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박성민
‘얼음 꽃’으로 부른 생명의 찬가
존재론자로서의 화가
홍가이 박사
존재론이란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존재성을 탐구하는 철학적 사고 과정이다. 의구심을 가질 대상은 저마다의 특질을 가진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포함된다. 달리 표현하자면, 이 세상에는 무수히 많은 물질적인 것이 존재하지만 제각각 물리적인 특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이 중엔 인간, 동식물과 같은 생물도 있지만 돌, 금속물, 별, 바위 그리고 여타 무기물질과 같은 무생물도 있다. 자연 생태계의 흥미로운 점은 인공적으로 만들어낸 것을 제외한 모든 것은 아무리 동일한 모체에서 나왔다고 하더라도 결코 복제된 마냥 똑같은
것을 찾아낼 수 없다는 것이다. 해안가에 널린 무수한 돌도 각기 다른 구성 물질뿐만 아니라 크기, 모양, 질감을 가지고 있다 결국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돌도 저마다 어쩌면 수 억년 혹은 그 보다 더 기나긴 세월을 지내며 우주의 역사와 함께 해왔는지도 모른다. 퇴적층을 이루는 과정을 예로 들어보자. 각기 다른 곳에서 흘러 들어와 한 곳에 쌓이게 된다. 이렇게 쌓이는 흙더미는 엇비슷한 무게, 크기를 지니고 있고, 특정 물질을 공통분모로써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퇴적물은 서로 엉겨 일련의 과정을 거쳐 퇴적층을 이룬다. 보잘것없던 흙먼지는 다양한 원소로 구성된 다양한 물질을 담아 다양한 경로를 거쳐 결국 한 곳에 모여 집합체를 이룬다. 그렇게 모여 겹겹이 층을 이룬다. 오랜 세월이 지나 퇴적물은 굳어져 지층 및 암석을 만들어낸다. 사방에 흩어져 있던 미세한 흙먼지가 거듭 쌓여 단단한 암석으로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거친 질감과 더불어 물질의 독특한 배열 형태를 구성하게 된다.
물과 얼음의 경우는 어떨까? 기온이 영하로 내려가면 호수면은 얼음으로 뒤덮이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그 거대한 얼음 덩어리에서 마치 지하의 단단한 암석층에서 암석을 캐내는 것처럼 얼음 덩어리를 떼어 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얼음 덩어리는 이전에 물이었다. 그렇다면, 얼음도 크기만 제외하고 모두 물질적인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실질적으로 얼음은 냉동 과정의 산물로 여타 응결 과정과 별 다른 것이 없다. 모든 고체 물질은, 그것이 본래 용암이었든 물이었든 지 간에, 액체 물질에서 비롯된 것이다. 지구의 기온에 변화가 생기면, 예를 들어 빙점에 까지 다다랐을 경우, 액체 형태를 유지했던 물질은 응고되어 액체 물질 속에 있던 성분까지 단단한 틀 속에 가두어 버리며 다양한 금속 혹은 암석 퇴적층을 이룬다. 그 부산물로써 우리는 고대 동식물의 화석을 탐사 과정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우리는 북극의 거대한 빙산이 서서히 녹는 과정에서 앞으로 무엇을 발견하게 될까?
산 속 깊은 곳에서 우리는 오래 전 사라진 고대 동식물의 화석을 발견하곤 한다. 그러나 북극 심해에서 만약 무언가를 발견하게 된다면 그것은 냉동된 생명체, 즉 어쩌면 얼어 있을 뿐이지 생명의 끈을 놓지 않은 것인 지도 모른다. (여기서 가능성, 즉 일어날 수도 있을 법한 경우를 논하고자 한다. 실현 가능성이 있다면, 가상사학자들이 주장을 하듯 차분히 앉아 생각을 해볼 수 있는 것이니까.) 사실 비슷한 맥락에서 우리는 일상 생활에서 음식을 보관하고자 할 때 냉동실에 넣어두지 않는가? 그리고 벌써 일부 사람들은 수 백년이 지난 뒤 회생이 될 수 있도록 사후 자신들의 신체 혹은 최소한 두뇌라도 냉동하기 시작하지 않았는가?
박성민 작가는 화가의 위치에서 얼음이 가진 특성에 흥미를 갖고 있다. 조각, 회화, 혹은 사진이 되었든, 어떤 예술 영역을 개척하든 간에 창조 과정에서 조우하게 되는 대상과 진지한 관계를 구축할 필요가 있다. 박성민 작가의 작품의 독특하고 창조적인 면은 바로 물질적인 대상으로써 얼음과 독특한 관계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여기서 논지를 명확하게 하기 위해 다른 분야에서 작품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예를 들어보도록 하겠다. 가령 조각가가 원재료인 돌로 조각을 하려고 할 때 무엇을 하는 지 말이다. 이 조각가는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만들어내기 위해 전기 톱을 사용해 왔다. 자신의 작품을 구상하고 난 뒤 ‘의도한 대로’ 모양을 가다듬었을 것이다. 작가는 조각작품을 만들어내는 과정에서 평범한 소재에서도 내재되어있는 어마어마한 가능성을 지니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확신에 흔들림이 없다. 그러나 작업 과정에서 다루던 소재가 생각보다 더 부스러지기 쉽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차선책으로 수작업을 선택하게 되는 데 그 과정에서 다루던 소재가 머리 속에서 구상하던 대로 쉽게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마치 옹골찬 고집이 있는 양 그 견고함을 자랑한다. 왜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시킬 수 없는 지 소재 면면을 살피던 과정에서 평범한 돌 조차도 각각 독특한 물질 구성 패턴을 이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리 무엇으로 설명이 가능하겠는가? 돌 하나 하나에도 나름대로 겪어온 세월이 있을 터인데 그것은 수 백 만년 이었을 수도, 혹은 그 보다 더 기나긴 세월을 겪어오며 이 우주가 형성 되어온 과정을 목도 했을 수 있다.
박성민 작가는 유사한 과정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거쳐 왔을 것이라 믿어진다. 앞서 언급한 조각가 입장에서 내재된 특성을 찾아내기 위해 돌 하나하나의 물질적인 특성을 존중하는 수준에 까지 이르러야 했다. 반면 박성민 작가는 얼음과 스스로 선택한 대상이 연관된 일을 서사화 시켜 독특한 개성을 화폭에 담는다. 선택하는 대상은 약초, 나뭇잎 혹은 그가 좋아하는 꽃이나 과일 종류가 되기도 한다. 이러한 얼음조각은 초록색 식물이 안에 들어가 있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물과 함께 얼어버린 녹색 식물 때문에 다른 평범한 얼음 덩어리와 달리 이름과 개성을 가지게 된다. 식물과 같이 냉동된 얼음 조각을 화폭에 옮겨 담을 때, 조명 각도를 비롯한 여러 요소들을 조절해가면서 작가는 미세한 변화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그야말로 녹색 식물의 유무에 따라 큰 차이점이 발생하는 것이다. 잠시나마 전혀 새로운 물체가 이 세상에 선보여 화폭에 담기는 것이다.
사진에서 중요한 것은 사진 속 주인공이 어떤 모자를 쓰는 지를 비롯 어떻게 보여지는 것인 지이다. 기술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사진 촬영이라는 과정이 발생하기 전 촬영 대상을 어떻게 표현해내느냐가 사진의 제일 큰 관건인 것이다. 마치 무대 감독처럼 촬영 대상을 어떤 조명 아래 어떻게 세우는 지구상을 하는 등의 작업을 거치는 것이다. 따라서 박성민 작가는 얼음 조각 속에 식물을 함께 함으로써 작가 특유의 ‘생명체’에 대한 모티브를 지닌 다양한 ‘스토리’를 가진 새로운 컨텍스트를 탄생시킨다. 어떤 경우 얼음 조각은 작업 과정 중 서서히 녹아 내리기도 하고, 또 어떤 경우 얼음 조각 속의 나뭇잎 줄기가 일부는 얼음 조각 속에, 또 다른 일부는 얼음 조각 밖에 있는 탓에 냉동이 된 부분과 되지 않은 부분의 극명한 대비를 이루기도 한다. 각각의 작품에서 작가는 자신의 역량을 한껏 드러냈다. 즉, 작가는 작품의 대상이 지닌 스토리를 극대화 할 뿐 아니라 빛과 그림자의 화가인 것이다.
최근 작품에서 도자기라는 새로운 요소가 추가 되었다. 작가의 얼음 조각은 전통 문양을 섬세하게 새긴 도자기 그릇에 담겨있는 것이다. 이번 새로운 시도를 통해 박성민 작가는 섬세하고 역량이 뛰어난 설치 디자이너로서의 자질을 보여준다. 아이스 캡슐 97에서 백자 그릇에 담긴 얼음 조각 속에 있는 나뭇잎 줄기의 초록색을 강조한다. 그 섬세함은 또한 초록색 잎줄기가 가로로 배치되어 극적인 효과를 배가 시킨 상태에서 잎사귀의 일부는 얼음 조각 속에, 또 다른 일부는 밖에 나와 극적인 이미지를 강조함으로써 드러난다.
박성민 작가의 작품에서 주시 해야 할 요소는 다음과 같다. 투명성을 가진 아이스 캡슐의 순수함, 얼음 조각 안팎에서 함께하는 식물의 색감, 그리고 이와 더불어 화폭에 담기는 도자기이다. 약초 혹은 딸기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고유의 색감을 유지하는 듯이 보이는 데 아마도 그것은 투명한 얼음 조각 속에 같이 얼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럼으로써 나름의 싱싱함과 특질이 잘 보존 되어 있다는 걸 나타내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들은 흔하디 흔한 플라스틱 그릇이 아닌 흙에서 빗어낸 도자기에 담겨 있다. 박성민 작가의 시도가 왜 우리 시대에 중요한 시사점을 주는 것일까? 초록 식물을 등장 시켜 그 존재 강조하고, 얼음 조각의 투명성과 순수성을 부각시킴으로써 특유의 보존력을 드러내 상징적 연관성을 지닌 대자연의 치유 효과를 나타내려는 것일까?
기술 발달의 절정을 이룬 우리 시대, 즉 재미슨의 말을 인용하자면 탈자본주의 시대에 이루어지는 모든 경제 및 사회 활동은 산업 활동과 맥을 같이 한다. 그래서 우리는 금융, 문화, 농경 그리고 심지어 교육분야에도 산업이라는 어미를 붙이는 것일까? 우리는 산업 이라는 어미를 갖다 붙임으로써 어떤 무시무시한 결과가 나타날까에 대한 별다른 생각 없이 사용을 한다. 이와 같은 언어 사용이 혹자는 시대의 발전을 나타내기 때문에 더 세련된 표현이라고 말을 할 지 모른다. 그것이 과연 타당한 것일까? 농경산업을 예로 들어보자.
미국 몬산토 사와 같은 대기업이 농경지를 구입했다고 치자, 이러한 대기업은 농축산업 전체에 산업화 과정을 적용 시킨다. 즉 농경지를 공장으로 변모시키는 것이다. 해충 및 박테리아를 막아내도록 하기 위해 유전자 조작 기술을 이용한다. 과연 좋은 것일까? 꼭 그렇지만은 않다. 만약 곤충이나 박테리아를 끌어들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걸 섭취할 사람에게 결코 좋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동식물이건 곤충이건 상관없이 자연의 생명체와 인간은 결국 함께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거대한 공장화가 된 농경지에서 재배되는 과정에서 농작물이 상하는 일이 없다면, 사람의 몸 속에 들어 갔을 때 어떻게 될까? 우리가 섭취하는 음식이 제대로 소화 흡수가 되지 않는 다면, 그것은 식용으로 활용이 불가능 한 것이다. 비슷한 맥락에서 육류의 경우에도 축산 농가에서 가축동물들이 사료 외 여타 호르몬 제를 투여하는 데 무엇이 어떻게 들어가는 지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섭취를 하게 된다. 역설적으로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우리는 출처가 분명한 식자재 만을 사용해 음식을 만듭니다’와 같은 슬로건을 내세우는 것은 새삼스러울 것이 아니게 되는 것이다.
문화나 교육 산업도 마찬가지이다. 산업화 그 다음 단계로서 문화 및 교육 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는 정부의 정책 기조와 달리 노암 촘스키 MIT대 교수는 미디어 산업이 금융업과 농경산업계와 손잡고 우리 사회를 끊임없이 속이고 있는 것에 대해 경고를 해왔다. 기업들은 일반 대중들이 무엇을 섭취하는 지에 큰 관심이 없다. 오로지 주주를 비롯한 이해 관계자들의 이익의 극대화에 관심이 쏟는 것이다. 여기에 신자유주의적인 가치관이 도래되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산업계의 탐욕은 문화예술계에서도 이미 오래 전부터 파고들고 있었다. 촘스키가 지적한 바 대로 미디어 조작이나 조지 오웰의 신조어 더블 토크는 미술계에도 침투한 서구 자본주의 체제하의 문화 산업에서도 팽배해 있는 현상이다. 따라서 박성민 작가의 작품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환경을 파괴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육체 및 정신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까지 파괴하는 것에 대한 저항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마지막으로 앞서 여러 차례 언급한대로 얼음 조각과 함께 사물을 다양하게 배치하는 과정에서 작가는 상호 연결성을 이야기하고자 한다. 장자의 제물론 및 화엄경에서도 강조되다시피 우리는 이 넓은 우주 속의 존재로써 서로 연결이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도입한 서구 자본주의의 문제점은 각 개인이 세상으로부터 점점 더 단절되어 간다는 것인데, 이는 특히 디지털 기술의 꽃피우는 요즘 그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두드러진다. 가상현실이 우리 일상 생활을 파고들기 시작해 급기야 현실감각을 잃게 만든다. 그렇지 않고서 1999년 미국 콜롬바인 고교에서 일어난 참극에 대해 달리 어떻게 설명을 하겠는가? 박성민 작가의 작품은, 적어도 필자에게만큼은, 얼음 조각 및 간결한 선을 가진 도자기에 담긴 평범한 잎줄기를 매개로 인간과 자연의 상호 연결성을 새삼스레 생각하게 한다.
평범한 사물을 매개로 우주와 상호 연관성을 찾아낸다는 것은 즐겁다 못해 경이로운 것으로, 이해 관계 및 권력과 같은 세속적인 관심사와 관련이 되어 있지 않다. 미처 알지 못한 ‘연결고리’를 발견하는 것이 순전히 예술활동을 함으로써 누릴 수 있는 즐거움이다. 예를 들어 학기가 시작한 이후 3개월 동안 수업을 맡아 왔다고 하면, 매일 같이 수업을 듣는 학생들이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석 달이 지난 지금에서야 지연이라는 한 학생에 존재에 대해 ‘주목’을 하게된다. 그 동안 이 학생이 전혀 눈에 띄지 않았던 건 분명 아니다. 무슨 의미일까? 그 학생의 가진 무언가가 눈길을 끈 것이다. 그 과정에서 놀라움과 경이로움이 뒤따른다. 우선 그 동안 내 강의를 꾸준히 들어왔음에도 지금에서야 눈에 띄었다는 점 때문이다. 무엇인가를 본다는 것은 상당히 복잡한 과정으로, 궁극적으로 복잡한 지식 체계로까지 그 과정이 이어진다. 곰브리치를 잠시 인용하자면 우리는 아는 만큼 보인다. 즉, 우리는 기존에 형성된 인식의 틀을 사물을 보는 렌즈 및 필터로 삼아 본다는 것이다. 그러나 인식의 틀과 사물간에 간극이 벌어져 있을 때 우리는 그 간극에 ‘주목’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기계적으로 사물을 보는 것은 잠시 멈추고 앞서 발생한 간극에 원인에 대해 파악을 하기 위해 인식의 틀을 재구성하게 된다. 기존의 인식의 틀은 활용도가 떨어지는 것으로 판단하고 종전과 다른 인지 활동을 하는 과정을 거쳐 객관성을 가지게 된다. 그렇다, 임마누엘 칸트가 주창한, 미적 관점의 가장 기본을 형성하는 그 관점 말이다. 여기서 말하는 객관성은 ‘모든 규약 및 이해타산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이런 과정을 거쳐 경이로움을 경험하게 되는 데 지각변동을 일으키기 때문이 아니다. 사실 매우 단순하고 평범한 것이 새로운 각도의 조명을 받은 것일 수 있다. 그러면 스스로 보고 깨닫는 것을 타인도 같이 하고 있는 지에 대한 의문을 시작으로 타인과 그 과정을 공유하려 할 것이다. 그것이 자신이 지각한 대상에 대해 주의를 환기 시키는 가장 겸허하고도 진지한 제스쳐를 취하는 것이 된다. 평범한 사물에 대해 경이로워하는 것이 경이로움과 즐거움의 원천이 되는 것이다. 이 것은 찰나의 순간에 얻는 깨달음이다. 평범할 수 있는 경이로운 경험이 쌓여 우리는 이해관계에서 벗어나 서로 예민한 감수성을 나눌 수 있는 온전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된다. 두 사람 혹은 그 이상이 모여 각자의 인식 및 생각을 나눔으로써 이해관계를 벗어난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런 예고 없이 ‘눈길을 주는’ 과정을 거쳤고, 순전히 자신의 경험을 공유하기 위해, 그리고 이 우주의 아주 미미한 일 부분을 차지하는 존재로써 가진 연결고리를 확인 하기 위해 그 순간 가까이 있었을 타인에게 자신이 본 것을 보고, 느낀 것을 느끼는 지에 대해 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