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승원
근작 <동시성> : 색(色)의 향연과 사색(思索)의 공간
유재길 ㅣ홍익대교수·미술비평
2000년 8월, 10년 만에 가졌던 서승원의 개인전은 우리화단에 많은 관심을 갖게 하였던 전시였다. 이는 30여 년간 <동시성(同時性)>이라는 일관된 주제로 한국 추상미술의 전개에 중추적 역할을 하였던 그의 작품 변화에 대한 반응이었다. 당시 그의 변화된 모습을 평론가들은 “따듯한 감성의 세계로 변신”이라고 지적하면서, “기하학적 이미지가 주는 차가운 이지적 세계로부터 따듯한 체온이 감도는 감성적 세계로 이행”이라고 말한다.
또한 그의 작품을 “화면은 화면일 뿐이다”라는 초기 연작에 나타난 서구적 논리주의와 달리 “화면은 화면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전일주의”(김복영 평론) 부각을 지적하면서 새롭게 해석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의 조형적 변화에 관하여는 “단조로움 속에 역동성, 자유로움, 부드러움, 잔잔하고 몽환적. 해맑은 파스텔 톤의 색채, 저녁노을의 색조” 등으로 설명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공감과 좋은 평가를 이끌어 내었다.
2년 만에 갖는 이번 개인전은 2000년 8월 전시의 연장선상에 있다. 10여 년 전부터 변하기 시작한 형태의 <동시성>에서 벗어난 작가는 색채(色彩)와 빛(光線)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 초기 <동시성>은 차가운 이성의 기하학적 추상이 추구하였던 ‘질서의 미(美)’라면, ‘90년대부터 변하기 시작한 후기 <동시성>은 따듯한 감성의 표현으로 감추어진 회화적 구성에서 벗어난,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세계의 탐구이다.
여기서 전기와 달리 후기 동시성의 특성으로 가장 많이 언급되는 것은 색채와 빛이다. 형태의 엄격한 구성이나 구조의 틀에서 벗어난 색채는 곧 하나의 빛처럼 강조되면서 놀라운 변화를 갖는다. 이제 그의 화면은 예리한 사각형 대신 부드러운 색으로 가득 찬다. 대부분 연한 미색과 회색, 그리고 밝은 연노랑이나 보라, 청회색 등이다. 이러한 색은 너무 부드러워 몽환적인 느낌마저 준다. 특히 사각형의 색면(色面)은 경계를 나타내는 선들이 없다. 형태가 없는 색의 덩어리, 또는 색의 공간이 형성되면서 감상자의 시각을 사로잡는다. 보는 사람의 마음을 화면 깊숙이 끌어들이는 사색의 공간이 색채에 의해 만들어진다.
해맑은 색으로 가득 찬 화면은 마치 투명한 필터를 투과한 저녁노을처럼 빛나고 있다. 맑은 날 저녁노을을 무엇보다 좋아한다는 작가는 “과거의 그림에는 사각과 모서리의 차가운 느낌이 강하였으나, 이번 작품엔 모서리를 없애고, 색채도 온화한 빛의 색조로 저녁노을처럼 나타내고자 하였다.”라고 말한다.
이러한 그의 변화는 조형적 이론보다는 회화에 대한 직관, 또는 감성을 통해 이루어진다. 초기부터 사용하였던 <동시성>이라는 제목을 버리지 않고 계속 사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작품은 “회화의 순수성”을 여전히 주장하면서 이지적 형태의 파괴와 감성적 색을 강조하는 “색채의 향연“으로 새로운 자신을 표현하고 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후기 <동시성>의 변화에서 작가는 회화, 그 자체를 중요시한다는 모더니즘 의미 확산과 내면의 정신적 표현을 강조하면서 색채와 빛을 다루고 있다.
20세기 현대미술에서 회화는 자기 확인의 결과인 ‘추상’을 탄생시키면서 회화의 본질인 평면성을 해결하였다. 즉, 그림은 자연의 모방이나 재현이 아닌 작가의 내면세계와 사물의 본질을 담는 것으로 사진처럼 복제시키는 것이 아닌 ‘추상’이며, 동시에 그려진 사각형은 단순한 사각형이 아닌 ”대상의 존재, 혹은 부재“를 의미하게 된다. 초기부터 일관되게 보여준 서승원의 사각형은 공간과 시간이 담긴 <동시성>에 초점을 맞춰 20년 가까이 작업하였던 것이다.
이제 그는 좀더 자유롭게 회화를 해석하고 있다. 대상의 존재 유무를 따지거나, 시간과 공간의 동시성 탐구만이 아니다. 더욱이 그는 단순한 사각형 속의 사각형을 고집하는 것이 아니라 그 틀을 파괴하면서 좀 더 큰 우주와 자연, 그리고 인간의 감성을 그리고 있다. 자연과 인간과의 대화를 생각하는 작가는 과거의 주제를 좀 더 명확하게 하면서 “인간적인 회화”로 복귀시키고자 한다. 아직 그의 그림에 구체적 형상이나 이미지는 없다. 그러나 경계가 없는 색과 색면, 그리고 그 사이에 존재하는 공간은 사색과 명상의 공간을 만들며, 부드럽고 따듯한 색들이 이곳에서 향연을 베풀곤 한다.
근작의 특성에서 언급된 색채는 이처럼 “색(色)의 소리”라고 할 수 있다. 작가의 말처럼 화면은 깊은 산사(山寺)의 처마에 매달린 풍경소리와 아련히 들리는 종소리, 바람소리를 색채로 나타낸 것이다. 시각화된 소리의 아름다움은 부드럽고 따듯한 색으로 작가만의 고유한 성격에서 만들어진다. 그의 곱고 부드러운 색채는 결코 나약하지 않다. 은근함과 끈기의 부드러움이다. 마치 꽃의 향기처럼 퍼지는 색채는 눈에 보이지 않는 향기를 가지고 감상자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다.
색의 향연에서 그 향기와 소리는 사색의 공간을 형성한다. 색의 공간은 산수화의 여백과 달리 생각하게 하는 정신적 장소이다. 서로의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경계선 없는 색과 색면 사이의 공간을 비롯하여 사각의 수직적, 또는 수평적 색의 면은 사색 공간인 동시에 명상의 공간으로 바뀐다. 은둔자와 같은 작가의 무심(無心)은 이러한 공간에 담겨지고 있다. 그야말로 욕심 없는 사색 공간으로 변화이다. 마치 텅 빈 공간처럼 보이는 파스텔 톤의 부드러운 색채는 절대적 공간으로 명상의 세계를 안내한다. 작품 앞에서 우리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색의 공간에서 명상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자연의 겉모습이나 단순한 대상이 아닌 내면세계의 탐구로 현대회화의 올바른 향방에 결정적 역할을 할 수 있다.
서승원의 변화된 근작 <동시성(同時性)>은 결국 단순한 자연의 아름다움을 그린 풍경도 아니며, 기하학적 추상이라는 규범에 사로잡힌 구성이나 “질서의 미” 만이 아닌, 그야말로 자유로운 회화적 표현으로 인간의 내면을 추구하는 오늘날의 작업이다. 단순한 추상 형태와 절제된 모노크롬 색으로 풍부한 감성이 잘 나타난다. 단색조의 부드럽고 따듯한 색은 빛이 되고 있다. 아울러 모더니즘 이론의 새로운 해석과 표현을 통한 작가의 고유한 성격이 돋보인다. 이처럼 그의 근작은 “이지적 세계와 함께 감성적 세계”를 동시에 담는 것으로 이번 개인전에서 보여주는 <동시성(同時性)> 역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사각의 색면(色面)들을 통해 “색채의 향연”이 전개되고, “사색과 명상의 공간”이 탄생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