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욱
이강욱의 회화에 대하여 : 감각들의 환영과 그 이후
계원조형예술대학 교수 / 미술비평 유 진 상
원자란 편이에 의한 가정에 불과하다. 원자들이란 현실에선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는 것은 다만 동일한 물리적 연속성의 상이한 특질들일뿐이다. 원자는 그것의 모든 속성들, 모든 특질들로부터 물질만을 고립시키는 정신의 개념화에 해당한다. (실상) 정신은 원자를 그것의 이미지로 떠올릴 뿐 아니라 그것을 4차원의 완벽하고도 독자적인 세계로 만든다. 그리고 수없이 많은 거울들에 둘러싸일 경우 그러하듯이, 3차원의 불완전한 세계가 지닌 다양한 양상들 안에 위치하는 이 특이한 원자로 하여금 무한 속에서 반사를 일으키게 하는 것은 바로 감각들의 환영인 것이다. (가스통 드 파블로프스키, <4차원으로의 여행>, ed. Images modernes, 1923, 104-105쪽)
수없이 중첩되는 선들의 율동과 그 주변에 흩어지는 무수한 점들, 커다란 운동과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공간, 멀리 보이는 희미한 얼룩들과 명멸하는 빛들… 이강욱의 회화가 재현하는 세계는 일상적으로 우리가 접하는 이미지들과는 커다란 차이를 보인다. 그것은 매우 커다란 공간, 예컨대 알 수 없는 규모의 우주적 공간 같은 것을 떠올리면서 동시에 매우 작은 차원, 즉 입자(particle) 수준의 극미한 운동들이 가득 차있는 장소를 연상시킨다. 여기서 이미지는 이 알 수 없는 장소에 대한 개념적이면서 구체적인 지시를 통해 그러한 공간이 지닌 아름다움을 매우 상세하게 환기시키는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 화면 위에서 각각의 요소들이 자아내고 있는 재현적 구성은 거대하거나 혹은 미시적인 공간들에 대해 기대할 수 있는 심미적 감동을 매우 잘 전달하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 그림들은 자율적인 선과 점들의 헤아릴 수 없는 반복적 기록들이기도 하다. 선들은 마치 정확한 시작점과 굴곡들, 탄젠트들의 위치를 찾아 헤매는 것처럼 무수히 그어졌다가 사라지고 다시 나타나면서 회화적 공간을 주저(hesitation)와 탐색으로 점철된, 시선과 신체의 복수성이 생산되는 장(場)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관념적 공간과 생성적 공간의 구분은 무의미해 진다.
회화가 지시하는 것은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색채와 선들이 서로 뒤섞이고 배열되면서 자아내는 감각의 환영일까? 아니면 회화적 구성을 통해 작가가 기재해 놓은 사유의 구체적 내용들일까? 물리적 행위와 관념적 기술, 둘 중의 어느 것을 선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 이강욱은 둘 다를 가리킨다. 회화를 통해 우리가 대면하게 되는 이미지의 특질이 그것의 최대치에 달하게 되는 것은 이것 아니면 저것이라는 모순적 선택에 한정되는 순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제 3의 방향 즉, 회화적 구성 전체가 새로운 차원의 감각-의미 항을 생산하는 장소가 되는 순간이다. 회화의 놀라운 점은 바로 그것이 환영이자 동시에 구체적 현실이라는 것이다. 잠재적 이미지이자 사건들(events)이 일어나는 장소로서의 회화적 공간은 그런 면에서 세계의 탁월한 환유적대체물 (metonymic substitute)로서 제시된다. 의 ‘보이지 않는 공간’이란 우리의 가시계(可視界) 바깥에 존재하는 어떤 장소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가시계 안에 존재함에도 불구하고 시선의 힘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회화적 공간을 가리키는 것이다.
바르트는 신체성에 대해 말하면서, 자본주의 사회에서 최종적으로 소비되는 것은 신체가 나타내는 개별성이라고 말한다. 톰블리(Cy Twombly)에 대한 글에서 그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체는 그것이 담보되어 있는 교환을 초월한다고 말한다. “세상의 어떤 거래도, 어떤 정치적 의의도 신체를 희석시킬 수는 없다. 항상 극단적인 어떤 지점이 존재하는데, 그것은 바로 신체가 아무 대가 없이 주어진다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이러한 지적은 드로잉의 신체성이 지니는 급진적 성격을 함축한다. 이강욱의 회화에서 생산되는 것은 신체성이다. 그는 공간을 기술하고 그것에 좌표(grid)를 부여하고 로고스(logos)를 기재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을 지워나가고 그 위에 선들을 중첩시키며 시간과 신체를 소진시킨다. 자신의 몸을 소진시킬 때 그 자취로서 기록되는 것이 회화인 것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그리고 있다는 알리바이를 지니고 있지만 실제로 그것은 목적도, 모델도, 어떤 계기도 지니지 않는다. 드로잉이 지니는 정치성은 그것의 무목적적인 글쓰기(écriture)로부터 비롯된다. 재현이 아닌 태도의 기재(inscription)가 핵심인 것이다.
이강욱의 작품은 무수한 곡선들로 이루어진다. 그것들은 때로는 방향성을 띤 긴 흐름들처럼 보여지기도 하지만 때로는 마치 무언가를 강조할 때처럼 원으로 윤곽을 그려나가기도 한다. 펼쳐지기고 하고 닫히기도 하는 곡선들. 곡선, 즉 굴곡(inflection)을 규정하는 것은 일정한 속도, 즉 연속적인 변화의 값을 갖는 변곡점(tangent)들의 집합이다. 각 변곡점들로부터 수직으로 일정한 거리에 있는 점들이 초점(동일성)을 띠기 시작하면 원이 형성되고, 초점이 흐릿해지면 점들은 일정한 범위에 걸쳐 얼룩을 만든다. 그러다가 선이 펼쳐지면 다시 곡선은 넓은 공간을 가로지르면서 여기저기에 흐릿한 얼룩들과 흩어진 점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들뢰즈는 에서 이것을 주체에 대한 기술로 다루었다. 즉 곡선은 주체를 만든다. 우주의 선(ligne de l’univers)은 그것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굴곡의 운동을 통해 매번 주체들을 생산하는데 이는 무한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이루어진다. 이강욱의 그림은 이러한 보편적 우주의 선에 대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곡선들은 때로는 맺히기도 하고 때로는 풀어지기도 하면서 화면의 바깥에서 들어와 다시 바깥으로 사라져 간다. 바깥은 수없이 서로 연결되지만 동시에 ‘알 수 없는’ 공간이다. 이미지는 그것의 단면이자 극히 일부분으로서 특정한 시간, 특정한 장소에서 일어난 어떤 사고(accident)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작품은 초점이 형성되는 매우 한정된 순간을 초고속노출(ultra-rapid exposure)로 포착한 이미지처럼 보인다. 그것은 극단적으로 짧은 시간적 단면의 기록을 통해 포착할 수 없는 것의 운동을 드러낸다. 연속체의 단면, 시간적 단면으로서의 회화.
사진적 은유는 그의 작품을 설명하는데 있어 매우 유용한 방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은(銀)을 도포한 듯한 그의 작품의 표면은 물감보다는 광학적 반사 혹은 감광을 일으키는 오브제에 훨씬 가깝다. 실제로 이러한 표면은 화면 전체에 산포(散布)되어 있는 투명한 비즈(beads)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다. 화려한 표면의 반사를 통해 시각적 깊이를 강조하는 이강욱의 의도는 마찬가지로 화면 위에 흩뿌려져 있는 점들의 배치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실제로 이강욱은 원근을 다루는데 있어 매우 복잡한 방식을 사용한다. 그는 세포의 사진과 같은 생물학적 이미지들을 차용한 배경의 흐릿한 얼룩 위에 다시 그것을 덮거나 지우듯이 드로잉을 한 뒤 그 위에 비즈를 뿌려 고정시키는 세 가지 다른 방식을 하나의 이미지 위에 동시에 전개한다. 배경을 이루는 이미지가 가장 작은 대상과 관계된다는 점에서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방식은 화면에 실제로 물리적 깊이를 만들어 낼 뿐 아니라 매우 강렬한 역동성을 부여한다. 비즈의 입자들은 마치 무한한 떨림을 일으키는 우주의 먼지들(star dusts) 혹은 빛을 실어 나르는 원자들이며 드로잉의 선에 의해 구체적 흐름을 따라 빠르게 이동하는 파동의 요소들이기도 하다.
이강욱의 회화가 감각적 표면을 통해 일으키는 환영은 20세기 초에 가스통 드 파블로프스키가 4차원의 세계에 대해 설명하면서 기술한 바 있는 원자의 속성을 떠올린다. 그에 따르면 4차원의 공간은 우리의 지각에는 포착되지 않지만 그것의 연속적인 양상들 가운데 어떤 것들은 우리의 가시계 내에 변화를 일으킨다. 우리가 그것을 인지하는 것은 고정시킬 수 없는 숱한 환영들의 연속체 속에서 정신이 일관된 주체를 파악하는 순간일 뿐이다. 그것은 감각적 환영을 통해 그 본질을 드러내지 않지만, 우리가 그것을 바라보는 유일한 방법은 감각적 환영을 통한 통찰에 의해서이다. 양자역학에서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것처럼 관찰의 유일한 방법은 관찰자의 개입에 의한 오류를 수반하는 것이다. 객관적 진리, 혹은 순수성으로부터 우리의 존재에 의해 영원히 격리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파블로프스키는 이미 훨씬 전에 자신의 유사-과학적 논고 속에서 탁월하게 갈파했다. 이러한 통찰은 시대에 한정되지 않는다. 이강욱의 회화 속에서 관능성과 화려함, 그리고 회화적 본질과 통찰을 동시에 발견하게 되는 것은 두 가지 사이의 상호지시적 초월을 위한 방법론적 해결이 어딘가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회화는 매우 한정된 창작적 조건 속에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의 잠재성을 압축하는 방식이다. 이강욱이 끊임없이 선들의 배치를 반복하는 것은 바로 그러한 압축의 초월적 배열을 찾아내기 위한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동시에 선들은 그 자체가 그러한 생각의 표현이기도 하다. 사실상 모든 행위는 그것의 자취를 남긴다. 이러한 행위와 그것의 효과 간의 의존성과 그것을 일으키는 개별항들의 구분은 우리가 세계 안에 존재하는 한 모든 것들과 상호관계를 일으키면서 그것의 불가피함을 증명한다. 모든 것들이 순수하게 연속적이라면 오히려 그러한 사건들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입자물리학자인 쥘 뷜르맹(Jules Vuillemin)은 “(인과관계의) 비-분리성은 그것에 대한 간섭을 피할 수 있는 극단적으로 순수한 구조들에게서나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회화는 그 자체가 순수한 구조로 존재하진 않지만 역설적으로 극단적으로 순수한 순간을 재현하기 위해 사건들의 연속체 속에서 하나의 사고(事故)를 분리해낸다. 이 분리의 방식이 바로 그것을 프레임 안에 세계를 압축해 넣는 방법이다. 이강욱의 회화 속에서 단절과 단면의 방법론을 발견하는 것은 바로 그것이 세계를 재현하는 방식과 동시에 그것의 효과적 해결이 지니는 관능성을 알아보는 것이기도 하다. 이것이 이강욱의 회화가 근본적으로 그것에 주어진 모순을 해결하고 다음 단계의 심미적 해결로 나아가는 계기이자 그것이 지닌 탁월한 매력의 이유인 것이다.
그렇다고 이 모든 관계들을 이강욱의 작품들 속에서 모두 발견해내는 것이 그의 작품에 대한 최선의 감상인 것은 아니다. 그의 작품은 지성과 동시에 감각에 호소한다. 우아함과 정적, 역동성과 그것의 세밀함이 그의 작품에서 즉각적으로 알아볼 수 있는 요소들이다. 그리고 이러한 감각의 매력을 따라 그것에 몰입하다 보면 곧 깨닫게 되는 것이다. 회화가 우리에게 알려주는 것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그리고 화가가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어떤 우회와 배치, 압축과 함축들을 창조해냈는지를. 그리고 회화가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고 오히려 감추어야 하는 미덕이 어떤 것인지를 알려줄 때 그것에 대한 감상은 가장 훌륭한 보상을 약속한다는 것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