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섯가지의 오만
다섯가지의 오만
양만기의 빛(火) · 김연규의 물(水) · 박훈성의 나무(木) · 김찬일의 쇠(金) · 최인선의 대지(土)
“그것은 아름다움이었다. 한없이 아득한 곳에서 아름다움은 빛나는 것, 한없이 아득한 곳에서 인간에게 빛을 보내오는 것, 인식을 멀리하고, 물음을 멀리하여 …아름다움은 악마와 같은 힘으로 모든 것을 수렴한다. “
-헤르만 브로흐의 <베르길리우스의 죽음> 중에서-
<다섯 개의 오만>에 출품한 5명의 작품은 모더니즘에서 출발한다. 이들은 회화, 그 자체를 탐구한다. 재현과 추상, 그리고 평면조건을 새롭게 생각하는 회화성을 이야기한다. 자기 비판과 확인을 고집하는 다섯 개의 독자적 시각은 대상의 본질과 부재, 그리고 피안과 그 반대의 차안의 세계를 넘나드는 상반된 이중적 구조를 갖는다. 대부분 캔버스를 고집하는 이들의 작업은 과학적이며, 유기적이고, 자연적인, 초월적인, 신화적인 성격들로 서정과 낭만이 있는 자연과 인간의 세계이다. 이러한 <다섯 개의 오만>은 양만기의 빛(火)-과학적, 김연규의 물(水)-유기적, 박훈성의 나무(木)-자연적, 김찬일의 쇠(金)-초월적, 최인선의 대지(土)-신화적 회화들로 이루어진다.
먼저 양만기(1964- )의 경우는 과학적으로 작품을 제작한다. 사진과 영상 이미지를 평면화시키는 그의 작업은 고고학적 유물이나 식물 채집에 나타난 모티브가 중심이 된다. 여기에는 빛(火)의 아름다움이 있다. 그의 영상과 사진 이미지는 화석과 같은 축적된 시간성으로 화려하고 정열적인 불꽃이 아닌 잔잔한 불의 그림자로 그려진다. 정지된 것과 움직이는 영상 이미지의 결합으로 그의 작업은 회화의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특히 사진과 영상의 다양한 이미지 등장은 고고학자나 식물학자의 채집실처럼 전시장이 변한다. 자연과 생명, 생태의 문제를 비롯하여 인류의 문화 유산을 모티브로 사회적 문제제기와 함께 조형적 변화의 필요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름 모를 식물과 나비, 곤충, 새, 동물, 사람 얼굴까지 화석처럼 만들어지면서 시간의 신비를 찾아 빛의 아름다움이 퍼져 나온다. 그의 빛(火)의 예술은 판도라 상자가 되어 회화의 미래를 예고하는 듯하다.
김연규(196 – )의 모티브는 유기적 형태들로 서정적 추상표현 경향을 보여준다. 물(水)과 깊은 연관성을 갖는 유기체들, 화면은 물결처럼 보여지는 반복된 곡선들로 가득 찬다. 물 속과 같은 그의 화면은 생명의 씨앗과 같은 유기체들이 숨을 쉬고 있다. 또한 물위를 떠도는 식물의 줄기와 잎, 씨앗 등이 흰색으로 표백된 느낌이다. 생명을 가진 꾸밈없는 형상들이 주목된다. 그의 화면은 이러한 이미지들을 수평적으로 구성하고 있다. 그로테스크한 풍경의 표현적 추상은 마치 삶의 현장보다 삶, 그 자체를 말하고자 하는 회화이다. 흰색과 회색, 청회색, 적갈색 밝은 무채색은 불투명의 색채들로 결코 맑은 물은 아니다. 독자적 존재로서의 무채색이 돋보인다. 화려한 색이 아닌 겸손한 색, 깊은 밀도를 가진 우울과 사색의 색이다. 이러한 독자적 존재의 색들이 수평으로 그어진 반복된 선들 위에 놓여져 있다. 물결과 같은 곡선이다. 마치 물 위를 떠도는 식물 형상은 우리 자신의 개체처럼 나타나고 있다. 스스로의 성장을 보여주는 식물 이미지가 생명을 가진 하나의 존재로 가치가 부여되고 있다. 긴장과 이완이 공존하는 서정적 추상표현의 아름다운 작품이다.
박훈성(196 -)의 나무(木) 만들기와 그리기 작업은 자연 친화력으로 10 여년 넘게 지속되어 왔다. “나는 나무를 즐겨 사용한다. 나무는 내게 있어서 열려져 있는 자연성에 대한 질문이며, 백색화면은 나의 사고범주에 대한 대답이다. 나무가 선택되어지고, 그것이 매재로 백색 화면과 같은 의미를 부여받는다.”(작가 노트)라는 말처럼 그의 나무는 자연을 상징한다. 각목을 깍아 둥근 나무 기둥을 만들어 설치작업을 하거나 흰색 화면에 나무 기둥을 부분적으로 묘사하기도 하였던 그의 나무 연작들은 화가로서 자연의 또 다른 접근이었다. 최근 식물 이미지로 변화, 역시 자연성의 질문 가운데 하나이다. 다양한 식물 이미지를 그리거나 꼴라쥬 하는 작업으로 그의 회화는 자연 이미지의 재생산이다. 그리기도 하고 이미 만들어진 사진 이미지를 빌려오기도 하고, 나무를 직접 만들기도 하는 그의 평범한 자연의 재현적 작품은 감상자들을 자연 속으로 자연스럽게 안내한다. 백색의 사색적 공간을 연출하면서 자연과 밀착된 이미지 재현은 직선적인 표현으로 시각적 유희가 강하게 나타난다.
김찬일(196 -)의 최근 변화는 쇠(金)와 같은 표면에 집착하는 회화를 제작하는 것이다. 평면과 이미지에서 벗어나 초월적 힘을 담아내고 있다. 근작에 나타난 그의 화면은 물감이 칠해진 캔버스가 아니라 금속, 그 자체가 되어 있다. 갈색과 은회색 등 단색조의 표면은 철판이나 동물 가죽처럼 보인다. 그 위에는 어떠한 자연 풍경이나 일상적 형상도 찾아 볼 수 없다. 오직 금속성의 표면에 작은 구멍들이 기호처럼 새겨져 있을 뿐이다. 사라진 이미지들 대신에 차가운 금속 표면의 텍스쳐가 대신하면서 새로운 표현의 회화이다. 회화적 환영을 부정하면서도 그의 화면은 상상의 환영을 만들어 내고 있다. 공간의 무한성은 절대의 존재, 즉 초월적인 힘을 보여주고 있다. 이제 그가 추구하는 회화는 그리기보다는 이러한 초월적 힘과 공간이다. 금속성의 표면은 단순한 물질의 겉모습이 아닌 우주적 공간을 담고자 한다. 작가의 정신적 행위는 노동으로 바뀌면서 유미적 탈회화의 표면에 끝없이 집착하고 있다. 무엇보다 그의 변화는 이미지에서 벗어난 조각과 같은 작업으로, 기하학적 추상의 질서 탐닉과 함께 마치 끝없는 동종(銅鐘)의 울림이 담겨지면서 초월적 힘이 관객의 마음을 흔들어 놓고 있다.
최인선(196 – )의 은빛 대지(土)는 신화적이며, 영혼의 아름다움을 예찬하고 있다. 은회색이나 백색으로 뒤덮인 거대한 화면은 신들이 머무는 장소이며, 인간의 영혼이 살아 숨쉬는 대지이다. 결코 수다스럽지 않은 그의 화폭은 모든 것을 다 포용할 뿐, 아무런 응답이 없다. 이는 침묵의 표면이며, 명상의 공간이다. 순수한 빛의 표면들이 아름답게 펼쳐진다. 맑은 햇살이 비치는 빙하의 대지처럼 그의 표면은 차갑지만 우리의 정신을 맑게 한다. 때로 작은 상징적 기호의 표현으로 그의 추상화는 매우 구체적 주제가 있는 작품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종교화처럼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은빛 대지는 현실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느낌이다. 험악한 것들은 속으로 감추어버린 신화적 화면은 삶의 공간이 아닌 추상의 여백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무한의 대지처럼 보여지는 그의 아름다운 모노크롬 추상 화면은 자신의 종교적, 신화적 주제와 영혼의 소리를 담은 것으로 오늘날의 성상화이다.
결과적으로 다섯 개의 오만은 과학과 생명, 자연과 인간, 물질과 정신, 신화와 초월적 힘의 아름다움과 연결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다시 언급되지만 양만기의 과학-빛(火)과 김연규의 생성-물(水), 박훈성의 자연-나무(木)와 김찬일의 금속(金)-초월적 힘, 그리고 최인선의 신화와 종교적 내용을 은빛 대지(土)에 감추고 있다. 이들이 추구하는 시대적 변화의 회화성이 오늘날의 새로운 회화적 담론이 된다. 특히 이들의 회화는 시대와 사회적 변화에 적응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동시에 내일의 모습을 예견하는 독자성이 돋보인다. 내용에서 이들의 작품은 자연과 인간의 끝없는 탐구에서 시작되었다.
또한 생명의 탄생과 파괴를 비롯하여, 사물의 본질과 내면의 세계를 찾아 나서는 이들은 새로운 회화적 아름다움(美)을 모색하는 21세기 탐미주의자들이다. 자신의 주장을 삭이기도 하고 때로 거침없이 내뱉고 있다. 때로 이해하기 힘든 개념과 표현들, 관념적 추상 작업으로 대중과 점점 더 멀어지는 전위-아방가르드(AG)이지만 점차 우리 주변 가까이 다가서고 있다. 이제 <다섯 개의 오만> 기획전시의 긍정적 평가와 회화의 종말이 아닌 내일의 회화를 생각한다. 아울러 여기에 동참한 5명의 개성 있는 작품 앞에서 관객은 서로 다른 진실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행운을 갖게 된다.
유재길 / 홍익대교수 ·미술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