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h Yong-Sun
서용선 회화양식의 특성
김혜련 I화가, 예술학박사
1. 회화공간의 구조
건축물에나 어울릴 듯한 ‘구조’라는 단어는 서용선 회화양식의 가장 중요한 특질 중 하나이다. 구도라는 단어가 다소 관학적 혹은 아카데미즘적 미술교육의 내용을 연상시킨다면 구조라는 단어는 이와는 차원이 다른, 어떤 내밀한 회화형식을 지시한다. 구도가 일반적으로 미술교육에서 전수해 줄 수 있는,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요소라고 한다면 구조는 화가가 오랜 기간 연구하고 스스로 터득해낸, 화면 속의 숨은 뼈대라고 하겠다. 다시 말해 사실적 재현작품에 외면적으로 드러나는 것이 구도라면 구상, 비구상의 구별을 뛰어넘어 화면의 긴장감과 공간감을 구성해내는 독자적 회화방식이 구조인 것이다. 따라서 마크 로드코의 색면 추상 속에도, 청전 이상범의 들녘 그림에도 구조는 숨어있는 것이다. 그런데 서용선의 회화작품에서 구조를 논하는 것은 위의 두 작품에 숨어있는 구조를! 논하는 것보다 용이한 듯이 보인다. 왜냐하면 서용선의 구상적 화면은 격자무늬, 폐쇄적 공간설정, 색면의 적극적인 개입, 기역자 니은자 같은 구축적인 공간분할 등, 비교적 명료한 방식으로 화면의 뼈대가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인물표현도 목판의 거친 칼자국처럼 투박한 선으로 엮어져 있고 입체감을 이루어내는 요소들도 감추어져 있기보다는 화면에서 드러나 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구조라는 개념을 서용선 작품론에서 특별히 강조해야하는 것은 이것이 회화에 있어 화면창조라는 원론적인 문제와 맞닿아있기 때문이다. 인습적으로 배워온 내용이 아닌 개성적인 공간설정을 회화에서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전통적인 원근법은 차지하고 사진 및 미디어를 통한 현대적 수단의 모든 이미지 모사방법도 거부하면서 구상적 공간을 독창적으로 재현할 수 있을까? 의식 없이 습득했던 회화방식들을 모두 버리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할 수 있을까? 더구나 동양화, 서양화를 구별시키는 우리의 현실 속에서, 서양의 아류가 아닌 회화를, 동양의 답습물이 아닌 회화 공간을 독자적으로 이루어낸다는 것이 어찌 간단할 수 있을까? 나는 1991년 발표된 <도시의 사람들> 연작과 <단종애사>연작에서부터 비로소 서용선 작품이 이러한 질문에 상응하는 조형적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작품들은 포토리얼리즘적인 이전 작품인 <소나무>(1984년작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와 현격히 구별되는, 비로소 ‘서용선 회화양식’이라는 표현이 하나의 고유명사화 되는, 그러한 지점을 이루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 즈음에 이르러 서용선의 회화작품은 의식 있는 국내 이론가들의 관심을 끌게 되었고 중요한 평론을 남기게 되었는바, 현시점까지 진행된 작품의 변화과정을 살펴보아도 구조라는 단어의 중요성은 결코 희석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 설정된 장면의 구도와는 별개로, 서용선의 화면내부는 공간표현에 대한 수많은 개별적인 실험들, 선이나 면으로 무게중심을 바꾸어나가는 과정, 색상대비로 화면의 긴장감을 일으키는 효과들, 견고한 토대 위에 단순화된 형상을 설정하는 즉각적인 판단력 등으로 매우 개성적인 구조를 이루어낸 것이다.
2. 색상의 결정적인 긴장감
서용선 과거 작품들이 소위 ‘현실인식’ 혹은 ‘역사인식’을 담고 있다는 점은 이미 발표된 다른 평론에서 비교적 자세히 설명되어 있다. 많은 ‘자화상’ 연작을 제작한 점도 위의 수식어들에 합당한, 화가로서 갖는 강렬한 소명의식과 관련이 깊다고 본다. 그러나 주제설정이 갖는 이러한 가치와는 별개로 나는 서용선 회화가 갖는 조형적 성과에 더 비중을 두고 싶다. 노산군 연작을 그린다고 모두 다 중요한 역사화가 되는 것은 아니며 지하철 역 거리의 사람들을 그린다고 모두 다 현실인식을 가진 좋은 작품이 되지는 않는다. 주제와 결합되어 화면에서 풀려지고 있는 조형적 특성이야말로 서용선 회화작품을 평가하는 중요한 관건이라고 본다. 푸석거리는 소외감이나, 실존을 견디어야 하는 불안감 등을 회화적으로 전이시키는 수단들, 이를테면 설익은 직선들의 교차, 원색의 조야함과 불안한 화면분할, 서사적 줄거리를 표현적으로 압축하는 양식 등이 그 대표적 조형적 특징이었다고 하겠다. 최근에 이루어진 작업으로서 이번 전시에 처음 공개될 작품들인 <남자의 초상>, <먹기>, <데스크의 얼굴> 등의 인물화를 보면 마치 어떤 개별적 회화양식이 하나의 정점을 향하고 있는 듯 뚜렷한 통일성을 보여주고 있다. 선과 색, 면과 붓터치가 긴밀한 결합관계를 이루고 있고, 화면들은 각각 빨강과 노랑, 파랑과 빨강, 연초록과 진분홍 등 강렬한 색채의 대비를 이루고 있지만 강한 색상을 선택함에 있어서도 마치 미세한 음색 차이도 확실히 잡아내는 듯한 뚜렷한 확신감이 느껴진다. 화가는 공장에서 만들어진 색상을 그대로 쓰기보다는 약간씩 색상의 변형을 이루기 때문에 원색대비 및 보색대비에 있어서도 그 구체적 색상선택의 경우 수는 사실 무한대이다.
또한 화가에겐 보통 습관적으로 선택하는 색상이 있기 마련인데 서용선의 최근 작품은 강렬한 색상대비조차도 미묘한 변이를 이루며 차별적인 효과를 이루어내어 전체적 색채 스펙트럼은 매우 풍부해졌다. 때로는 무안할 정도로 용감하며, 때로는 매우 선명한 고음과도 같이 결정적인 힘이 있고, 때로는 작열하는 햇볕에 정수리가 노출된 듯한 현기증 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강렬한 대비효과는 산만하거나 요란스럽게 진동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견고한 구조 덕에 자신의 팽팽한 긴장감을 안으로 묶어두는, 어떤 절제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전의 서용선 작품에서 읽혔던 생경함, 당혹감, 강박증, 모순성, 폐쇄성 등의 특성들이 이번 전시 작품에서는 색상이 내뿜는 결정적인 긴장감 속에 용해되고 있다. 특히 <남자의 초상>이라는 작품에서 보여주는바 형태적 축약과 동시에 색채선택의 단호함이 어떤 정신적 깊이까지 보여주고 있는데 이러한 압축 속에는 마치 고음의 국악 명창이 내 품고 있는 듯한 비애감마저 숨겨져 있다. 색채를 통한 감각에의 전율은 자기 존재에 대한 예리한 인식으로 바뀌며 이 인식은 곧 인간존재에 대한 보편적 비애감으로 승화되는 듯하다.
마티스 작품의 원색들이 생의 환희를 전달하고 있다면 서용선 작품에서는 소녀를 그리든, 이웃집 농부를 그리든, 친구를 그리든, 자신을 그리든 한결같이 이어지는 생에 대한, 존재에 대한 비애가 담겨있다. 하지만 예술작품 속의 비애라는 정서는 한갓 슬픔, 무거움, 가라앉음, 절망, 통탄함으로 해석될 수는 없다! 개별적 감각을 조절하고 이를 표현함에 있어서의 나약한 감상의 극복, 현실의 모순을 인식하고 이를 드러냄에 있어서의 극복에의 의지. 이러한 치열한 정신적 과정이 서용선의 색채선택과 단호한 붓터치 속에 모두 스며들어 있는 것이다. 화면공간의 구조를 쌓고 색채효과를 극한까지 실현하는 것, 이것이 화가 서용선이 이룩한 회화적 양식의 특성이다. 화면공간의 구조를 쌓고 색채효과를 극한까지 실현하는 것, 이것이 화가 서용선이 이룩한 회화적 양식의 특성이다. 하지만 이러한 특성과 연관되어 서용선 작품이 나름대로 문제점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 표현주의 작품과 외면적으로 유사해 보이는 양식들을 어떻게 더욱 더 독자적인 방식으로 발전시켜 한국적인 회화양식의 하나로 확립할 것인가. 때때로 발견되는 기계적, 반복적 선의 흔적 및 채색부분을 어떻게 생동적인, 유기적 형태로 변모시킬 것인가. 주제와 관련하여 지나치게 의도적인 것으로 해석될 여지가 있는 장면설정을 어떻게 보편적인 공감대로 전환시킬 것인가. 국제적 규모의 전시형태에서 내용적 진지성만이 아닌 압도적인 형식적 우위도 보여줄 준비를 하고 있는가. 이러한 문제 제기는 일종의 기대로서 서구 회화양식의 추종에서 독자적 양식의 한국회화 전성기로 전환되기를 바라는, 우리 미술계를 위한 생산적 비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