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그림 · 큰마음
작은그림 · 큰마음
5월 12일(화) ~ 5월 20일(수)
김태호 박훈성 이두식 이석주 이수동
이왈종 장이규 전광영 한만영 황주리
보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림 사는 일도 같다.
임창섭(미술평론가)
화랑들 사이에 ‘그림은 돈 있다고 사는 것이 아니라, 눈이 있어야 산다.’라는 우스개가 있다. 미국 로스앤젤리스 말리부에 ‘폴 게티 미술관’(J. Paul Getty Museum)을 세운 ‘폴 게티’는 비슷한 주장을 ‘20세기 야만인들은 예술을 감상하고 사랑하는 방법을 습득하지 않고서는 개화되고 문명화될 수 없다’라고 과장해서 말했다. 아무리 큰 다이아몬드 광석이 길바닥에 굴러다녀도 볼 줄 모르면 돌처럼 본다. 그것을 한 번도 본 적도 없는 사람이 “이건 다이아몬드야!” 하면서 덥석 줍는 일은 없다. 즉 그림을 보는 일을 누구나 할 수 있지만, 그림을 사는 일은 경제적인 여유가 있다고 누구나 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눈이 있고 미를 즐길 줄 아는 마음이 있어야 산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림을 보는 것과 사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서 그림에서 자신만의 삶의 의미와 우리의 아름다운 공통미(共通美)를 찾을 수 있도록 하는 전시가 노화랑에서 열린다. 이런 의미 찾기는 누구나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지극히 당연하고 적극적인 문화 활동이라는 사실을 노화랑에서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작은그림·큰마음》이라는 제목으로 6년 째 매년 봄에 개최되는 이 전시는 우리 미술계에서는 적극적 문화행위를 의도한 몇 안 되는 기획이다. 전시를 시작하는 첫날에는 열성적인 콜렉터들이 이른 아침부터 줄을 섰을 정도로 널리 알려진 전시인 것도 그렇고, 이미 작품가격이 정해져 있어 작품구입을 원하는 감상자들에게 가격에 대한 불안감을 없앤 점도 다른 기획들과 차별된다. 올해는 ‘200만원으로 명품을 콜렉션할 수 있다’라는 부제를 달았다. 이 기획이 보여주고 있는 일차적인 의미는 미술작품은 엄청나게 비싸다는 일반인들의 막연한 의식을 한 순간에 불식시키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작품을 출품하는 작가들의 면면이 낮은 것도 아니다. 김태호, 박훈성, 이두식, 이석주, 이수동, 이왈종, 장이규, 전광영, 한만영, 황주리(이상 가나다 순)로 자신만의 개성적인 예술세계를 구축한 작가들이다. 이들의 평가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지만 참여 동기에 대하여서는 높이 평가하여야 한다. 왜냐하면 작가 입장에서는 큰 작품을 제작하는 열정이나 작은 작품을 제작하는 열정은 같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살 여지를 무릅쓰면서도 기꺼이 참여하는 이유는 미술이란 예술 장르가 사회에 가져야 하는 사명감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그 사명감이란 생활의 여유와 새로운 창조에 대한 감동을 작품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줌으로서 평범한 일상생활 속에서 삶의 목적과 의미를 반추하게 하는 역할이다. 예술의 이런 역할 때문에 수많은 미술관 박물관이 존재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선조들의 삶에 대한 역사를 보고 이해하고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작은그림·큰마음》이 가지는 이차적인 의미이자, 더 중요한 의미이다.
이런 기획전시를 마련한 이유는 여전히 우리사회에서는 그림을 사는 일에 익숙하지 않거나 혹은 색안경을 끼고 보려는 자세 때문이다.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런 자세는 옳지 않다. 동서양의 역사 속에는 자신의 미적취향을 적극적으로 만족시키기 위해 자신의 재산과 열정을 쏟아 부은 위대한 수집가들은 수 없이 많다. 일찍이 진시황제를 시작으로 해서 청의 건륭황제까지 중국에는 이런 예가 너무나 많다. 대만에 있는 고궁박물관이 그 증거의 하나이다. 프랑스의 루브르미술관을 비롯해서 서양의 많은 미술관도 이런 수집가들의 덕택에 세워졌다. 미술관 설립역사가 짧은 미국의 현대미술관(MOMA)은 록펠러(Abby Aldrich Rockefeller)와 블리스(Lilli P. Bliss), 설리반(Cornelius J. Sullivan)의 후원으로 휘트니미술관(Whitney Museum of American Art)은 휘트니(Gertrude V. Whitney)가 설립했고, 구겐하임미술관(The Solomon R. Guggenheim Museum)은 설립자 이름이 그대로 미술관 이름이 되었다.
우리나라도 이런 예는 많다. 성북동에 자리잡은 간송미술관은 간송 전형필(澗松 全鎣弼, 1906∼1962)이 설립했다. 그는 ‘청자운학문매병’을 비롯해 수많은 우리나라 미술품을 수집했다. 뿐만 아니라 구입당시 1만1천원 거금을 들여 ‘훈민정음’을 구입하여 간직한 일은 세종대왕이 만든 한글의 창제원리를 정확하게 알 수 있게 한 귀한 문화적 행위였다. 만약 간송의 이런 역할이 없었다면 한글 창제의 원리는 갖가지 이설로 난무했을 것이고, 아름다운 우리의 미술문화 유산은 지금보다 훨씬 더 많이 일본에 남아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문화적 행위들 즉 그림 사는 일이 원대한 뜻을 가지고 있고, 경제적으로도 넉넉한 사람만이 하는 일은 절대 아니다. 어릴 적, 시골 할아버지 집에는 작은 난초 그림이 천장 아래 매달려 있었다. 서울 변두리에 살았던 우리집 작은 단칸방 벽에도 그림이 걸려 있었다. 그림을 구입하고 벽에 거는 일은 특권이 아니라, 생활의 소소한 기쁨과 자신의 감성을 드러내는 일상적이며 문화적 행위인 것이다. 그런데도 봄이 되면 꽃구경 가는 일을 어느덧 하나의 유희문화로 치부하지만, 삶의 적극적 문화행위로 예술을 즐기고 향유하는 일에 우리사회는 도통 관심을 유도하지 않는다. 이제는 소극적이고 소모적 문화행위가 아니라, 적극적이고 축적되는 문화행위를 즐기는 일을 해야 하고 또 그렇게 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21세기에 우리는 노는 수준을 높여서 진정으로 문화의 세기에 살고 있음을 증명해야 한다.
우리들 선조만큼 노는 수준이 높았던 민족은 없다. 조선의 선비들은 풍류(風流)를 알았고 그 풍류라는 것은 속되지 않고 우아하고 멋스러운 정취를 말하는 것이었다. 풍류사상은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즐겁게 사는 삶을 위해 그림과 글과 그리고 음악을 배우고 자연과 더불어 기상을 키워나가는 일로 신라의 화랑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이런 정신이 조선시대까지 이어져 선비정신과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마음이 결합하여 풍류사상으로 발전한 것이다. 자신이 처한 어려움에 굴하지 않고, 풍류를 알면서도 선비의 고고한 자세를 버리지 않았던 추사 김정희(秋史 金正喜, 1786~1856)의 ‘세한도’(歲寒圖)는 이런 사상을 엿볼 수 있는 명화이다. 옛날 선비들은 놀아도 정말 수준 있게 놀았다.
수준 있게 놀려면 배워야 하고, 배워야 잘 놀 수 있다. 시조 한 수를 읊는데도 법이 있고, 춤추는 발걸음 순서도 알아야 하고 손동작도 절도가 있음을 배워야 한다. 거문고를 타는 것도 당연히 배워야 하지만, 듣는 것도 배워야 한다. 그림 보는 것도 배워야 하고 사는 것도 배우고 경험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림은 눈으로 사는 것이고 마음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그림을 사랑하고 그것을 수집할만한 안목을 갖춘 사람이 그림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멀리 내다보면 그만큼 그림 사는 일은 자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후세에게 훌륭한 문화적 자산을 남겨 주는 일이다. 그래서 우리들의 인생을 풍요롭게 한다는 것을 안다면 누구나 이런 문화적 행위를 실천해야만 한다. 다시 말하면 그림을 사는 아름다운 마음을 사랑하는 실천행위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