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부
정의부
2025. 03. 19 – 04. 09
리셉션 2025. 03. 21(금) 16:00
Gallery RHO
정의부의 연구
각기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에게 “연구(research)란 무엇인지” 묻는 말에 다음과 같은 답변들이 흘러나온다.
“인간의 핵심에 가까운 것”
“끝없이 추진하는 것”
“우리가 이미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재구성하는 것”
“답을 제시하기 보다는 질문을 던지는 것”
그 어느 때보다 예술에서도 연구가 강조되는 시대다. 이제는 미술대학에서 연구로서의 예술, 또는 예술을 통한 연구로 학위를 수여하는 사례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창작 과정에서 조사연구를 방법론으로 삼는 작업은 동시대미술 전시에서 ‘필수적으로’ 등장하는 상황이 되었다. 영국 비평가이자 미술사학자 클레어 비숍(Claire Bishop)은 작금의 현상을 두고 “정보 과부하”의 상태로 명명하며, 관객 또한 작가가 제공한 방대한 양의 정보를 훑어보거나 선별적으로 보는 새로운 관람 태도를 취한다고 설명한다. 그리고 묻는다: 연구 기반의 예술이 학술 연구의 한계를 뛰어넘을 방법은 무엇일까?
필자가 정의부 작가의 개인전에 부치는 서문의 시작을 연구에 대한 논의로 시작하는 이유는, 그의 작품을 ‘서정적 풍경화’나 ‘한국적 서양화’, 또는 ‘구상적 추상’ 같은 진부한 범주 안에서 논하는 대신 60여 년에 걸친 그의 작업을 하나의 통합적인 회화적 연구로 상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전시에 포함된 22점의 작품은 소수의 선별된 평면 회화로, 특히 그의 초기작이라고 할 수 있는 1970년대 그림들과 주로 2008년 이후에 완성된 모란 작업을 포함한다. 1940년 경상남도 진주에서 태어나 진주 교육대학원을 졸업하고 한동안 미술 교사로 활동했던 정의부는,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하기 위한 첫걸음으로 30대의 나이에 홍익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회화를 전공했다. 이후 그는 대한민국미전(국전) 심사위원뿐 아니라, 여러 국제 미술교육 관련 활동과 협회 위원 등을 역임하면서 후학 양성과 미술 교육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다.
1964년에 가졌던 첫 개인전을 시작으로 정의부가 본격적으로 활동을 전개했던 1970년대 한국 현대미술계의 풍경은 다원주의적 색채를 지니고 있었다. 당시 국전의 영향력은 점차 쇠퇴해 가고 한국 작가의 국제전 진출이 증가하면서 ‘한국성’ 또는 ‘한국적’인 미술에 대한 움직임과 논의가 대학교와 협회, 그리고 작가그룹 단위의 분파로 나뉘어 활발하게 진행되기 시작했다. 표면적으로 단색화가 가장 강세를 보였지만, 그 이면에 극사실주의, 개념미술, 오브제 및 설치미술, 비디오 아트, 이벤트, 실험영화 등 다양한 경향이 공존하며 양상을 보인 시기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70년대 한국은 표면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을 이루는 듯 보였지만, 내부적으로는 언론 통제와 검열 등 정치적 탄압이 자행되고 있어서 “사회현실을 반영한 실제적인 미술 활동은 미세한 지엽적 현상”에 불과한 시공간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후의 한국 현대미술은 반모더니즘 운동으로 대표되는 민중미술이 이끄는 1980년대를 거쳐 포스트모더니즘과 지역 예술, 비엔날레가 주도했던 1990년대, 미술 제도와 시장이 확장하는 가운데 미디어아트에서부터 사회참여형 실천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매체와 담론이 공존했던 2000년대 순으로 서술되곤 한다. 현재진행형이던 미술은 역사화 되면서 자연스럽게 시대적 구분과 그 시대를 대표하는 움직임, 그리고 작가들로 규범화되기 시작한다. 마치 논리적이고 체계적인 미술의 발전이 존재하는 것처럼 작동하는 미술사는 결국 특정 맥락이나 관점, 이론이나 의제에 부합하지 않는 수많은 시도와 움직임, 작가들의 활동을 빗겨나가기 마련이다. 하지만 역사화 되지 않았다고 해서 잊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급변하는 한국 사회와 현대미술의 풍경 속에서 정의부는 꿋꿋이 채색 유화의 언어와 형태, 구성과 구조의 가능성에 몰두하며 그림을 그렸다. 관찰하는 두 눈은 늘 눈앞에 놓인 자연을 탐구했고, 평면의 정지된 이미지로 표현하기에 앞서 오감으로 자연을 체화하려는 두 발은 세계 곳곳을 걸었다. 회화라는 매체와 자연의 풍경을 연구의 주제이자 대상으로 삼은 그는, 화가나 교육자의 면모만큼 연구자의 자세를 보여준다. 다행스럽게도 우리는 정의부가 생전에 자기 생각과 경험, 건너 들은 이야기를 진지하고도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글, 그 생각의 흔적을 단서 삼아 작가의 연구 방식을 가늠해 볼 수 있다.
“어떤 화가가 2~3일 걸려서 그린 그림을, 파는 데는 2~3년이 걸린다고 불평을 했다. 그러자 누가 답하기를, “당신이 그 그림을 2~3년에 걸려서 열심히 그렸다면, 아마 1~2일 안에 팔렸을 거요”라고 했단다.” –정의부, 「나는 50년을 연구했고」, 『세월을 다듬는 그림들』, 38쪽
생성형 기술로 시각물을 생성하는데 비단 몇 초도 소요되지 않는 오늘날, 소위 말해 ‘가치 있는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만큼 충분한 시간을 투자할 것을 강조하는 이 일화는 일견 시대착오적으로 느껴질 수 있지만, 표면적으로 생성된 결과보다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과정을 체화하는 노력이 연구의 핵심이라는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지금까지 정의부는 낙조, 강, 바다, 산골 마을 등 자연 속을 비상하는 철새들을 추상화해 표현한 작품으로 줄곧 대표되어 왔지만, 그가 주목했던 회화의 요소는 좀 더 구성적이고 근본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예컨대 그는 특정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으로써의 색채 사용을 고민한다:
“흔히 말하기를 동양3국 가운데 중국은 형태요, 일본은 색채고 우리나라는 선이라 한다. 그래서 인지 몰라도 우리나라에서는 선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감각은 대단했으나 색채에서는 이에 대한 연구나 재료에 좀 무시하지 않았나 생각된다 […] 꽃 그림에서 특히 장미 같은 것은 그 색채가 우리에게 주는 환희와 감정의 전달을 가장 중요시하여야 함에도 불구하고 묘사에 치우친다든지, 색채의 혼합에 신경을 쓴 나머지 원색의 강렬함과 호소력이 경시되는 경향이 후학들에게 종종 발견된다.” 정의부, 「색채란!!」, 『鄭義富』, 280쪽
색채에 대한 고민은 캔버스의 평면(plane)이 무한하고도 제한된 공간과 그 안에 자리 잡는 형체에 대한 부분과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캔버스의 텅 빈 화면을 마주했을 때, 눈앞에 마주한 장면과 대상을 어떻게 담아낼지 주저하며 두려워하게 되는 화가의 마음을 솔직하게 기록하며 정의부는 이렇게 고백한다.
“경험이나 그림이 미숙한 사람일수록 공간 공포증에 대한 두려움이 크다. 그래서 화면 배경에도 앞의 주제를 살리기보다 뭔가 열심히 칠해서 빈 공간 없이 빡빡하게 메워야 직성이 풀리는 것이다. 나도 이 공포증에서 벗어나려고 열심히 노력했지만 잘되지 않았다. 그래서 연구한 결과 색채와 형체의 단순화였다.” – 정의부, 「공간 공포증이란!」 『鄭義富』, 292쪽
이번 노화랑 전시의 주축을 이루는 모란 그림들은 그런 의미에서 작가가 회화의 색채와 형태, 공간의 구성을 조금씩 변주하며 연구한 과정의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슷한 장면이지만 미세한 차이를 통해 그는 꽃의 시선에서부터 미소, 수다, 향기, 그리고 조화로움을 포착한다. 무엇인가를 정복하고 그 위에 군림하는 대가(master)의 개념에서 벗어나서 자연과 회화를 수십 년간 연구하고도 자신의 부족함을 돌아보았던 작가의 태도에서 우리는 어쩌면 ‘연구하는 화가’의 새로운 정의를 떠올려 볼 수 있지 않을까.
“내 비록 50여 년간 그림을 그려왔고, 또 세계를 누비면서 그림을 그린다고 하였지만 이 위대한 자연의 모습 앞엔 초라해지는 내 모습을 어쩔 수 없다.” – 정의부, 「금강산!」 『鄭義富』, 119쪽
―임수영 (미술사학자, 독립기획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