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페어-이호철
그림의 안과 바깥
서성록(미술평른가)
이호철은 출발부터 자기의 언어를 일관성 있게 캐묻고 발효시켜 온 작가 중 한명 이다. 한 눈 팔 겨를 없이 오로지 형상회화의 가능성을 열어 보이는데 열중해왔으며, 그런 노력의 씨앗은 지금까지 열린 네 차례의 개인전과 각종단체전, 기획전을 통하여 줄기차게 뿌려지고, 그리하여 자신만의 회화적 바탕을 한탄하게 다져왔다.
그의 작업의 착상은 아마도 회화의 기본 인습 체계인 ‘그리기’ 문제에 대해 고심하면서 얻어진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하여 도달한 것이 시각이미지의 기계적 재현이라는 것 이다. 이를 통해 작가는 현대인의 물량화된 실존, 틀에 박힌 삶의 패턴, 이제는 통증 조차 느끼지 못하는 내면 상황을 대단히 객관적이고도 과학적인 입장에서 진술해 왔다. 그러한 체계적인 작업은 계급적 세계관, 그 세계관의 가치적 우위를 앞세운 리얼리즘보다 한 단계 발전된 수준의 것이었고 그만큼 설득력을 갖기에 충분한 것 이었다. 거창한 슬러건을 표방하기 보다는 작지만 섬세하며 부드럽지만 더 이상 외면하기 힘든 문제를 능숙하게 소화해 내면서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자신의 작업에 대해 동의를 받아 내는 결실을 내기도 했다.
이호철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한편의 일기를 읽는 듯한 느낌을 갖는다. 실상 그의 그림은 삶의 주체인 인간과, 그 주위를 에워싸는 기물 따위가 두런두런 모여 일상의 사실들을 차근차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차분한 진술을 통하여 작가는 자신의 속마음을 서서히, 그리고 속속들이 공개하기 시작한다.
이호철의 일기의 첫 장은 언제나 신변이야기로부터 출발한다. 그래서 단골소재로 등장하는 것도 물상의 세계에 속한 것들이 대부분이다. (물론 이전에 인물을 등장 시킨 적이 있지만 넓은 의미에서 보아 물상의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았다. 인물 역시 객체의 한 요소로 취급되었음을 말해주는 사례에 다름 아니다.) 식탁, 안경, 노트북, 커피, 볼펜, 의자, 서랍, 넥타이, 옷가지들, 장갑, 모자, 축음기, 시계, 가방 등 그의 물상의 세계는 정적과 고요를 동반하면서 고장난 시계처럼 멈추어져 있다. 이렇게 물상이 제시되고, 물상끼리 연관을 맺으면 우리의 상상력을 발동시켜 연상의 단계로 진입한다.
흡사 주인 없는 집안에 들어 싫을 때의 야릇한 기분이랄까, 뒤엉킨 기물을 통해서는 꿈속에서나 볼 수 있음 직한 가상의 이야기가 낯설게 꾸며진다. 여느 공간과 동일하지만, 매일 만나는 것 들을 생소하게 만들고 또 새롭게 인식하게 한다. 쳇바퀴 돌 듯 일상에서 권태를 느끼지만 그 굴레로부터 벗어나기 힘든 우리로서는 숨통이 확 트이는 것 같은 짜릿함을 건네준다.
그 묘미는 과연 어디에서 발생 하는 걸까? 그것은 그의 그림의 독특한 연출방식에서 한 가닥 단서를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보다시피 그의 물상의 세계는 일상적 소재로 쥐어지지만, 물상만을 표상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역설적이지만 물상 또는 기물을 토대로 일상 바깥의 세계를 넘나들고자 하는 듯이 보인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비합리적 연출이 작품 형성의 계기로, 다시 말하면 그의 작품을 주도하는 핵심적 요소로 자리잡고 있다.
허공을 부유하는 모자, 빗자루, 장갑, 넥타이, 타원형의 시계 등이 그러하고 열려진 서랍 속에는 그 서랍보다 몸체가 큰 물건이 들어있다. 뿐만 아니라 반쯤 열린 서랍에는 예상치 못한 스팩타클이 전개되고 있다. 둥실 떠다니는 하늘, 아득한 철로(鐵路), 아스라이 내다보이는 들판, 그러한 광경은 비단서랍에 만들어있는 것이 아니다. 장갑의 끄트머리, 푸른색의 모자, 거울속, 그리고 네모꼴의 주사위에 대롱거리며 매달려 있다.
일상에 유의하고 있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일상에서 벗어남을 강조하고 있는 셈인데, 여기서 우리는 그의 일상의 등장이자 무궁한 자유의 세계로 들어가기 위한 일종의 유인 장치로 기용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온전한 것과 돌발적인 것, 일상적인 것과 상상적인 것, 의식 세계와 무의식 세계, 합리와 비합리를 각자 충돌시키고 그 충돌의 갈등을 더욱 고조시켜 궁극적으로는 꿈꿀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해가는 것이다.
이호철이 목적하는 자유로움의 구가가 작업의 총론에 해당한다면, 그것을 구체화시키는 방안의 하나로 선택된 기법은 ‘들쳐보기’ 라 할 수 있다. 이때 들쳐보기란 포장된 소포물을 받았을 때, 그 안의 내용물이 뭐가 들었을까 호기심이 생길 때와 같은 상황 또는 연극의 막이 올려 지기 직전 무대 뒤에 대한 궁금증이 일어날 때와 비교할 수 있으리라. 말하자면 아직 알려지지 않은 세계에 대한 기대심리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서랍 안의 들여다보기, 그러나 아직 더 많은 서랍이 닫혀 있고, 설사 열려져 있다 해도 그 서랍 안쪽은 우리의 시선과 반대로 위치해 있거나 조금만 보이도록 설정되어 있어 호기심을 부추기도록 안내하고 있다. 들쳐보기는 서랍에만 나타나는 한 징후로 만이 아니라, 전체적 징후로 작용하고 있는 듯이 보인다. 어느 개인의 빈집 풍경을 펼쳐 보이고 있는 자체가 – 그것도 대단히 치밀한 세필 묘사로 – 들쳐보기의 현저한 표식이 되어 주어 있다. 막상 그 안을 들여다보면 신비감은 떨어지나, 그림자로 처리된 창문, 차양막, 내부 구조 등 암시적 장치를 통하여 어떤 식으로든 두루 꿰뚫어봐야만 직성이 풀리는 우리의 생득적(生得的) 확인 심리를 교묘히 이용하고 있다.
근래 이호철의 작업은 액틀에 대한 해석으로까지 촉수를 떨쳐나가고 있다. 그의 그림은 액틀을 필요로 하지 않는 그림이다. 이미 그의 그림은 액틀을 포함하고 있기 때문인데, ‘그려진 액틀’ 이란 말로 이 같은 양상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보면, 그 액틀은 단순히 액틀이기 전에 그림에 중핵적 요소로 부각된다. 그런 측면에서는 액틀은 보조물 이라기보다는 확대된 바탕, 즉 그림의 의미 내용을 강화하는 항목으로 기능한다고 볼 수 있다.
아닌게 아니라 네모꼴의 모양도 근래에 올수록 훨씬 다양해지고 있거니와 액틀의 고정관념을 아예 벗어나 ‘변형된 캔버스’로 까지 적극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이러한 틀에 대한주목, 해석을 필요로 하는 이유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 그것은 그림 ‘안’ 과 ‘밖’ 의 경계의 붕괴로 설명할 수 있을지 모른다. 만일 그가 지금까지 기대치로만 설정해 둔 비상의 자유를 그림 안에서 추구했다면 이제는 희망을 실현할 한 방안으로 그림의 울타리를 넘어, 실재 세계로 그 범주를 넓히겠다는 야심에 찬 의도로 읽혀진다. 그 회화적 장치가 다름아닌 ‘틀깨기’ 이자 현실 공간에로의 비약인 셈이다. 그리하여 자유의 세계는 가상의 세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실제의 세계로 한걸음 더 나가는 진전을 이룩하게 된 셈이며, 이것을 다른 식으로 풀이하면, 그가 더 큰 작업과제와 씨름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