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찬일 展
김찬일의 릴리프(부조) 회화
회화의 구조를 ‘간섭’하는 색의 중첩, 선의 높이
– 김찬일의 또 다른 시리즈
1. 구조
현대미술의 역사에서 1960년대는 서구 회화의 형식면으로 따져 볼 때, 가히 혁명적인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때까지 당연시해온 회화의 전제, 즉 회화란 사각형의 2차원 평평한 표면 위에서 3차원 환영(illusion)을 유발하는 이미지를 그리는 활동이자 그러한 활동의 창조물이라는 전제가, 여러 현대미술 작가들에 의해 깨졌기 때문이다. 미술사적으로 그 가장 유명하고 확실한 예는 이렇다. 60년대 초반 미국 추상표현주의의 대표작가 중 한 명인 프랭크 스텔라(Frank Stella)는 ‘변형 캔버스(shaped canvas)의 작품’을 제시했으며, 60년대 중반 이탈리아의 작가 루치오 폰타나(Lucio Fontana)는 자신의 “공간 개념(Concetto spaciale)”에 입각하여 ‘캔버스의 평면을 칼로 찢는 작업’을 선보였다. 그렇게 해서, 스텔라의 변형 캔버스가 회화의 프레임을 사각형에서 어떤 형태든 가능한 것으로 개방시켰다면, 폰타나의 칼자국은 2차원 회화의 정면 공간을 찢고 앞과 뒤를 관통하는 3차원으로 확장시켰다. 하지만 정작 놀라운 것은, 미술사의 그들이 일으킨 회화 형식의 혁명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여전히 회화를 ‘격자(grid)’의 틀과 ‘평면’의 차원에 한정시켜 생각한다는 점이다. 이는 아마도 예술 감상자의 완고함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만큼 많은 화가들이 항상 이미 ‘사각형 평면의 회화’라는 전제 속에서 창작을 반복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는 그 전제를 ‘깨기’가 그만큼 간단한 일은 아니라는 데도 원인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이 글에서 최근작 시리즈를 논하려고 하는 김찬일의 경우도, 위와 같이 약술한 현대 회화의 ‘모험’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지점에서 작업하고 있다. 말하자면 이 작가의 작품들은 회화의 물리적 조건들, 즉 사각형 캔버스와 매끈한 평면을 이러저러하게 변형시킴으로써 ‘회화’라는 큰 틀 자체에 작가가 질문과 답변을 던지는 창작 과정의 산물인 것이다. 그 질문과 답변의 방법론적 핵심은 ‘간섭(interference)’이다. 무엇에 대한 간섭이며, 어떠한 간섭인가? 그것은 요컨대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회화 인식 또는 통념에 대한 ‘간섭’이며, 그러한 인식 또는 통념에 대해 김찬일이 고안해낸 ‘선(線)’과 ‘색(色)’으로 개입하는 ‘간섭’이다. 물론 이렇게 말해서는 아직 감조차 잘 잡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하에서 우리는 김찬일의 작품들이 만들어지는 프로세스, 그가 구사하는 기술적 방법들, 결과적으로 작품 표면 위에 드러난 이미지들을 꼼꼼히 살펴보면서 ‘간섭’의 방법론적 의미를 밝혀 보도록 하자.
2. 중층결정의 간섭색
앞서 제기한 ‘interference’는 김찬일이 지난 해 박영덕 화랑에서 가졌던 개인전 이후, 1년간 새롭게 작업한 최근 작품들에 대해 말할 때, 유독 빈번히 쓰는 단어이다. 특히 그는 작품들이 외적으로 발하는 독특한 색채 효과가 가능한 배경을 설명하면서 이 용어를 쓴다. 김찬일의 작품들은, 거의 대부분 금빛이나 은빛이 잔잔히 묻어나는 무채색 바탕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색채들은 또 보는 이의 위치와 각도에 따라 마치 ‘홀로그램’처럼 전체 톤과 분위기가 바뀌는 양상을 띤다. 이 효과가 작가에 따르면, 여러 가지 색의 안료를 미세하게 분배하고 그것을 다시 미디움으로 혼합하여 만든 ‘간섭색’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기에 더해 이 ‘간섭색’은 작품의 초기 제작 과정에서부터 작가가 캔버스 표면 위에 여러 색으로 다수의 얇은 층(layers)을 겹쳐 올린 결과, 색의 층위들이 서로가 서로를 투영하고, 삼투한 결과 빚어진 색채를 의미한다.
일견 단조로운 흰색이나 연분홍색, 옅은 초록빛 나는 금색이나 짙은 갈색처럼 보이는 커다란 화면이 어느 부분에서는 음영이 있어 보이고, 어떤 지점에서 보면 정면에서 볼 때와는 다른 색채로 빛나는 것은, 이렇게 안료의 융합과 칼라 레이어의 중층화 덕분이다. 따라서 우리는 작품의 가장 표면에 떠오른 색은, 그 아래 다수의 밑칠 색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중층결정(Überdeterminierung)’ 된 결과라 말해 볼 수 있다. 이 용어를 처음 ‘꿈의 내용’과 ‘꿈의 해석’에 도입한 프로이트(S. Freud)가 정의했듯이, ‘여러 다양한 원인들이 복잡한 경로를 거쳐 하나의 표상으로 결정되고 표현’된다는 뜻에서 말이다. 물론 김찬일의 경우는, 꿈이나 증상과 같은 무의식적 형성물을 설명하는 정신분석학의 의미에서가 아니라 완성된 작품의 가장 전면(표면)에 발현된 색채이미지가 그러한 중층결정의 과정을 거쳤다는 미술 비평의 맥락에서이다.
그런데 왜, 어떻게 이러한 ‘간섭색’을 통한 색채효과가 회화에 대한 우리의 일반적 인식에 간섭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이유는 앞서 스치듯 말했던 것처럼, 김찬일의 은 평평한 화면에 음영이 생겨 보이고, 홀로그램 필름을 쓰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런 시각효과를 창출하는데, 그것이 기존 회화에서 3차원적 환영을 만들어내기 위해 사물을 ‘묘사’하는 방식과는 다르다는 점에서이다. 이 작가의 작품에서 색채는 어떤 구체적 형상을 유사하게 재현하는 데 봉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하나의 단일한 화면을 만들어내는 데만 쓰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색채들이 감상자로 하여금 일종의 3차원성 환영을 경험하도록 유도한다. 이 3차원성 환영의 경험은 ‘눈속임’이 아니다. 그와는 달리 분명 시각이미지를 통해서 발생하기는 하지만 촉각적 성질의 경험이다. 화면에 고루 도포된 금빛, 은빛의 색들이 조명과 감상자의 움직임에 따라 밝음과 어둠, 들어감과 나옴, 뭉침과 흩어짐의 환영을 산출하면서 손끝에 만져지는 것 같은 촉각 경험을 선사하기 때문이다. 이는 회화가 시각이미지와 시각 경험을 중심으로 구성된다는 일반적 전제에, 김찬일이 ‘간섭색’을 하나의 방법으로 해서 다른 이미지와 감각 경험을 시도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3. 3차원 볼륨을 가진 균열의 선
시대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그 태도 면에서 김찬일은 모더니스트로 보인다. 그의 작업은 우리가 통상 그림에서 보고자 하는 구체적 형상, 그러한 형상들이 재현하는 내용 또는 이야기(narrative)에 초점이 맞춰진 것이 아니라 ‘형식’ 자체를 문제시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말하자면 김찬일은, 미국 모더니즘 회화를 강력하게 이끌었던 비평가 그린버그(C. Greenberg)가 회화의 외적 요소라 규정하며 회화 자체로부터 추방한 ‘묘사적 내러티브’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 오히려 그의 작업에서는 ‘그려진 무엇’이 아니라 ‘형식적으로 구축되는 과정’ 자체가 관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의 작품을 모더니스트 회화로 단정 지을 수는 없다. 왜냐하면 김찬일은 그린버그와 모더니즘 화가들이 회화의 특권적 요소로 간주한 ‘평면성’을 넘어 회화를 ‘입체에 가까운 어떤 것’으로 변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쯤에서 내가 이 글의 이 문장에 이르기까지, 김찬일의 을 지시하면서 한 번도 ‘그림’이나 ‘회화’라는 말을 쓰지 않고, 단지 ‘작품’ 또는 ‘작업’이라는 다소 모호하고 중립적인 용어를 썼음을 환기시켜야겠다. 그 이유는 시리즈가 그림과 사물(object) 사이 어딘가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견 사각형 캔버스에 물감을 주재료로 써서 작업했다는 점에서 김찬일의 은 분명 전형적 평면 회화(그림)에 속하지만, 그것은 엄밀히 말해 일정한 높낮이를 가진 입체물이다.
단조롭고 매끈한 사각 평면에, 비유하자면, 피어나는 꽃이나 펼쳐진 그물처럼 보이는 선들이 드로잉 된 중 한 작품을 비껴 옆에 서서 주시해 보라! 당신은 거기서 아주 미세하지만 다양한 높낮이를 가진 선들이 화면 위로 솟아있다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그에 더해 보통의 캔버스 틀과는 달리 김찬일 작품의 틀은 사각형 네 변의 면들이 45° 각도로 꺾여서 돌출해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기술적으로 설명하자면, 드로잉 선의 높이는 작가가 화면 위에 수작업으로 일정한 크기의 막대를 연속시켜 만든 것이고, 네 변의 꺾임은 캔버스 나무 틀(일명 ‘왁구’)에 45° 각도의 나무 막대(일명 ‘쫄대’)를 덧붙여서 가능해진 것이다. 그런데 이 과정을 비평적으로 말하면 어떨까? 그것은 평면에 일정한 볼륨을 부여함으로써, 기존 모더니즘 회화가 정전(canon)처럼 물신화했던 회화의 ‘평면성’을 아주 조금씩 위반하는, 그것에 균열을 내는 행위이다. 이러한 캔버스의 변형된 형태와 화면의 요철은 모더니즘 회화 이후, 또 스텔라나 폰타나 식의 회화적 실험이 활발해지면서, 여러 다른 작가들이 회화에 도입한 형식이거나 표현 방법인 만큼 그리 새로운 것은 아니다. 또 그런 맥락에서 김찬일의 경우도 예외적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김찬일의 이 우리의 흥미를 조금 더 끄는 것은, 작품이 놓인 특정한 공간, 그리고 감상자가 그것을 보는 특정한 위치와 시간이 작품의 내용(이때 ‘내용’이 모방적 형상이나 서사가 아님은 당연하다.)을 결정하는 요인이라는 데 있다. 바로 전에 내가 이 글의 독자들에게 체험해 보도록 권유했던 바와 같이, 그의 작품들은 감상자의 조건에 따라 다르게 반응한다. 그 가변적인 반응의 내용이 곧 김찬일 작품의 모든 내용, 애초 작가는 예측하지 못했을 수도 있고, 의도하지 않은 것일 수도 있는 것을 포함한 미적 경험의 내용이 될 수 있다. 이 점에서 김찬일의 은 회화 내부의 형식 실험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관객이라는 외부의 주체와 관계 맺기 하는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그의 작품들은 우리가 회화에 대해 여전히 품고 있는 완고한 생각들, 전제들을 흔들고 있다고 판단할 수 있지 않겠는가? 요컨대 그의 ‘그림 아닌 그림들’은, 회화란 남다른 예술적 재능을 가진 화가가, 자신의 스튜디오에서 이젤 위에 놓인 사각형의 평면 공간과 고군분투해 산출한 창조물이며, 그 창조물로서의 작품은 일상의 물리적 조건과 감상자의 소박한 경험으로부터 자유로울 것이라는 생각들에 간섭해 들어오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겠는가?
강 수 미 (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