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주리
안경에 대한 명상
2003년5월, 황주리
내 어릴 적 사진 속의 아버지는 늘 선글라스를 끼고 계셨다. 알이 커다란 검은 레이방 선글라스를 낀 젊은 아버지‥‥…그 오래된 선글라스의 기억이 아버지의 유품으로 완결되던 순간을 기억한다. 낡은 흑백 사진 속의 아버지도 어릴 적도 나도 이제 모두 사라져 없지만, 더 이상 낡지도 않은 채 그대로 남아있는 아버지의 선글라스.
사물의 기억보다 오래가는 것이 있을까? 시간과 공간과 마음을 뛰어 넘는, 아니 그 모든 것을 뭉뚱그려 한데 간직한 채 홀로 남는 사물의 끈질김에 섬뜩해질 때가 있다.
나는 사람이 죽을 때 남기는 유품 중에서 유독 안경이 마음속에 남곤 했다. 문득 김 구 선생의 동그란 안경이 떠오른다.
사람이 죽으면 누구나 몇 개의 안경을 남긴다. 그가 노년에 썼던 돋보기 안경과 젊은 시절 눈부신 태양을 쏘아보았던 선글라스와, 서랍 깊숙한 곳을 뒤지면 몇 개쯤의 안경이 더 나올지도 모른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도, 내게 가장 친숙한 이미지로 남은 유품은 백년 가까운 긴 생애 동안 할머니가 쓰셨던 몇 개의 낡은 안경들이었다.
그렇게 각별하게 간직하게 된 돌아가신 아버지와 할머니의 안경들 외에도, 내가 쓰던 안경들과 친구 친척들의 낡은 안경들을 무심코 모아왔다. 그러나 그것들이 내 작품의 일부가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몰랐다.
내가 맨 처음 안경을 쓴 건 중학교 이학년 때었다.
초등학교 일 학년 때도 사실 난 중간자리 이후에 앉으면 칠판 글씨가 잘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은 늘 눈이 좋은 아이와 자리를 바꾸어 주셨다.
어머니는 내가 눈이 나쁜 게 아니라 보는 법이 잘못된 거라고 생각하셨다. 그때만 해도 안경을 쓰는 꼬마들이 전무했던 때라, 게다가 부모님 두 분이 다 눈이 좋은데 어린 딸이 눈이 나쁘다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사람마다 보는 법이 달라서 아마도 내가 볼 수 있는 건 다른 사람은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들곤 했다. 그러나 아무리 고개를 삐딱하게 하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바라보아도 칠판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다. 이후 나의 눈은 보는 법의 문제가 아니라 난시가 심한 근시로 판명되었다.
1991년 가을, 나는 폴란드 여행길에서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찾았다. 그 잔인한 추억의 장소에 들어선 순간, 유태인들이 수용소에 들어오자 마자 빼앗긴 안경들을 가득 쌓아놓은 거대한 안경 무덤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것은 내가 이제껏 본 그 어떤 미술 작품 보다도 가장 슬픈 흔적을 지닌 가장 강력한 설치 작업이었다. 그 거대한 안경 무덤을 본 순간의 충격은 내가 아주 오래 전부터 무의식적으로 계속해온 안경수집이라는 행위와 접합되었다.
아우슈비츠를 다녀온 이후 나는 내 안경들에다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모든 사람의 시력은 다 다르다는 의미에서, 인간의 눈은 몹시 개인적인 의미를 지닌다. 우리는 남의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볼 수는 없다. 눈이 좋은 사람들도 강렬한 햇빛을 가리기 위해 선글라스를 쓴다. 누군가 선글라스를 썼을 때, 우리는 그의 눈을 들여다볼 수 없다. 그것은 일종의 은닉행위이기도 하다. 선글라스는 스스로를 타인에게 드러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익명의 존재로 만들어주기도 한다. 아니 선글라스를 쓰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라이프 스타일의 일부가 된지 오래 이다.
내가 모은 안경들과 선글라스들 중 어떤 것들은 내가 모르는 사람들의 것이다. 그것들은 때로 끝없이 변화하는 안경 모양의 변천사를 보여주기도 한다. 그들 중 어떤 것은 오래된 골동의 가치를 지닌 값비싼 안경들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들도 있다.
안경들은 그 물질적 가치를 스스로 드러내며 안경을 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간직한다.
내게는 맑은 안경알들과 검은 선글라스의 알들 모두 아주 훌륭한 작은 캔버스가 된다.
안경알에 그림을 그릴 때 마다 그것이 원형이든 사각이든 그것은 그 자체로 하나의 방이 되었다. 나는 안경의 렌즈가 그렇듯 이 세상이 수많은 원과 사각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안경 알 하나 하나마다 카메라로 스냅 사진을 찍듯 매일 매일의 도시적 삶을 그려 넣는다. 그림을 그려 넣은 안경들은 끼리끼리 모여서 서로 대화하며 웅성거리기 시작한다. 벽에 걸린 안경들은 사람의 눈을 통하지 않고 제 혼자 세상을 바라보는 의인화된 존재들이다. 살풍경한 도시 문명의 풍자인 동시에, 내게도 당신에게도 있었을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가버린 시간들에 바치는 몹시 개인적인 명상의 자리에 당신들을 초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