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자, 한국미의 새로운 가능성
시간이 개입된, Process로서의 빛깔구조
Ⅰ
<백자, 한국미의 새로운 가능성>전은 국제사회에서 최근 몇 년간 한국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대단히 고조되고 있음을 전제하고 있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의 정서가 짙게 밴 미술품들이 국제적인 경매에서 높은 예술성을 인정 받고 있음을 반영한 것이다. 특히 한국공예미술의 정수인 백자는 동과 서를 초월하여 깊은 관심과 연구의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이전시회는 이러한 관심의 반영은 물론이며, 백자가 단순한 고미술품이 아닌 우리의 정서를 담아낸 조형예술의 현대적 가능성임을 점검해보는 귀중한 기획이다. 이번에 출품된 백자는 조선백자의 여러 경향-白磁(純白磁), 靑華백자, 백자象嵌, 백자鐵畵文(石間殊文백자), 백자辰砂文, 黑釉, 鐵彩, 鐵砂釉-중에서 특히 순백자 항아리에 주목한 것이며 이점은 백자중에서도 순백자가 가지는 함축성 있는 의미를 주의 깊게 관찰해보자는 의미가 있으며 “색과 형태의 관계”를 통해서 우리민족의 조형적 표현의 특징을 규명해 보고자 함이다. 백자는 기능적으로는 항아리이다. 그러나 백자는 무엇을 담는 기능뿐만 아니라, 그 형태가 주는 무한한 가능성 때문에 지금까지도 앞으로도 조형예술의 미학적 요소에 당당한 위치를 점하게 될 것이다. 백자는 일반적인 쟝르 구분상 공예미술에 속하나, 여기서의 공예는 단어상의 의미뿐만 아니라, 시대와 함께 해온 역사적인 의미를 첨가할 수 있으며, 생활 속의 정서를 담아내는 은유적 의미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역사적인 의미라는 것은 백자가 발달한 시기만을 생각할 때는 조선시대로 국한해서 볼 수 있지만, 토기의 생산을 출발로 해서 삼국시대의 유리공예, 칠보공예 그리고 고려시대의 청자를 거처 분청자와 백자에 이르는 한민족의 역사와 함께 해왔다는 것이며 우리민족의 생활과 밀착되어, 거기서 우러나오는 “마음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Ⅱ
인간에게는 어떤 이상을 향한 염원이 있을 수 있고, 그 한 가운데는 인간의 내면 속에 잠재되 있는 추억과 함께, 자연과 더불어 체득되어진 대지로부터의 영향이 하나의 정서로서, 또는 전통으로서 내재할 수 있다. 이것을 우리는 민족의정서라고 부르기도 하며, 이러한 외부 세계상의 여러 구성요소가 우리들의 내적 작업장에서 형성되어질 수 있다는 것이며, 이 과정은 끊임없이 생성하고 소멸되어지는 과정일 뿐이며, 그 형성의 방법과 단계는 매우 다양하고 소재 역시 시시각각으로 새롭게 투영되기 때문에 확고 불변한 형태로 고정된 것은 없다. 감각과 감정, 그리고 표상이 오고 가며 모였다가 흩어지는 상태라 할 수 있으며 끊임없이 형성되고 또 그 형상이 변화하는 끊이지 않는 흐름인 것이다. 열려진 예감으로 충만한 상태, 있음과 없음의 공존상태에서 나타난 질서가 구체적인 구조를 가질 때 어떤 기반을 가능케 하는데, 우리는 이러한 기반을 백자의 형태 속에서 발견하고 만나게 되며 이러한 일반적인 결정화의 과정을 통하여 확고하게 만들어진 形과 사실에 조금도 영향을 받지 않는 감각 사이를 진동하는 것이다. 이때 우리의 감정은 여러 가지를 불러모아서 각각의 사연을 생각하고 한가지 형태를 통해서 많은 가능성을 찾아내곤 한다. 우리는 이러한 형태를 취하여 정신의 아주 미세한 부분을 찾아내려고 하고 있으며, 측정할 수 없는 정신적인 영역을 만나게 된다. 따라서 우리는 백자라고 하는 어떤 형태를 통하여 감성의 다리를 놓고, 정신적인 개념의 영역에 건너가려 하고 있다.
백자가 담는다는 구체적인 기능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오직 자기 본래의 의미만을 고집하지 않는 그러한 모습으로 나타나, 자신과는 별개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초월한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그 모습에 다른 사물의 모습이 연상작용에 의해 결합되고 있기 때문이며, 어떠한 지각도 감각적인 경로를 통하여 우리들의 의식에 도달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백자는 단순한 형태가 아니다. 상식적인 관점으로 볼 때 항아리의 형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무엇인가를 담는다는 기능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백자는 담는다는 기능을 전제로 하되, 그 기능을 뛰어넘어 완전한 형태로서 조형적 형식을 가지고 있다. 이 조형적 형식은 빛깔과 형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때의 형태는 둥글다는 조형적 특징을 가지면서 완벽한 원과는 구별되는 “不整形의 둥근”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느끼게 한다. 이 가능성 또한 인위적인 계산을 뛰어 넘어 무심한 경지에서 욕심 없이 “만들어진 것”이기에 두 번 다시 반복할 수 없는 일회적 사건이 되고 있다. 이 가능성은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형식을 빌려서 보이지는 않는 마음의 세계를 연결시키는 매개자가 되고 있으며, 어떤 형태를 표현하려는 초보적 단계를 지나서 인간의 의식을 담아내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인위적인 조형에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조형으로 발전되고 있으며, 이때 나타난 자연스러운 선으로서의 조형적 형식은 의도적인 표현이 가질 수 있는 딱딱함과 교활을 극복하고 가식 없는 순진한 특징을 나타내고 있다. 이때 형성되는 선은 인간의 생각이나 능력으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을 것 같은 풍만함을 가지되, 또한 넘치지 않는 “절제된 아낌”이 하나의 제동이 되어 매우 담담한 무심의 정신을 표현하고 있으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소위 중용의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없음이 아닌, 가난함이 아닌, 넘치되 절제하고 격조 있는 품격의 자세로서의 형태가 백자가 품기는 형태적 형식인 것이다. 무엇을 담는다는 기능의 출발에서 인간의 마음을 담아내고 표현하는 예술적 측면으로까지 연결되는 백자의 형식적 가능성은 표현만을 강조하는, 개념만을 강조하는, 현대미술의 경향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상반되는 형식을 가지면서도 그 힘의 저력은 무한하기만 하다.
인간은 자기를 표현하는 언어에 대해서 여러 가지 통로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언어는 하나의 표현운동의 형태나 동작이라고 볼 수 있으며, 사고체계에 의해서 구체적인 형식을 가지게 되는데, 이러한 과정 중에 여러 가지 결과물들을 남기게 된다. 이러한 경우 표현운동의 형태나 동작은 그러한 표현에 좌우되지 않고 그 표현에 앞서 존재하는 그 무엇인가가 있으며, 그 무엇은 그 표현에 의하여 전달되어야 할 내용이 있다는 점이다. 곧 무엇인가의 형태로서, 우리의 정신에 포함될 수 있는 것이 표현되고 전달되어질 수 있다고 가정할 때, 정신적인 것은 독립적인 것으로 이루어지는 내용과 함께, 형태로 읽혀지는 표현들을 우리의 신체를 이용하여 만들 수 있다. 그러나 내면의 내용이 그 마지막 단계에서 신체적 과정으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이미 신체의 과정 중에 나타나 있다. 따라서 표현활동은 정신적인 것으로부터 출발한 내용을 신체를 통하여 표현하게 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정신과 신체가 동등한 상태에 있는 과정이며, 표현이라는 것도 이러한 측면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따라서 표현활동은 단순히 정신적인 산물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이 하나의 형태로 전개 되어질 수 있는 과정이라고 생각할 수 있으니, 백자의 세계는 이러한 과정을 전제로 한 평형의 상태임을 지적할 수 있다. 백자의 흰색은 백자의 형태와 더불어 백자의 특징을 나타내는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여기서의 흰색은 색이 아닌 정신적인 빛깔로 상기될 수 있으며, 이 빛깔은 다시 가시적인 색으로 환원되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백자의 白은 오히려 무한한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는 玄으로서의 黑을 연상하기로 한다. 여기서의 玄은 동양의 우주관과 관계 지을 수 있으며 이 玄은 다양하고 끝없는 가능성에 대한 추상적 개념이며, 이 추상적 개념으로서의 玄은 그 결과로서의 白을 연상시켜서, 白은 오히려 단순한 색이 아닌 무한가능태의 출발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따라서 백자의 빛깔은 가능성과 더불어 새로운 상상력을 일깨우는 초현실적인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백자의 빛깔은 우리의 잃어버린, 마음속에 잠재해 있는 많은 색들이 하나의 여과과정을 거쳐 다른 차원의 빛으로 우려내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속살이 비칠 것 같은 착각과 시리듯 한 고움이 보는 이로 하여금 많은 사연을 연상시키기도 하고 어린 시절의 추억을 불러내기도 한다. 이러한 개인적인 체험과 더불어 만들어진 빛깔들은 또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으니, 이것이 바로 역사는 문화에 대한 반영으로서의 형식이라는 것이다. 이들 삶의 이야기들, 그리고 우리산야와 계절로부터 깊은 반영이 있어 왔음을 의미하며, 프리즘을 통과해서 나온 광학적인 빛의 결합이 아닌, 인간의 삶의 터전인 “대지로부터” 의 관련을 의미한다. 한 인간이 태어나고 자라서 환경을 통해서 많은 경험을 거친 후에 비로소 하나의 개성을 가지게 되는 것처럼 “시간이라는 힘이 개입된 Process로서의 빛깔구조”인 것이다. 이것은 다시 말해 끈질긴 생명력의 발현이자 시간의 개입이라는, 인간과 절대자인 자연과의 관계 속에 형성된 하나의 결정인 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고대로부터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인간들의 응전에 관한 공통점의 확인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자의 그릇으로서의 물리적인 효용성을 인정하되 사물의 단순한 모습이 아닌 한 인간의 절규로서의 반영임을 주목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문화가 그 시대의 인간적인 다양한 삶들을 관련 지으면서 형성되어 짐을 전제할 때, 백자는 단순한 기능으로서의 용기가 아니라 부산하지도 않고 욕심부리지도 않은 한 인간의 고백과도 같다.
김용대 ㅣ 호암미술관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