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화 12명가
한국화 12명가展
동양화 붐을 또 만들 수 있다
-한국화 12명가(名家)전에 부쳐-
이규일(미술평론가·art in culture고문)
한국 화단(畵壇)에는 1970년대 후반, 지금도 신화처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동양화 전성기’가 있었다.
전시회만 열면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애호가들이 사고 싶은 작품에 몇 개씩 겹으로 빨간 예약 딱지를 붙였던 시절이다. 전시 축하 화분이 전람회장을 한바퀴 돌고 그것도 모자라 출입구 계단까지 즐비하게 늘어서는 진풍경도 벌어졌다. 작품이 잘 팔린 것은 말할 것도 없지만 아름다운 경치와 인기 연예인이 주를 이루던 캘린더가 유명작가의 그림으로 바뀐 것도 바로 이때부터다. 이렇게 동양화 붐이 조성된 것은 감나무 밑에서 입 벌려 얻어낸 우연은 아니다. 우리들은 임진왜란, 일제강점기, 한국전쟁등 온갖 수난을 겪으면서도 안방에 병풍을 치고, 도자기를 놓고, 사랑방에 그림이나 글씨를 걸고, 집안 기둥마다 주련(柱聯)을 달았던 문화민족의 후예다. 나름대로 멋을 즐기며 격조 있게 살았던 선비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민초들에게도 민화가 있어 그림과 가까이 할 수 있는 공감대가 형성되어 생활미술의 뿌리가 튼튼했다. 그런데, 1970년대 후반 우리들이 살던 집이 바뀌기 시작했다. 강남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주거환경이 달라졌다. 아파트마다 새로 생겨난 넓고 많은 하얀 벽면이 그림을 불러들인 것이다. 이런 환경의 변화가 미술작품 수요를 많게 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 같은 상황에 씨앗이 된 것은 ‘6대가’들이다.
1971년, 서울 태평로의 신문회관 화랑에서 <동양화 여섯분 전람회>가 열렸다. 이 전시는 지금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는 이구열(李龜烈)씨가 경향신문에서 서울신문 문화부장 대우로 스카우트돼 기획한 것이다. 서울신문 창간 26돌 기념 특별초대로 12월1일부터 7일까지 1주일 동안 펼친 이 전시회는 성과가 좋았다. 의재 허백련(毅齋 許百鍊,1891~1977), 이당 김은호(以堂 金殷鎬,1892~1979), 심향 박승무(深香 朴勝武,1893~1980), 청전 이상범(靑田 李象範, 1897~1972), 심산 노수현(心汕 盧壽鉉,1899~1978), 소정 변관식(小亭 卞寬植,1899~1976) 화백을 초대한 <동양화 여섯분 전람회>는 화상의 본거지인 인사·관훈동에서 화제 거리가 되어 ‘동양화 6대가 전’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때부터 미술계에서 ‘6대가’란 말이 공공연히 통용되었다.
‘대가(大家)’란 낱말을 전시회에서 처음 쓴 것은 1940년 우경 오봉빈(友鏡 吳鳳彬,한국일보 논설위원을 지낸 吳道光의 선친)이 조선미술관 창립10주년 기념으로 꾸민 <10대가 산수풍경화 전>이다. ‘6대가’도 1940년 조선미술관이 기획한 ‘10대가 전’에서 1971년 당시 생존 작가만 뽑은 것이다.
‘10대가’중 이미 타계한 화가는 춘곡 고희동(春谷 高羲東,1886~1965), 묵로 이용우(墨鷺 李用雨,1904~1952), 정재 최우석(鼎齋 崔禹錫,1899~1964), 무호 이한복(無號 李漢福,1897~1940)등 이었다. 우경은 일제강점기 광화문 네거리 당주동 입구에 개인화랑인 조선미술관을 열고 명서화를 많이 취급한 화랑의 개척자이다. ‘10대가’선정도 우경 단독으로 하지 않고 전문가의 의견을 들어 결정했다. 이때 인선기준과 자격은 ①소림 조석진(小琳 趙錫晋,1853~1920)·심전 안중식(心田 安中植,1861~1919) 에게 직접배운 화가 ②작가 생활 30년을 계속한 화가 ③조선미술전람회에 입·특선한 화가였다. 이른바 ‘6대가’는 의재를 제외하고는 5명이 모두 심전·소림의 문화생들이고, 의재와 소정만 빼놓고는 이당·심향·청전·심산 네 사람이 모두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학교인 경성 서화미술회 동문이다. 이당이 2기, 다른 세 사람은 3기생들이다. 이당과 의재의 중국여행, 이당과 소정의 일본 유학, 청전과 심산이 함께한 직장(동아일보)생활, 의재 와 소정은 시대는 다르지만 일본 남화의 대가인 고무로 슈웅(小室翠雲)에게 동문수학한 선후배 간이다. 이당과 청전은 한국 사람으로 조선미술전람회 심사를 함께한 맞수였다. 이처럼 ‘6대가’들은 최소한 50년이 넘는 우정을 쌓아온 경쟁자들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작업은 특성이 있고, 저마다 일가를 이룬 터. 이당은 인물화, 다른 다섯분은 모두 산수화였지만 개성은 달랐다.
개막식에는 김종필 국무총리, 윤주영 문공부장관, 장태화 서울신문사장, 의재, 이당, 심향, 소정, 심산등이 참석했다. 6대가중 청전만 병으로 불참했다. 출품작은 의재가 4점, 이당이 12폭 신선도 병풍과 8폭 노안병풍등 5점, 심향이 4점, 청전이 1점, 심산이 3점, 소정이 4점을 내놓았다. 여섯분 노대가들은 전람회를 길이 기념하기 위하여 6곡 병풍 3채를 꾸밀 계획이었으나, 청전이 병고로 기일 안에 자기 몫을 완성하지 못해 부득이 다른 다섯분의 병풍 그림을 낱폭으로 표구해 전시했다. ‘6대가’들은 개막식을 끝 내고 다동 골목에 있는 한식집 요정으로 가 술잔을 돌리며 오랜만에 회포를 풀었다. 이들은 취흥이 도도해지자 술상을 물리고 합작그림을 즉석 휘호로 완성, 기념작으로 남겼다. 이튿날은 의재가 묵고 있는 청진동 여관으로 이당·심향·소정이 모였다. 의재는 화우들에게 그가 무등산에서 손수 가꾼 춘설차 한 봉지씩을 선사했다. 이들은 서로 농을 하면서 담소를 나누었다. 이 자리에서 바로 6대가의 별명이 지어졌다. 의재는 불독, 이당은 포인터, 심향은 발발이, 소정은 세퍼드, 이들은 생긴 모습대로 붙인 별명이라고 배꼽을 잡고 웃으면서 밤늦게까지 놀았다.
필자가 중앙일보 기자로 1976년 8월5일부터 장장 4개월동안 91회에 걸쳐 이당의 구술을 받아 한국화단의 이야기를 정리,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 <서화백년(書畵百年)>을 연재한 것도 동양화 붐을 조성하는데 일조했다. <서화백년>은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알리고 작가와 작품에 얽힌 비화(秘話)를 발굴, 많은 독자들에게 홍보, 붐을 만드는 북과 꽹과리 역할을 한 것이다. 필자가 이렇게 ‘6대가’이야기를 장황하게 쓰는 이유는 이들이 1970년대 동양화 전성기의 기폭제가 되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겸재 정선(謙齋 鄭敾)·단원 김홍도(檀園 金弘道)·혜원 신윤복(蕙園 申潤福)에게서 오원 장승업(吾園 張承業)을 거쳐 심전·소림으로 이어지는 동양화맥이 ‘6대가’에게 와서 현대미술과 맞닿아 도약대가 되었다.
노화랑이 기획한 이번 전시회(한국화 12명가전)도 ‘6대가’를 시작으로 월전 장우성(月田 張遇聖,1912~2005)·운보 김기창(雲甫 金基昶, 1913~2001)·옥사 천경자(玉史 千鏡子,1924~)·남정 박노수(藍丁 朴魯壽,1927~)·산정 서세옥(山丁 徐世鈺,1929~)·유산 민경갑(酉山 閔庚甲, 1931~)·지목 이영찬(志木 李永燦, 1935~) 화백등 12분을 초대, 동양화의 진면목을 보여주겠다는 벼름이다. 실력 있는 작가의 작품을 내세워 1970년대의 영화(榮華)를 다시 한번 재현해 보자는 뜻이다. 흘러간 옛 노래가 아닌 오늘의 인기품목을 만들려면 부단한 노력이 필요하다. 동양화 붐을 조성하려면 준비가 있어야 한다. 전통에 뿌리를 두고 어떻게 현대미술로 거듭날 것인가도 연구되어야 한다. 우리는 동양화의 새 지평을 열기위해 1980년대 수묵화 운동을 펼쳤다. 무엇보다 한국성을 살리면서 세계화의 길로 매진해야 할 것이다. 동양화 붐 조성은 화랑만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미술계 인사들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작가를 격려하고, 애호가들이 앞을 내다보고 작품을 살수 있게 국내외에서 좋은 전시회를 기획, 힘써 알리고 퍼뜨린다면 우리에게 또 한번 동양화 전성기가 찾아올게 아닌가. 유행도 인기도 바뀌는 법이다. 동양화 전성기를 이루었던 1970년대에서 30년이 훌쩍 지났다. 한 세대가 간 것이다. 이제 변화의 시기를 맞았다.
이번에 초대된 ‘12명가’는 1976년 국립현대미술관이 기획한 <한국현대동양화전>에 출품, 한국미술의 우수성을 자랑했고, 1977년10월부터 9개월 동안 스웨덴·네덜란드·독일·프랑스 등 유럽4개국을 돈 <한국회화유럽순회전>에서 우리미술의 세계성을 인정 받았다. 검증이 끝나고 때를 기다린 셈이다. 국내에서도 1976년3월 동산방화랑이 기획,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동양화 중견작가 21인 초대전>(김동수·김 원·문장호·송계일·송수남·송영방·원문자·유지원·이규선·이양원·이열모·이영찬·이종상·이옥성·이철주·임송희·장선백·정은영·정탁영·하태진·홍석창), 1977년12월에 장우성·김기창·성재휴·이유태·조중현·장운상 ·박노수·서세옥·민경갑 등 중진작가를 보태‘중견작가 21인전’을 확대했던 <한국 동양화가 30인 초대전>이 동양화 중흥의 주춧돌을 놓았다. 노화랑의 이번 <한국화 12명가전>은 우리미술의 장점을 보일 수 있는 재기의 발표장이 될 것이다. 이들은 기초가 튼튼하고 세계성을 갖춘 작가들이어서 더더욱 그렇다.‘동양화 붐을 또 만들 수 있다’는 필자의 확신은 초대작가의 면면에서 쉽게 읽을 수 있을 것으로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선 의재의 작품을 보자. 남도 바닷가 어딘가가 연상되는 그의 작품은 천상 한국그림이다. 1922년 제1회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의재의 <추경산수>가 1등을 없는 2등상을 받았다. 이때 심사위원들은 의재의 작품을 보고 “중국풍도 아니고, 일본풍도 아니다. 바로 한국 것이다”라고 평했다.
이당은 서화미술학교에 입학한지 삼칠일(21일)만에 어용화사(御容畵師)가 되었다. 이는 이당의 내림재주를 증명하는 사건이지만, 이당을 발굴한 심전과 소림의 혜안을 높이 평가해야 할 일이기도 하다. 심전과 소림에게 화업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이당이 맨 처음 그린 그림이 인물화다. 누가 무어라 해도 이당의 인물화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만큼 독보적이다.
청전은 어떤가. 1925년 4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1934년 13회까지 연 10회 특선으로 1935년14회부터 선전(鮮展)의 추천작가가 된 실력자다. 선전에서 연이어 10번 특선한 화가는 청전말고 한 사람도 없다. 타고난 재주에 성실함 까지 보태져 그의 그림은 태작이 별로 없는 편이다. 작품을 대하면 한국의 산하를 직접 보는 것처럼 편안하고 정겹다.
심산의 돌산, 암벽은 리얼하다. 기량이 뛰어나 그림이 살아 숨쉰다. 하지만 작품에서 풍기는 고격한 맛은 조선시대 선비그림처럼 느껴진다.
소정의 호방한 붓놀림은 힘 있고 거칠다. 짙은 먹맛의 작품 속에 사람을 그려 활력을 불어 넣는다. 정적인 산수화에 동적인 인물을 가미, 그림의 생명력을 창출해 낸 것이다. 소정의 ‘황포(黃布)노인’은 생동감의 표본이고 그림에 액션트를 주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 아닐 수 없다.
운보와 월전도 청전 다음으로 선전에서 연4회 특선, 추천 작가가 된 실력자들이다. 운보와 월전은 이당의 무릎제자다. 이당 제자들이 1936년에 만든 최초의 동양화그룹 후소회(後素會) 멤버들이다. 운보의 <청산도>는 여전히 인기가 있다. 시원한 맛 때문일 것이다. 그가 아내가 저 세상으로 가고 난 뒤에 우리민화에 기초를 두고 창안한 ‘바보산수’야 말로 겸재의 진경산수와 비길만한 성과다.
월전은 말년에 전통적인 우리그림에 생각을 담아내는 ‘의식화(意識畵)’를 내놓았다. 철조망 위를 날아가는 기러기 떼를 그려 ‘분단의 아픔’을, 목이 뒤틀린 학을 그려 ‘공해’를 경계하는 작품을 발표했다. 월전의 특장은 문인화다. 구순전(九旬展)에 새로운 문인화를 선보여 박수를 받았다.
천경자 화백은 올봄 전시회를 통해 인기 작가임을 다시 한번 입증했다. 그는 뉴욕에서 투병 중이지만 전시장은 관람객들로 붐볐다. 작품도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 이 전시회를 계기로 작품 값이 천정부지로 올랐다. 천화백은 1955년 대한미협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 이듬해 대한 미협전과 국전에서 한해에 두개의 대상(대통령상)을 거머쥔 우향 박래현(雨鄕 朴崍賢)화백과 쌍두마차로 한국미술계에서 여성파워를 형성했다. 천화백의 스케치 실력은 자타가 공인하는 터. 1972년 월남전 종군 기록화제작 화가단으로 현장스케치에 참가, 남들은 사진을 찍어와 작품을 제작했는데 운보와 천화백은 총알이 빗발치는 전장에서 붓을 들고 스케치, 동료화가들에게 박수를 받았다.
산정과 남정, 유산과 지목은 모두 월전의 서울대 제자다. 남정(1955년 4회)과 지목(1973년 22회)은 국전에서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았고, 산정은 1949년 1회 국전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다. 유산은 국전에서 동양화 비구상으로 맨 먼저 추천작가가 된 프런티어다. 남정의 군청산수에는 마스코드처럼 선비가 나타난다. 고고(孤高)하게 살아가는 딸각발이 정신이 그의 그림 속에 맥맥히 살아 있다. 남성적이고 장중한 맛을 풍기는 남정의 작품에는 엄격한 구도와 치밀하게 계산된 공간개념이 돋보인다. 한마디로 우리적인 고격한 ‘문인산수’로 일컬어진다.
산정은 구상 ․ 비구상을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작가다. 그 옛날 문기 넘치는 구상작업은 간결한 맛이 일품 이었지만, 이즈음의 인간 시리즈는 동양화를 세계적 흐름 속에 혼융시킨 선의 예술이다.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의 포치(布置)를 현대적 구성으로 바꾼 공간개념이 아닐 수 없다. 선속에 숨어있는 형상은 다분히 동양철학의 깊은 맛을 보여준다. 그의 화제(畵題) 글씨는 일품이다. 손수 새기는 전각 작품도 산정의 특장이다.
유산은 그림에서 되도록 형상을 감추고 강한 채색으로 신선한 맛을 돋우고 있다. 구상이 녹아서 태어난 추상성의 발현이다. 현대감각의 유니크한 색채미가 전통의 바탕위에서 새로움을 내보인다. 하지만 유산에겐 구상·비구상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오직 새로운 것을 탐구하고자 하는 창조정신이 있을 뿐이다.
지목은 꾸준히 산수화 영역을 지키고 있는 작가다. 서울대에서는 심산에게, 개인적으로는 청전에게서 산수화의 길을 찾았다. 하지만 관념산수도 남화산수도 아니다. 진경산수에 현대미를 보탠 ‘지목산수’다. 산·바위·나무·안개·개울, 어느 것 하나 소홀함이 없다. 눈으로 보고, 가슴으로 해석해서 아름다운 우리강산을 그려내고 있다. 지목은 대산 김동수(對山 金東洙) 화백과 자웅을 다투는 산수화가로 오늘도 실경을 찾아 한국의 산하를 누비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