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태
김홍태 展
원초의 세계를 찾아서—김홍태의 <원초성과 동심>
김홍태의 근작 <<원초성과 동심>>이 모습을 드러낸 지도 20여 년의 성상을 헤아린다. 일찍이 1970~80년대 명상적 분위기의 풍경화에 심취한 이래 1980~90년대의 ‘어린이’와 ‘동심’(童心)의 탐색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이르는 도정에는 기독교 ‘삼위일체’(Trinity)가 정신적 근간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도의 말씀에 따라 어린이를 천국의 주체요 천사의 현신(現身)으로 간주하면서, 동심이야 말로 작가 자신이 지녀야 할 원초 정신의 전형으로 이해하였다.
초기의 작품은 작품의 중심을 어린이의 몸을 실루엣으로 설정하고 어린이의 주변에 애완물(코끼리,닭,오리,염소,양,장난감,무지개,사닥다리,자전거)을 포치해서 간략한 선묘에다 황혼시의 분위기를 강조하였다. 이 작품들은 화면을 몇 개의 그리드로 분할하고 예의 품목들을 배치함으로써 아동화의 의의가 무엇인지를 상기시킨 바 있다.
그는 ‘아동화’를 자신의 원초지향성의 가상적 전범(典範)으로 받아들여 어린이가 그들의 그림을 생산하는 프로세스를 그 자신의 것으로 전유(專有, to appropriate)하고자 하였다. 대체로 1990년대 후반을 전후로 개안하고 정착시킨 그의 회화양식들은 흡사 고찰의 기둥과 벽을 긁어놓은 그림이나 문자 같은, 이를테면 ‘그라피토’(graffito)를 방불케 하였다.
처음에는 화면을 구획적으로 분할해서 각각의 분할 면적에다 안료를 두텁게 채워 완성하였으나, 점차 스크래칭이 우세해지면서 칠하고, 긋고, 지우는 연속의 절차가 이루어졌다. 이후 추상표현적인 방식으로 이미지를 해체하는 그의 주류기법이 여기서 연유하였다.
김홍태의 회화는 기독교적 사색과 동심이라는 특수한 이슈를 제외한다면, 회화를 통한 ‘원초의 세계’(primordial world)에 대한 자신의 시선을 담아내려는 데 뜻을 두고 있다. 일체의 사상(事象)에는 시간적으로 원초의 세계가 존재하고 만물이 여기서 생성되었다는 문화생물학적⋅진화론적 사유를 김홍태에게서 찾아볼 수 있다는 것 또한 우연이 아니다. 이러한 발상은 인류가 진화의 최후단계에 이를수록 원초의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증대된다는 것을 시사한다.
김홍태의 원초세계에 대한 응시는 이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현대회화가 복잡한 이론으로 무장하고 분파를 거듭할수록 그 역순으로 나아가려는 반(反)명제의 행보 또한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된다. 예컨대 서구 현대회화의 경우, 다지한 분화가 이루어지기 이전의 원초상태, 나아가서는 현대 문명이 첨단화되고 고도화되기 이전의 원시상태를 그리워하게 된 것도 이 수순에서였다. 아쉴 고르키(Arshile Gorky, 1904~48)같은 생래적인 실존형의 작가일 경우는 물론이지만, 일찍이 폴 고갱이 세기 말의 탈유럽문명의 행보를 보여준 것을 비롯해서, 20세기 전기의 다리파와 청기사파를 거처, 중기의 초현실주의, 중후기의 추상표현주의에 이르고, 금세기의 탈근대주의에 이르는 충동의 맥이 모두 여기서 연유했다.
아시아 현대미술의 경우, 이러한 충동은 서구가 대립각을 세운 것과는 무관하게 이루어졌다. 아시아의 경우는 인간을 포함한 ‘자연 본성’(innate nature)에 대한 귀소의식을 드러내는 본연의 의식이 언제나 상존해 왔다. 이는 서구의 경우, 원초세계의 탐구가 근현대를 지배했던 ‘자아론’(egotism)적 사유에 대한 반발에서 비롯된 것과는 커다란 대조를 보여준다. 우리의 경우는 소위 아시아 특유의 ‘자연론’(naturalism)을 배경에 두고, 보다 총체적인 의미에서 ‘전일론’(theory of All-Oneness)을 지향하는 차별적 범례를 보여준다.
화가 김홍태 역시 그의 기독교적 삼위일체를 신조로 삼으면서도 전일론적 시야를 빌려 사물을 그려낸다는 점에서 독자적인 행보를 드러낸다. 그의 세계는 결코 어린이의 성장발달과 미완의 분위기를 그리려는 데 있지 않다. 그 대신 그가 그리는 세계는 어린이의 마음을 빌려 세계의 원초개념을 표출하려는 데 있다. 어린이가 갖고 있는 원초의 눈으로 세계를 그리고자 한다는 말이다. 더 자세히 말해, 어린이의 시선을 작가 자신의 시선으로 연장시킴으로써, 작가 자신이 동경하는 원초적 세계로 승진시키려는 데 뜻이 있다. 이론적으로는 원시적 시야를 메타의 수준으로 격상시키려는, 초논리적이고 정의적(情意的)인 의미의 ‘메타차원’이라 할 수 있다.
이를 그의 회화로 되돌려 말해 보자. 그는 어린이의 ‘그라피토’를 자신의 기호체계로 전유하려는 데서 시작한다. 그가 근자에 시도하고 있는 ‘그 자신의 도상만들기’(self-iconic formation)가 그 예가 된다.
그의 도상만들기는 작가 자신의 의식에 내재해 있는 유년기의 기억을 화면에 투사하지만, 만들거나 꾸미기보다는, 이른 바 ‘무위’(無爲, sheer naturalism)를 시도하는 것이 특징이다. 무위는 서구 초현실주의의 ‘오토마티즘’과 대비되는 한국 특유의 기법이다.
오토마티즘이 이성이나 합리적 작위를 배제하고 무의식에 내재된 형상들을 화면에 투사한다는 점에서 여전히 ‘무의식적 자아론’(Unconscious theory of the Ego)을 배경에 두고 있지만, ‘무위’는 의식⋅무의식의 자아론 모두를 배제하는 한편, 세계와 인간을 아우르는 ‘전일지평’(全一地平, all-in-one-horizon)을 강조한다. 어린이의 의식지평이 비록 계몽되어 있지 않다 할지라도, 이러한 전일지평의 원초적 범례의 하나임에는 틀림없다.
어린이는 원초의 전일지평에서 만물을 있는 그대로 본다. 그것들의 층위의 높고 낮음이나, 가치와 비가치, 개념과 비개념 따위를 운위할 처지에 있지 않다. ‘어린이의 주체’(child’s subjectivity)는 공간에 대해 2차원이나 3차원과 같은 기하개념을 허용치 않는다. 더 나아가 공간을 저차원이거나 고차원의 것으로 이해하지 않는다. 일체를 차원을 떠난, 이를테면 ‘탈(脫)차원적 전망’(dedemensional perspective)으로 세계로 본다. 일체를 적분적으로 아우르면서 표면과 배면이 상호작용하는 총체로 이해한다. 어린이가 보는 것은 명백히 차원을 넘어서거나 차원 이전 또는 이후의 세계이다.
어린이가 그리는 탈차원의 방법이 유비적으로 말해 김홍태가 그리는 회화의 방법론이다. 그가 원초의 세계에 접근하는 방법이자 ‘자신의 도상만들기’의 키워드라 할 수 있다.
근작들에서 김홍태는 탈차원적 공간요소로서 선(線)에 주목한다. 이미 이렇게 한지도 십수년을 헤아리지만 근자에 이르러 보다 방법적으로 접근하고 있다. 그의 선은 단순한 조형요소로서의 선이 아니다. 긋고 지우고 또 그으면서 반복은 물론, 스크래칭과 컬러링을 반복적으로 가감하는 데서 남겨진 흔적에서 최소한의 요소로서, 이를테면 ‘끈’(string) 같은 미소한 것들의 표정을 붙잡는다.
‘끈’을 그리기 위해, 몸을 매개로 하면서도 몸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다. 액션페인터들이 그리는 체선(体線, corporal lines)에 머물고자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의 선들은 이를테면, 인간의 주체를 초월한 우주의 무위적 파편들이다. 반복되는 스크래치형 스트로크로 끈의 고리를 만들고, 이것들을 화면에 올오버함으로써 드러내는 선은 마치 은하계의 성단에서 볼 수 있는 먼지이거나 파편 같은 것들이다.
그의 화면은 암버와 번트센너의 낮은 톤을 캔버스 전면(全面)에 설채하고, 한국의 도예가들이 태토(胎土)에 분채를 바르듯이 청회색⋅회황색을 바탕색 위에 설(設)한 후, 나이프로 캔버스의 표면을 긁고 상처를 내어 배면과 전면의 층간을 허물고 난무하는 끈을 만든다. 끈과 끈 사이의 간격을 만드는 것은 물론, 끈의 병열과 천이를 임의의 확률에 따라 조율함으로써 화면의 긴장을 만들어낸다.
그가 그리는 끈들은 그 나름대로 이유를 갖는다. 이를테면, 삼위일체를 암시하는‘3217’ 같은 아라비아 숫자나, 처음과 나중을 상징하는 ‘α’와 ‘Ω’는 물론, 생명력을 상징하는 고대벽화의 동물형상, 나아가서는 동양의 당초문을 도입해서 가상적이고 다중적인 지시물을 상정시킨다.
이를 극대화하기 위해 ‘시리즈 캔버스’를 컴바인하는 방식을 추가한다. 왼편에는 만물의 생성과 역동성을 상징하는 ‘양’(yang)의 캔버스를, 오른 편에는 소멸과 정중동을 상징하는 ‘음’(ŭm)의 캔버스를 허용한다. 끈들과 이것들의 집합은 물론, 임의의 벡터를 갖는 크고 작은 막대형 ‘로드’(rod)를 사이사이에 내재시킨 청회색과 회황색의 캔버스는 왼 편에, 끈이 생략되거나 소멸된 어둡고 텅빈, 그래서 허허한 톤과 최소한의 로드가 존재하는 무겁고 어두운 캔버스는 오른 편에 포치한다. 그럼으로써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좌우의 정(靜)과 동(動)이라는 이항대립을 여과해서 작가가 의도하는 구경(究竟)의 세계를 맛보게 한다.
김홍태의 좌우 컴바인 양식은 세계를 음양 쌍대성 우주론으로 읽고자 하는 아시아 명상가의 지향의식을 오늘의 시각으로 드러낸다. 아주 근자에는 보다 축약된 단일한 캔버스를 가지고 끈과 로드를 각각 따로 설정한 캔버스가 눈에 띈다.
김홍태의 원초세계에 대한 이러한 모색은, 근원적으로는 그가 아시아의 전통적 세계관을 어린이의 동심에서 유추하는 한편, 여기에다 기독교적 명상의 세계를 병존시키고자 한다는 점에서 독자적이고 다중적며 다문화적이다. 그의 세계는 마치 현대 양자론자들의 ‘제로포인트장’(場, zero‐point‐field)이나 베다(Veda) 현자들의 ‘아카샤’(akasha)를 연상시킨다.
그의 회화세계는 유아(唯我)론적 자동기술이나 무의식에 의존하기보다는 한국인의 전래적인 ‘무위’의 세계를 전일론적으로 다듬어낸 결정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을 대하면서 꼭 주목해야 할 키워드가 이것이다.
그의 근작들은 이러한 맥락을 가지고 이미 「취리히 아트페어」에서 그 진가를 확인시킨 바 있을 뿐만 아니라, 「살롱블랑(도쿄)2007~8」에서 우수상과 그랑프리를 각각 획득하는 등 국제무대를 활발하게 노크하고 있다. 이번 서울「노화랑」개인전을 계기로 그에 대한 국내의 여망 또한 어느 때보다 적지 않다고 할 것이다.
김복영(미술평론가⋅전 홍익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