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ew Image Painting
새로운 ‘환영 (illusion)’을 찾아
– 구보경, 정주영, 박민준, 박소영 –
유재길|홍익대교수·미술비평
현대미술의 다양한 표현과 개념들, 그리고 양식의 변화는 극에 달한 느낌이다. 어느 하나 주류가 되지 못하고 있다. 또한 문제점으로 지적된 아방가르드 미술이 소수를 위한 작업으로 그친 것에 대해 반성을 토론하고, 전통 회귀 현상도 나타나기 시작한다. 점차 모더니즘 이후 회화는 종말론에서 벗어나 새로운 이미지 추구로 변화를 갖기도 한다. 그러한 가운데 최근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회화에서 ‘환영(illusion)’의 문제이다. 일류전이라고 하는 환영은 서양미술사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루어 왔다.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예술이란 자연의 모방이라고 하면서, 사물과 닮게 그리려는 ‘모방론(mimesis)’은 일종의 일류전 추구였다. 미술가들은 대상의 닮음과 이상화를 목표로 일류전은 20세기 추상이 등장하기 전까지 가장 중요한 조형언어가 되었다.
조형예술에서 실물과 같이 보이려는 일류전의 회화적 표현은 시대와 장소에 따라 변하고 있으나, 미술사에서는 일반적으로 다음과 같이 3단계 변화로 설명한다. 첫 번째 단계는 필요에 따라 만들어지는 아르카익 이미지(형상) 탄생이며, 두 번째는 이상적 형상으로 최고의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고전 양식, 마지막으로 과잉과 빠진 변형된 형태로 쇠퇴의 의미를 갖는다. 이러한 일류전의 단계적 변화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어느 시대나 장소에도 적용될 수 있다. 초기 형태는 엄격하고 고풍스런 의미의 아르카익 양식으로 설명되고, 황금기가 되는 클래식 양식, 절정기를 지난 쇠퇴기에서는 규범에서 벗어난 비례와 균형, 그리고 마니에리즘과 같은 왜곡된 형태를 단계별로 읽게 된다.
20세기 모더니즘 미술은 과거와 다른 형태의 양식적 분류가 이루어진다. 특히 미술에서 일류전은 파괴의 대상이었으며, 불필요한 존재로 형태의 아르카익과 클래식, 변형된 모습은 찾기 힘들다. 현대미술은 일류전이라는 ‘환영’을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환영’을 없애므로 대상의 진실에 접근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갖기 시작한다. 화가들은 가능한 이미지를 거부한다. 이미지로 나타나는 일류전은 회화에 부적합한 요소일 뿐만 아니라 혐오의 대상이 되었다. 이후 화가들은 구체적 대상의 모방에서 벗어난다. 대부분의 모더니스트는 자연의 모방이 아닌, 추상이라는 반(反) 형상 작업에 앞장서는 것이다. 이후 형상이 없는 순수의 색채와 점, 선, 면의 형태는 미니멀리즘과 개념미술에 이른다. 아무 것도 그려지지 않고, 형상이 없는 것이 만들어지면서 모더니즘 미술의 종착점을 논하게 된다.
그러나 후기 모더니즘으로 언급되는 오늘날 ‘환영’은 단순한 이미지 재생이나 파괴의 대상이 아니라 개개인의 의식 표현으로 새롭게 등장하기 시작한다. 이제 회화는 과거의 착시효과와 모방적 형태가 아닌 자기표현의 수단으로 일류전이 등장한다. 이는 타자와의 교감으로 나타나고, 환상적 리얼리티라는 새로운 양식을 만들어내고 있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들며 환상의 세계를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때로 과거의 작품들을 모방하는 패러디 기법이나 차용하는 수법으로 일류전이 자연스럽게 나타난다.
특히 일류전에 관한 젊은 작가들의 실험적 표현은 평면과 입체 등 공간과 장르의 영역을 넓혀 나간다. 이들이 구축한 일류전은 대상의 실체를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환상적 분위기를 연출한다. 작가 자신의 체험을 바탕으로 현실과 묘한 대비를 이루는 허구적 상황을 동시에 보여주며, 사물의 형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형상을 통한 서술적 묘사가 다시 시대적 표현으로 등장하고, 작가 자신의 사고를 삽입시키는 새로운 모험이 이루어지고 있다. 진정한 사물의 근원을 찾고, 삶의 표정을 있는 그대로 묘사하려는 진솔한 ‘환영’이 신선한 충격을 주는 것이다.
최근 한국 현대미술에서도 ‘일류전(환영)’ 등장은 많은 화제가 되고 있다. 환상적 리얼리즘이라고 할 수 있는 이들의 작업은 회화와 입체 등 다양하게 나타난다. 특히 주목받는 작가들로 풍경과 인물, 신화를 그린 회화 작업으로 구보경과 정주영, 박민준을 비롯하여 오브제와 설치작업의 박소영 등이 있다. 평범한 소재와 일상적 이야기를 환상적 리얼리티와 독특한 개념이 돋보이는 작업을 한다. 또한 풍경과 인물, 명작의 모방과 일상적 소재의 섬세한 묘사와 패러디 작업이 관심을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작품에 나타난 일상적 풍경과 삶이 자아가 개입되어 환상적으로 묘사되고, 생명과 죽음, 신화의 내용이 공존하며, 때로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도 없다. 작가 개개인의 관념 세계는 구체적 형상으로 나타나고 감상자의 상상력을 풍부하게 만든다. 새로운 일류전을 추구하는 4명의 한국 작가들은 과거처럼 단순히 거울에 비친 자연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거울에 비친 마음을 실을 짜듯 하나하나 그려나가고 있다. 새로운 생명의 씨앗을 키우듯 소재들을 화면 가득 채워나가고 있다.
공통적으로 등장하는 이들의 평면과 공간에는 모더니스트들이 부정하였던 구체적 형상이 과감하게 등장한다. 물론 이들 작품에 나타난 형상은 과거의 사실성과 다르다. 대상은 때로 허구적이며, 패러디와 실제처럼 보이는 가상의 세계이다. 형상의 등장은 과거처럼 눈속임을 위한 작업이 아니다. 풍경화의 경우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풍경과 환상풍경이 혼합된 모습이다. 이처럼 과거와 다른 사물의 사실적 표현은 현실과 환상의 리얼리티로 해석할 수 있다. 종말을 고했던 이젤 페인팅의 새로운 돌파구가 엿보인다.
또한 독특한 점은 기술복제시대의 미디어 아트에 나타난 일류전 표현과 달리 이들은 기존의 캔버스에 유화와 아크릴, 그리고 견고한 볼륨의 조각처럼 손 작업에 의한 오브제 작품이 환상적 리얼리티로 자기자신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본 기획전은 새로운 환영을 찾는 <이미지-형상> 작업으로 구보경과 정주영, 박민준, 박소영 등 4명의 작가들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먼저 구보경의 경우 <비오는 풍경>을 통해 “자연의 환영”을 보여주고 잇다. 서정성이 넘치는 창밖의 풍경은 꽃과 나비, 새 등이 화려한 색채와 함께 아름답게 전개된다. 화면 전체는 흰색 점으로 나무와 풀잎, 꽃 등 풍경 전체가 덮여 있다. 안개 낀 듯한 묘한 분위기의 풍경이 현실이면서도 환상과 허구의 세계를 넘나들게 한다. 무수히 중첩된 흰색 점들이 작가의 행위성을 나타내기 보다 심리적 환영으로 자연의 황홀함을 느끼게 한다. 작가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비오는 날 자연의 지나친 뽐냄도 없으며, 사물이 있으되 조용하며, 서로의 소리를 갖지 않으므로 응시하고 있는 나를 사색으로 이끌어 간다.”
풍경을 소재로 하면서도 전혀 다른 풍경을 보여주는 작가로 정주영의 경우가 있다. 정주영은 자연에서 풍경을 찾지 않고 겸재 정선의 <산수화>에서 풍경을 찾는다. 과거 명작을 통한 패러디 작업으로 재해석된 허구적 자연 모색이다. 정선의 산수화를 실경이라고 한다면 패러디로 나타난 정주영의 풍경은 허상의 실경산수이다. 이는 현실에서 환상을 찾는 것과 같다. 자연의 풍경을 사실적으로 그린 실경산수와 달리 그의 대작들은 넓은 여백과 평면 공간으로 환상적 리얼리티가 더욱 부각되면서 감상자로 하여금 과거와 현재를 넘나드는 시간 여행을 계속한다.
또한 박민준은 서양 명작의 패러디와 신화, 그리고 현실의 인물이 겹쳐지면서 풍요로운 환영의 리얼리티 잔치가 펼쳐진다. 신화적 주제와 축소된 등장인물의 극사실 묘사를 비롯한 배경의 확대된 사물들은 매우 사실적으로 그려진다. 이는 상상의 세계를 현실로 끌어내리는 비현실적 풍경이다. 캔버스에 가득 찬 각양각색의 물건들과 인물은 신화와 현실의 주인공으로 허구적 작업이다. 그러한 허구성이 실제처럼 보이는 것은 인물과 대상이 사실적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가 일류전의 공간 속에서 생명감을 갖는다. 인물과 사물들이 서로 대화를 나누고 숨쉬는 모습이 기괴하기보다 정답게 느껴진다.
박소영의 경우는 회화보다 오브제 작업으로 환상적 리얼리티의 실제를 보여준다. 그는 개념적 드로잉과 오브제 설치작업을 통해 사물과 자신을 이야기하고 있다. 사실 그는 미적 개념보다 삶의 체험을 표현하고자 하며, 일상적 이야기를 개념미술로 만들어 보여주는 무대미술가 이다. 그것 역시 실상과 허상이 공간에서 동시에 이루어지는 환상적 리얼리티 작업이다. 모조 꽃잎이나 모조 나뭇잎으로 뒤덮인 화분과 벽들이 관객을 착각하게 한다. 일상의 기물이 환상으로 바뀌면서 주제와 객체가 혼돈에 빠진다. 그의 자연적 오브제 작품은 일상적 삶의 변화를 꾀하게 한다. 또한 표현의 부드러움과 화사함으로 조각적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의 작업은 환상과 현실 속에 진실 찾기 게임처럼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본 기획전에서는 구보경의 서정적 풍경과 정주영, 박민준의 패러디 회화, 그리고 박소영의 개념적 오브제들을 “새로운 환영(illusion)”으로 소개하고 있다. 개성이 뚜렷한 4명의 작가 작품에서 ‘환영(일류전)’이라는 공통분모를 찾고자 한다. 자연의 서정적 이미지와 산수화와 신화적 명화의 패러디, 일상의 개념적 오브제들이 서로 긴장감을 갖고 전시장을 메우고 있다. 규범이나 형식적 영역의 경계도 없이 재현되는 사실적 이미지들로 새로운 환영을 생각해 보는 것이다. 분명 이들이 만들어 내는 환상적 일류전은 모더니즘 이후의 시대적 리얼리즘으로 해석될 수 있다.
이러한 “새로운 환영(幻影)”을 추구하는 작업에서는 주목하고자 하였던 것은 리얼리티와 패러디 양식이다. 이는 또 다른 환상적 표현으로 과거에 있었던 사실을 현재에 다시 확인하는 방법이다. 기술복제 시대에서 미술의 아우라(Aura)가 사라지면서 패러디 양식은 ‘환영’을 찾는 독특한 방법론이 되며, 이는 이미지의 단순한 복제나 재현이 아닌 자아실현의 수단으로 주목된다. 자연의 모방에서 시작된 일류전 추구가 현실성과 허구성, 개개인의 의식이 삽입되면서 이미지들이 새롭게 읽혀지고 있다.
결과적으로 본 전시에 참여한 4명의 작가를 비롯하여 이미지를 통한 일류전 추구의 작가들은 대상보다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는 주관적 시각의 리얼리티를 갖는다. 실물처럼 보이는 사실적 형상을 바탕으로 개체의 존재를 주관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들은 삶의 근원과 종말 등 무거운 주제도 직접적 체험을 통해 과감하게 접근하면서 비밀을 추적하듯 그려나간다. 우리에게 흥미와 관심을 갖게 하는 이유도 재미있는 그림이면서 무언가 찾아 나서는 강한 자아의식과 체험 과정이 돋보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환영을 찾는 작가들은 자기만의 성격이 분명한 자신을 만들고 있다. 여기서 “새로운 ‘환영(illusion)’ 찾는 젊은 작가 4명”의 독특한 환상적 리얼리티를 확인하면서 우리 미래의 풍요로운 미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