을 갖추었을 때조차도 부조리한 집합들로 채워진다. 작은 캐릭터는 인간의 말단인 손가락이 변형된 형태로, 인간의 퇴행 또는 진화를 암시한다. 손가락 인간은 모든 것을 도구화하고 도구화되는 현대인의 상황을 대변한다. 갈색으로 변모한 풀밭위에 던져지듯 놓여진 개집이나 실로 후려 감은 주거지가 척박해 보인다. 작품 [Green Shelter]는 방공호같이 얽힌 녹색 면이 인공 산을 이루고, [Shelters from nature]는 유사자연으로 연출된 성전에서 손가락 인간들이 그들만의 의식을 치룬다.
[A builder] 시리즈는 대형 하수구와 교각 주변에 자리잡은 고치같은 주거지와 그 안에 또아리를 튼 손가락 인간들로, 화면을 가득 채운 갈색 잡초들이 그 황량함을 배가시킨다. 자연은 축소모델로 보다 정교화 되었지만, 기워진 흔적을 감출 수는 없다. 손가락은 무엇인가를 가리킬 때 사용한다. 과학기술은 이러한 지시관계를 대표하는 분야이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과학의 지시관계가 무한을 포기한다고 지적한다. 과학은 온갖 한계들이나 경계들로 구축된 지시체계의 도식에 사로잡혀 있다. 송명진의 작품에서 손가락 인간을 에워싸는 인공적 환경은 완벽한 효율을 갖춘 이상적인 기계장치처럼 보인다. 가령 [Riverside]는 미로 한가운데 패놉티콘이 존재하는 도시이다. 그러나 이러한 합리성은 매우 비현실적이고 취약하다. 주거지나 근거지, 성지같은 곳은 단단한 지반이 아니라, 유체같은 곳에 떠 있다. 화이트로 나타나는 공백 뿐 아니라, 주거지를 가득 에워싸는 갈색 잡초들이 마치 파도치는 대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손가락 인간들이 질서로 생각하는 세계는 무질서의 바다 위에 떠있는 작은 섬들에 불과하다. 규칙과 이성, 구조와 조직으로 간주된 것은 정돈되지 않은 실제 위에 자리한 일시적 구성체에 불과하다. 여기서도 재현, 즉 균형을 갖춘 조화로운 공간구성은 위기에 처한다. 송명진의 녹색 대지는 어느 곳으로도 이르지 않을 분기점들과 빈 구멍으로 얼룩져 있으며, 현실적인 것을 섬처럼 에워싸는 카오스가 된다. 카오스를 제어하려는 권력은 늘 측정에 의해 질서를 유지해 왔다. 권력은 대지를 기하학적인 형태로 변화시킨다. 그러나 녹색 대지는 ‘평행으로부터의 일탈, 공동의 방향을 잊어버리는 길들, 황야로 진입하자마자 사라지는 바둑판 모양, 수직선이 아니라 예각’(M. 세르)이다. 그것은 모든 측정이 사라지는 또다른 공간의 인정이다. 공간은 균열을 내고 미로와 파국으로 변하며, 단일성 아래에 잠재해 있는 다수의 기이한 공간들이 용출된다. 이 공간에 새로운 신화가 씌여진다. 작가는 마법사처럼 이것과 저것을 끝없이 이어가면서 로고스가 지배하는 기하학을 뒤죽박죽으로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