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병락
윤병락
내용이자 형식인 사과들
이선영(미술평론가)
윤병락은 사과를 기가 막히게 잘 그리는 일명 ‘사과 작가’로 알려져 있다. 우리 미술계에 사과를 ‘전문으로’ 그리는 이들이 꽤 많으므로 이러한 꼬리표는 화가로서 경쟁력을 확보하고 있다는 의미가 될 수 도 있다. 상업자본주의의 발흥 이후, 미술이 장르화로 세분되면서 작품의 소재 별로 비교우위를 가지는 대가들이 부각되었고, 이는 미술이 기념비적인 형식을 통해 전통적으로 존재해 왔던 공적 영역으로부터 사적 영역으로 귀속(소유)되는 흐름과 연관된다. 이 흐름을 매개하는 것은 상품이라는 형식이다. 건축의 일부가 아닌, 쉽게 옮겨질 수 있는 캔버스 위에 유화로 그려진 정교한 사실주의가 대표적인 형식이다. 박스에 가득담긴 탐스러운 사과들이 가득 그려진 윤병락의 그림은 우선 풍요의 결실을 가상적으로 소유할 수 있다는 욕망에 호소한다. 그리고 내셔널지오그래픽 같은 환경 관련 잡지들과 결합된 사과들은 자연과 인간 사이에 가로놓인 욕망의 문제를 사회적인 메시지로 확장시킨다.
가령 재현된 잡지에서 보이는 복제 돼지들과 사과의 조합은 사과에 상징적 차원을 덧붙인다. 아담과 이브가 낙원에서 뱀의 유혹에 못 이겨 선악과를 따먹었을 때 그것은 신의 금지를 위반한 것이었고, 이러한 위반의 결과물들은 지식의 진보를 낳았으며 오늘날 신이 아닌 존재가 종을 (재)창조하는 불경한 사태를 낳았다. 생명 복제란 자연의 상품화이며, 그것이 낳는 결과는 편협한 인간의 이익을 위해 자연 전체를 도구화시키는 것이다. 도구화는 다양성을 소멸시킨다. 윤병락의 한 작품에 나오는 북극곰처럼 앞으로 사진으로만 보게 될 생물들이 적지 않다. 관객은 사과에서 나오는 만족스러운 형태와 그것의 정교한 재현이 주는 시각적 쾌락, 여기에 환경에 관련된 메시지까지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작가는 사과에 커다란 의미를 담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으며, 그것이 조형적 소재임을 강조한다. 그의 작품은 사과라는 소재에 고착된 극사실주의가 아니다.
윤병락의 작품에서 언제나 나중에야 보이고, 대부분 쉽게 간과되는 측면은 형식이다. 이 전시의 작품에서 가로 5미터가 넘는 대작이 변형 캔버스로 제작되었다는 것, 그의 대부분의 작품이 변형 캔버스 위에 그려져 있다는 사실은, 그의 작품이 재현이라는 환영적 장치 안에 안주하는 소재주의가 아님을 반증한다. 이전 작품의 전시부제의 변화에도 강조점의 변화는 나타난다. 2000년에 열린 개인전에서의 전시부제는 ‘보물창고 찾기’였는데, 여기에서는 기억 속에 얽힌 추억들을 보물로 생각하고 향수어린 사물들을 그림에 담는데 집중했다.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는 사물 등, 작가의 관심을 끄는 대상들을 캔버스라는 ‘시각적 금고’(존 버거)에 채워 넣는 방식이며, 현재의 작품에도 과일을 담는 박스라는 형태로 지속된다. 그러나 2004년 개인전 작가노트에는 ‘변형캔버스를 통한 공간 인식의 확장’이라는 전시부제가 나온다. 어떤 대상이나 의미를 담아두는 중성적 틀을 벗어나고 있는 것이다.
물론 틀의 변주라는 문제는 1995년 첫 개인전 이래, 그의 작품에 지속적으로 등장하는 요소였지만 작업의 질과 규모가 변화하면서 점차 전면화 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는 캔버스의 틀을 밀고 그림 밖으로 나가려는 사과들이 아예 입체작품으로 구현되어 있다. 이전에는 그려진 낱개의 사과를 변형 캔버스 밖에 흘려 놓았는데, 이번에는 FRP로 제작된 사과가 전시공간에 설치된다. 여러 가지 색으로 도색된 사과들은 의자 위에 놓이거나 등받이 부분에 끼워지는 식이다. 의자는 사과라는 조형물이 놓이는 좌대 같은 역할을 하지만, 그의 캔버스가 단지 어떤 소재를 담는 중성적 용기가 아니듯이, 대체된 현실을 넘어 힘 있게 현실공간을 점유한다. 사과의 숨구멍처럼 보이는 점들을 가까이 보면 ‘복(福)’자가 루이비통 가방의 무늬처럼 새겨져 있다. 명품 사과임을 입증하는 이 장식적 코드들은,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복제 돼지들처럼,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일률적으로 상품화 된 자연을 풍자하는 듯하다.
그러나 그림이든 입체이든 비슷한 크기와 색상으로 분류된 사과들이 순수한 자연이 아닌, 종자개량이라든가 재배방식의 변화 같은, 인간의 선택이 누적된 결과물이라는 것도 분명하다. 자연 조차도 자연적이 아니다. 그림은 더구나 자연이 아니다. 자연의 대체물도 아니다. 변형캔버스라는 형식이 채택됨으로 인해, 소재가 주는 형태와 상징 배후에 놓여 있는 예술 언어가 부각된다. 사과들이 담긴 박스 형태나 책 모양으로 오려진 캔버스는 화이트 큐브와 분리된 재현적 장치가 아니라, 전체 공간과의 상호작용을 문제 삼는다. 그래서 그의 그림이 연출되는 방식은 단지 벽에 그림을 거는 것이 아니라, 설치적이다. 소재의 외곽선을 캔버스 틀과 일치시킴으로서 대상의 배경이 그림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밖에 존재하게 된다. 그려진 사과들은 정물화에서의 전형적인 조명이 아니라, ‘화면 내부의 빛 방향과 전시장의 조명을 의도적으로 일치시켜줌으로서 화면 외부의 공간까지도 작품의 일부분으로 인식시키고자’(2004년 작가 노트 중에서) 한다.
소재의 대부분이 부감 식으로 내려다 본 시점이다. 이를 통해 더 실물처럼 보이는 소재들은 주변의 공간을 포획하면서 박스 위에 가득 쌓인 사과들은 당장이라도 굴러 떨어질 것 같은 직접적 효과를 낳는다. 윤병락의 작품에서 변형 캔버스라는 형식적 장치는 내용물을 배제한 채 틀 형식 자체를 사물로 환원시키고 마는 현대미술사의 흐름과 달리, 소재의 정교한 재현에도 집중함으로서 틀과 실제와의 상호작용을 추구한다. 미술의 역사 상당부분이 재현적 현실에 대한 매혹으로 채워져 있으며, 이러한 관습은 근현대미술의 거센 도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아있다. 나날이 정교해지는 인터페이스로 둘러싸인 우리의 일상자체가 재현의 정치경제학이 작동되는 장이다. 윤병락의 작품에서 변형된 캔버스의 복잡한 외곽선은 현실과의 경계면을 확장하고 있으며, 단지 대상을 담아 실어 나르는 용기(容器)로서의 틀을 모호하게 한다.
비평가 수지 개블릭에 의하면, 재현방법은 유사성을 가져오는 경향을 가질 뿐이며, 인지법칙을 확립하기 위한 암호체계에 불과하다. 즉 재현방법은 언어처럼 도구이자 관습의 문제이다. 재현이란 대상을 단순히 반영하거나 모방하는 것 이상의 복잡한 과정이며, 상대적이고 변화무쌍한 상징적 연관관계로서, 대상을 분류하는 잘 알려진 표현체계라고 할 수 있다. 윤병락의 작품에서 모사는 단순한 현실의 투영이 아니다. 사각 캔버스 틀이라는 고정된 기호적 패턴은 예술을 상투화시키고 더 나아가 밀폐시켜 버린다. 그의 작품에서 현실을 바라보는 창문은 작품마다 변화하며, ‘묘사와 묘사되는 것, 또는 회화와 회화의 대상 간에 필수적인 연관관계를 탐구하도록’(수지 개블릭) 한다. 틀은 그 안에 담겨진 내용물에 따라 다르게 꿈틀거린다. 그것은 대상을 담는 틀 자체를 대상만큼이나 부각시킨다. 틀이란 미술의 언어를 말한다. 퍼트리샤 워는 언어는 어떤 일관성을 가진 의미 있는 객관적인 세계를 수동적으로 반영하지 않고, 스스로 의미를 생성하는 독립적이고 자족적인 체계임을 강조한다.
그것은 현실 재생산 뿐 아니라, 언어의 진실을 생산해 낼 것을 요구한다. 언어는 단순히 의미로 채워지는 텅 빈 형식들의 집합이 아니라, 말해질 수 있는 것과 그에 따라 인식되는 것의 범위를 정하고 그것을 강요하는 것으로, 메타적인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현대미술은 언어의 메타성이 붕괴되면서 실어증이나 정신분열증에 버금가는 혼란이 야기되었다. 그러나 윤병락의 작품은 언어의 영원한 참조대상들을 간과하지 않음으로 인해, 내용과 형식이라는 분리된 영역 간의 의미 있는 상호작용을 유지한다. 현대예술은 언어의 힘을 전면화하였으나, 현실과의 연결고리를 끊어버림으로서 언어를 통해서 도달될 수 있는 목적지를 모호하게 하였고, 언어의 미로만을 남겨두었다. 그것은 목욕물을 버리려다 아기까지 버려버린 오류이다. 윤병락의 변형 캔버스에 담긴 사과들에 부가될 수 있는 또 다른 의미가 있다면, 언어의 미로가 놓쳐버린 잃어버린 현실과 자연에 대한 메타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