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욱
이강욱
이중 부정: 이강욱의 최근 회화
이숙경 (테이트 리버풀 큐레이터, 영국)
섬세하게 그려진 선과 옅은 색면들이 회화의 표면을 부유한다. 타원과 사각형태들이 여러 다른 크기로 등장하고, 때로는 완전한 형을 이루지 못한 채 형태의 제안에 머물며, 또 한편으로는 마치 공간적 연속을 이루듯 반복적으로 겹쳐진다. 또 다른 한 무리의 그림들에서는, 곡식알 같은 작은 타원형태가 무한히 증식하여, 마치 자연의 프랙탈 성장처럼 추상적이면서도 동시에 유기적인 형태를 연상시킨다.
이강욱의 작품들은 2007년 열린 그의 마지막 개인전 이후 그다지 큰 변화를 겪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기하학적인 형과 패턴이 좀 더 주도적인 면을 차지한다는 점이나 구성적 측면이 보다 강해졌다는 점을 제외하면, 인식의 상대성 혹은 ‘불가시의 공간’에 대한 그의 탐색이나 상상의 풍경을 재현하는 탁월한 회화적 능력은 최근 작품에서도 여전히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가지 명확한 최근 회화의 특성은 단순한 이원론을 초월한 반대적 세계의 융합, 혹은 합성이라는 개념이다. 그의 이전 작품들이 극한적으로 미세한 세계와 우주적 거대 공간의 역설적인 유사성을 강조한 반면, 이강욱의 최근 회화들은 이러한 대립적 세계들 내에 내재하는 일종의 우주적 질서를 탐색하는 듯 하며, 이는 통제된 듯 하면서도 자연발생적으로 등장하는 패턴과 형태들이 화면 안에서 작가의 기본 구도를 확장시키는 모습으로 발현된다. 작품들은 작가가 처음 제시한 추상적 형태들을 보존하면서도, 이를 잇는 자연스러운 전개, 유기적이면서도 질서있는 후속 성장에 의도적으로 가능성을 열어주고 있다. 나아가, 이강욱은 최근 작품들에서 손짓과 몸의 흔적이 강하게 남은 연필 선들을 통해 자신의 물리적 존재를 회화의 표면에 남기기도 한다. 회화는 매체 자체의 한계로 인해, 통제되어 있으면서도 열린 형식의 창작을 추구하는 작가에게 있어 적합한 매체로 자리잡는다.
작가가 스스로 언급하는 최근 작품들에 대한 해석 또한 작품에 등장하는 변화들을 설명해준다. 고대 힌두 철학의 텍스트인 ‘우파니샤드’에 대한 그의 관심은, 특히 세계관의 측면에서 중요한 통찰력을 제공한다. 우파니샤드에 따르면 세계를 인식하는 데는 보편적 정신을 의미하는 ‘브라만’과 개별적 자아를 의미하는 ‘아트만’이라는 두 주요 개념이 존재한다. 브라만과 아트만이 하나이자 같은 것이라는 가르침은, 우파니샤드가 인류의 정신에 기여한 가장 큰 공로라고 흔히 받아들여진다. 반대되는 것처럼 보이는 것들간에 내재한 통일성, 가장 보편적인 것과 가장 개별적인 것이 궁극적으로는 하나라는 가능성은, 특히 이강욱이 수년간 물어왔던 질문에 중요한 답을 제공한 듯 하다.
그가 런던으로 거주지를 옮긴 것과 마찬가지로, 힌두 철학에 대한 그의 관심 또한 이강욱의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는 단편적이고 부수적인 측면일 수 있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이러한 철학을 통해 작가가 우주의 대립적 세계에 대한 문제에 다시 접근하고 있다는 점, 이러한 이해 속에 작가의 존재 또한 세상의 모든 크고 작은 것들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는 점이다. 작가의 이전 회화들이 우주의 불가해한 측면을 역설적 이원론으로 재현하고 있었던 데 반해, 그의 최근작들은 작가가 우파니샤드를 통해 경험한 깨달음의 순간, 인식불가능한 우주 안에서 자아의 지식을 얻어낸 순간을 표현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이러한 해석이 보는 이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을 수 있으나, 세계 속에서 자신의 자리를 인식하고 회화를 통해 이러한 인식을 소통하고자 하는 작가에게 있어, 이는 참으로 중요한 문제일 수 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