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인현
회화의 지층 – 옆에서 바라본 그림
이인현의 새로운 작품을 보면서
두터운 캔버스에 짙은 푸른색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방식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인현의 작품전을 노화랑에서 열게 되었습니다. 「회화의 지층」이라 이름 붙여진 시리즈의 작품을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발표하고 있는 그는, 이번 개인전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제작된 작품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인현은 자신의 작품을 통하여 미술작품일반에 관한 자신의 철학적 관심이나 입장을 담아내고자 하는 지적인 작가입니다. 그가 보여준 작품들은 작품을 바라보는 우리들의 인식의 방법을 다시 되돌아보게 하는 자기언급적인 구조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미술사를 正面의 역사라고 말합니다. 나아가 모든 역사는 자신을 正史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이러한 것을 이인현은 역사를 서술하는 자체의 구조적인 문제로 파악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작품을 제작하고 살아가는 예술과 삶의 현장은 이런 역사주의로 덮을 수 없는 무수한 측면들이 있다는 것에 주목합니다. 여기서 흥미로운 점은, 그가 이러한 ‘측면의 존재’를 말하면서도 그것이 정면에 대한 대항세력이나 대안으로서가 아니고, 측면 그자체도 하나의 바라보는 각도에 지나지 않는다고 하는, 다양성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입니다(그럴 때 정면도 하나의 측면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측면바라보기’는 표층과 심층, 내부와 외부, 이미지와 물성 등등의 고질적인 이분법적 갈등에서 ─ 심지어 정면과 측면을 양자택일하는 억압에서 ─ 벗어날 수 있는 유효한 방법이라고 주장합니다. 결국 ‘측면바라보기’는 여러 측면을 동시에 ‘옆에서 바라보기’라고 말할 수 있는 셈이며, 어감과는 달리 매우 강력한 방법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입장에서 제작된 그의 작품은 측면이 매우 두껍습니다. 시각적으로 강조된 측면은 단지 강조되는 것 뿐 만 아니라 몇 개의 캔버스가 조합을 이루어 정면과 길항하기도 하고 뒤섞이기도 합니다. 제작시의 정면이 측면이 되기도 하고, 속으로 감추어지기도 합니다. 또한 옆의 다른 작품들과 긴밀하게 조응하여 작품사이의 공간이 보다 중요한 측면으로 부각되기도 합니다. 전시공간에 따라 그는 작품의 상하, 좌우를 예사로 뒤집고, 조합의 개수를 줄이거나 보태기도 ─ 심지어는 삐져나오게까지 ─ 합니다(이인현의 대부분의 작품들의 경우, 단품의 경계가 불분명합니다. 즉, 어디까지가 한 작품인지가 애매하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누군가는 ‘회화적 설치’ 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관객과 작품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같은 공간에, 서로의 옆에 위치하게 됩니다. 그의 말을 빌리면, 이러한 측면으로의 확장은 물리적인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제작자와 작품의 관계 또한 전통적인 의미의 ‘탐구’나 ‘정진’보다는 ‘더불어 있는’ 유연한 관계인 것입니다. 그의 작품에서 보여지는 인상이 매우 정제되어 있고 작업과정 또한 상당한 긴장을 요한다는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러한 그의 입장표명은 이번 신작에서의 변화를 가늠케 하는 단서이기도 합니다.
지금까지 이인현의 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외형적인 특징은, 직육면체 혹은 정육면체로 만들어진 틀에 씌워진 생 캔버스에 묽은 유채기법을 사용하여 동양화의 발묵을 연상케 하는 물감의 번짐이나 주사위의 눈과 비슷한 점의 형상들입니다. 그리고 이 단순한 형상들이 단순한 물리적 흔적과 함께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 다소의 차이는 있을지라도 ― 무언가를 연상케 하는 일루젼들입니다. 그리고 그 일루젼은 다시 물리적인 외형으로 되돌아가는 재귀적인 형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위아래로 똑같이 스며 나온 물감의 흔적이 호수에 비친 먼 산의 대칭형을 보여준다던지, 바다같이 넓고 푸른 색면 위에 연결된 다른 캔버스의 접합부분에 마치 아지랑이나 안개처럼 엷은 물감의 번짐을 배치한다던지, 얇게 썰어낸 치즈모양의 캔버스들 위에 서로 엇비슷하게 크고 작은 점(구멍)들이 찍혀지거나 사라지게 한다던지, 모서리가 둥글게 다듬어진 주사위모양의 큐브형 캔버스에 몇 개의 점들을 짐짓 회화적인 배치로 찍고, 각 면에 찍힌 점의 개수를 평면 위에 숫자의 기록처럼 다시 점의 형상으로 나열한다던지, 폐기처분되어 프레임으로부터 해체된 캔버스 천을 다시 느슨하게 재접합하여 출입금지의 라인을 마치 또 하나의 프레임처럼 둘러 쳐 놓는다던지, 하는 식입니다. 그의 작품 앞에서 느끼는 ‘신기함’과 ‘놀라움’은 아마도 이러한 자기언급성에서 오는 것 같습니다.
그림을 그리는 방식은 단순하지만 물성과 형상을 동시에 적절히 담아내야하므로 결과는 항상 엄청난 시행착오를 전제로 합니다. 그는 이러한 균형감각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작품의 제작과정을 간단히 살펴보면, 넓은 색면을 칠할 때는 풀기를 뺀 생 캔버스 천에 다량의 테레핀오일로 희석한 짙은 청색 유화물감을 평필로 앞면만을 균일하게 칠합니다. 이때 다른 면과의 차이를 만들기 위해서는 붓이 면의 경계를 넘어가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합니다. 그라데이션 작업은 물감을 일정량의 테레핀으로 점점 묽게 만들어가면서 어두운 부분부터 칠해갑니다. 물감이 생지의 캔버스에 빠른 속도로 스며들기 때문에 균일한 색면이나 깨끗한 그라데이션을 얻기 위해서는 작업도중에 한시라도 쉴 수가 없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캔버스의 한쪽 면만을 반복적으로 칠하면서도 물질적인 두께를 만들지 않는 ‘동어반복적’인 노동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물감은 번지면서 옆면으로 꺾여 넘어가게 됩니다. 정면에서의 작업량이나 물감의 농도는 옆면의 번짐의 정도로 드러납니다. 이 ‘번짐’이 옆면의 물리적인 두께를 정면의 깊이로 느껴지게 만듭니다.
점의 경우는 면과는 상대적으로 모든 면에 찍혀 있습니다. 타원형으로 엷게 번진 이인현의 크고 작은 점들은 표면에서의 정해진 넓이를 가지지 않고 마치 떠있는 구체나 구멍처럼 보입니다. 점들은 그 자리에서 ─ 면의 가장자리까지 가지 않더라도 ─ 바로 밑으로 배어 들어가는, 혹은 안에서 배어 나온 듯한 시각적 효과를 가지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입체적인 효과에는 옆면의 두께가 한 몫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점의 위치는 평면이 아닌 3차원 좌표에 속하는 듯 보이기까지 합니다(실제로 면의 경계나 모서리에 찍힌 점들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점을 찍을 때는 미리 찍을 곳을 정해놓고 물감을 절대로 면에 ‘칠’하거나 면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캔버스의 표면과는 무관한 순간적인 ‘자리잡기’의 노동만이 있습니다. 물감은 오로지 스스로의 힘으로 번지기만 해야 합니다. 그것은 찍는 다기 보다는 차라리 올려(내려)’놓기’에 가깝습니다. 역설적으로 말하자면 이때는 반대로 작업도중에 절대적으로 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점과 면 어느 경우에도 ‘그림을 그린다’는 생각을 한시라도 가져서는 안 되는 ‘순수한’ 노동만으로 이루어집니다.
「회화의 지층」은 이인현이 작품발표 초기부터 자신의 작업에 붙여온 총체적 테마입니다. 작가의 정신적 사고의 결과물인 ‘옆에서 바라보기’와 순수한 육체의 노동으로 이루어진 ‘물감의 층’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작품의 제목임과 동시에 작품을 바라보는 실천방법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렇게 제작된 그의 그림은 관람객에게 다양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킵니다. 그의 작품 자체에는 아무런 결정된 의미의 체계가 없지만, 자유로우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주는 다양한 모습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물감의 층과 그 즉물성을 여과없이 목도하면서도 눈앞에는 아득한 호반의 풍경이 펼쳐집니다. 밤하늘에 떠오르는 푸른 별, 스위스치즈의 매끈한 촉감 등을 떠올리는 관람객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형상의 일루전에 취해 있으면서도 정작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대칭적인 색면의 얼룩, 우연한 번짐, 무심한 노동의 흔적이라는 사실도 부인할 길은 없어 보입니다. 감상에 있어서의 이러한 이분법적 한계는 어쩌면 우리가 극복해야할 명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우리의 모습을 다시 한번 우리 스스로가 반추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왜냐하면 관람객에게 자발적인 참여를 요구한다기 보다는, 관람객이 그것을 실현할 때 작품의 의미가 저절로 드러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의 그림이 물성과 일루젼의 측면을 효과적으로 배분,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관람객으로 하여금 다가서거나 뒤로 물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관람객은 그의 작품 앞에서 이리저리 고개를 기웃거리게 됩니다. 긴 막대 그림을 볼 때는 천천히 걸어가면서 옆 눈으로 보거나, 우습지만 게걸음을 걷게 됩니다. 큰 작품의 경우 한가운데서 전체를 볼 수는 있겠지만 그럴 때 우리는 측면을 볼 수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10x10x10cm의 작은 큐브 작품을 볼 때 우리는 싫어도 측면을 함께 봐야 합니다. 가려진 부분을 보거나 상상하기 위해서는 다가서서 옆면을 보아야 하고 옆면을 보게 되면 보이지 않는 것도 상상할 수 있습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그려진 것과 그려지지 않은 것, 층과 층 사이에 숨어 있는 것들을 모두 보기 위해서는 ─ 너무나 당연한 말이지만 ─ 관람객도 작품과 같은 공간에 속하여 일정한 시간의 경과와 함께 작품이 존재하는 방식을 직접 경험해야 합니다. 이인현의 작업이 가지고 있는 가장 흥미로운 측면은 바로 이러한, 작품의 존재와 인식이 서로의 아날로지로 이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이번에 새롭게 발표되는 이인현의 그림은 그동안 보여준 제작방식과는 사뭇 다릅니다. 먼저 생 캔버스를 넓게 펼쳐놓고, 긴 막대에 씌워진 천에 짙은 푸른색을 한껏 머금게 합니다. 그리곤 이 막대를 캔버스 위에서 번지지 않도록 멈추지 않고 스쳐지나가게 하는 것입니다. 밀착되는 것도 그렇다고 완전히 떨어진 것도 아닌 상태에서 일정한 속도로 캔버스 위를 미끄러져 지나가는 것입니다. 이전의 작업방식이 최종적으로 나타날 그림의 모양새를 예상하여 고도로 계산된 사전계획에 따랐다면, 이번 작품에서는 캔버스와 긴 막대의 역할에 대부분 의존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는 우연적인 효과까지도 시행착오를 통하여 일종의 ‘모범적인 상태’를 만들어내려고 했지만, 마찰에 의해 만들어진 화면은 이러한 의도나 통제가 끼어들 틈이 별로 없습니다. 달리 말하면 화면을 통제할 수 없도록 통제하는 것입니다. 캔버스의 미묘한 요철이나 변수들이 손의 떨림과 함께 고스란히 전달되어 흔적으로 남겨집니다. 이렇게 만들어진 캔버스 천은 나중에 각기 다른 사이즈의 캔버스 틀에 부분적으로 취사선택되어 매어지게 되고 그 캔버스들은 다시 조합되어지기도 합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가 볼 수 있는 화면의 정면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즉 처음에는 의도나 통제로부터 자유로울 수밖에 없도록 의도되어진 것입니다. 처음 스쳐지나간 흔적의 미묘한 떨림들은 프레임에 매어질 때 다시 한번 랜덤하게 휘어지게 됩니다. 캔버스가 조합되는 경우에는 속도감과 얼룩이 변형되거나 은폐되면서 정면視의 완결성을 뒤틀게 됩니다. 이제 두꺼운 옆면은 더 이상 필요가 없게도 생각되어지지만, 마찬가지 이유로 더 이상 옆면을 감추어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사실 흔적이나 속도감은 옆면으로 꺾일 때 가장 극적으로 변형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캔버스의 두께는 이제 물감이 아니라 공기를 머금고 있는 듯 보입니다.
신작의 경우, 짙은 물감을 사용하고는 있지만 화면 속으로 파고드는 진한 얼룩이나 번짐을 만들어낼 시간적인 여유가 통제되고 정해진 위치를 차지하는 점들도 모두 사라졌습니다. 전체적으로 훨씬 밝아진 화면에는 물감의 양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림이 만들어지는 행위는 아슬아슬한 간극을 사이에 두고 캔버스를 스치듯 일회적으로 지나갑니다. 화면을 흥건히 적시던 푸른 물감은 이제 캔버스 올의 솜털 위에 간신히 미세한 입자로 붙어 흔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작품들은 여전히 어떤 종류의 정신성 내지는 깊이를 변함없이 지니고 있으며 또한 여전히 아름답습니다. 이전의 작품들이 멀리서 바라보는 고요한 풍경이나 물의 반영 등의 정적인 미장센을 연상시켰다면, 이번 작품들은 그 위를 비치는 햇살이나 그림자, 혹은 허공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소리, 그 속도감, 고정되지 않고 항상 흔들리는 프레임 등을 느끼게 합니다. 비스듬히 바라보면 마치 비로드같이 난반사를 일으키는 홀로그라매틱한 화면의 질료적인 매력도 이번 작품들에서 놓칠 수 없는 부분입니다. 이전의 작품들이 화면 속으로 겹겹이 연결된 착각을 유도했다면, 그래서 아직 마르지 않은 물감이 만지면 배어 나올듯한 촉감을 가진다면, 화면의 표피를 따라 스캔되어진 신작의 촉감은 차라리 멀쩡한 캔버스 위에 물감의 얇은 층이 또 다른 표피를 이루고 있는 듯이 보이기까지 합니다. 그것은 손에 묻어날 것 같은 넘쳐남 보다는 손길이 닿기 전의 어떤 설레임과 더 닮아 있습니다.
그가 지금까지 줄곳 견지해온 視 태도에서 볼 때, 이러한 작화방법과 느낌들은 작품의 정면성이나 결정성에 있어서 더욱 현저히 그 중심에서 물러나 있는 것 입니다.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 지던 모종의 집중도를 생각하면 이번의 작품들은 비어있는 무대배경이나 열려진 창문 같게도 보입니다.
그만큼 작품 쪽에 주어졌던 무게가 덜어진 것으로 느껴집니다. 종래의 회화나 예술작품들 이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시야를 가로막는 아무방해꾼도 없이 적절한 조명이나 분위기등 의 진공상태와도 같은 여러 까다로운 조건들을 필요로 해왔다면, 이번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자신을 가려줄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는 듯 합니다. 그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장소와 더불어 변화하는 빛이나 소음일 수 도 있습니다. 예술작품의 자기과시적인 아우라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여전히 키워져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본다면 이인현의 이번 신작들은 심플한 작품의 외형과는 달리 더욱 유효한 실천의 한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이인현은재료나 도구의 선택과 사용에 있어서 언제나 매우 역설적이고 래디 컬한 측면을 보여왔다고 말 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고집하는 oil on canvas라는 표기도 실제로는 전통적인 재료기법과는 매우 딴판입니다. 마찬가지로 블과화업에 대한 환상이나 동경도거의 없는 듯합니다.
이번 작업에서 사용된 긴 막대는 이인현의 또 다른 캔버스 작품의 형태 이기 합니다.
그동안 우리는 삶의 현장에서 아니, 긴 역사에서 스치고 지나간 많은 것들을 잃어버렸습니다. 문화라는 이름으로,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혹은 자신의 이름으로, 명분과 억압에 의해서 만들어진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간과하고 지나간 많은 일들이 있습니다. 이인현은 이런 흔적과 기억들을 그의 작품에서 시사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서로간의 부딪침, 마찰, 일회적인 만남의 덧없음과 어긋남 등에 의해 형성된 많은 사건과 사실들을 자연스럽게 묻어나도록 혹은 묻어버리도록 그의 제작방식에서 말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이인현의 새로운 작품은 관람객들에게 어떤 상상력을 불러일으킬지 자못 기대가 큽니다. 선선한 바람이 상큼하게 볼에 와닿는 9월에 여러분을 이인현의 새로운 작품 발표에 정중히 초대합니다.
노화랑 큐레이터 임창섭
그가 지금까지 줄곧 견지해온 斜視의 태도에서 볼 때, 이러한 작화방법과 느낌들은 작품의 정면성이나 결정성에 있어서 더욱 현저히 그 중심에서 물러나 있는 것입니다. 이전의 작품에서 보여지던 모종의 집중도를 생각하면 이번의 작품들은 비어있는 무대배경이나 열려진 창문 같게도 보입니다. 그만큼 작품 쪽에 주어졌던 무게가 덜어진 것으로 느껴집니다. 종래의 회화나 예술작품들이 관람객과 작품 사이에 시야를 가로막는 아무 방해꾼도 없이 적절한 조명이나 분위기 등의 진공상태와도 같은 여러 까다로운 조건들을 필요로 해 왔다면, 이번 그의 작품들은 오히려 자신을 가려줄 어떤 것들을 필요로 하는 듯 합니다. 그것은 작품을 바라보는 관객 자신의 모습일 수도 있고 장소와 더불어 변화하는 빛이나 소음일 수도 있습니다. 예술작품의 자기과시적인 아우라가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여전히 키워져가고 있는 작금의 상황을 본다면 이인현의 이번 신작들은 심플한 작품의 외형과는 달리 더욱 유효한 실천의 한 방법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고 보면 이인현은 재료나 도구의 선택과 사용에 있어서 언제나 매우 역설적이고 래디컬한 측면을 보여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가 고집하는 oil on canvas라는 표기도 실제로는 전통적인 재료기법과는 매우 딴판입니다. 마찬가지로 붓과 화업에 대한 환상이나 동경도 거의 없는 듯 합니다. 이번 작업에서 사용된 긴 막대는 이인현의 또 다른 캔버스작품의 형태이기도 합니다. 이 긴 막대모양의 작품을 제작할 때조차도 그는 붓 대신에 이번에는 반대로 넓은 캔버스를 사용하곤 합니다. 붓이 작품이 되고 작품이 다시 도구가 되는, 한 작품이 다른 작품의 부분과 전체를 공유하는, 일단 버려진 작품이 다시 재활용되는, 이러한 순환이나 가역성을 그는 어디선가 윤리라는 단어로 표현한 적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