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수남
남천의 근작 : 안의 구조와 명상의 깊이
남천(南天) 송수남(宋秀南)이 수묵화에 매달려 온 지도 20년이 훨씬 넘는다. 이 말은 그가 수묵화를 시작한 때로부터의 연륜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일념으로 수묵화에 매진해 온 시간대를 이름이다. 80년대 초 수묵화 운동의 중심에 있었던 그는 이 운동의 열기가 식어지던 80년대 중반 이후는 다시 개인 단위로 이 운동에서 획득된 공감과 확신을 내면화하면서 자기심화의 길로 들어섰다. 그는 수묵이 지니는 다양한 매재적 가능성과 그 내면에 깃든 고유한 정신세계를 추적하는데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보이고 있다. 일견, 수묵은 대단히 단조로운 매재로 인상된다. 수묵에 한계를 느끼고 있는 많은 한국화가들의 심정적인 내면도 단조로운 매재로서의 인식에서 못 벗어나고 있다. 더욱이 물질로서의 매재의 다양한 수용이 확대되고 있는 현대에 있어 수묵은 많은 한계를 스스로 내포하고 있는 듯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묵이 이상한 매력으로 우리를 끌고 있는 것은 선험적인 매재로서의 인식에서 뿐 만 아니라 예술이 종내는 모든 물질을 탈각한 정신에의 환원이라는 의식에 근거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수묵만큼 절제와 환원의 속성을 지닌 영역도 따로 없다. 오랜 세월을 거쳐 한국인의 정신세계의 밭을 가꾸어 온 매개로서의 수묵에 대한 자각이 일부 예술가들 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은 여간 다행한 일이 아니다. 남천의 수묵화에 대한 집착도 이에 근거된 것임은 말할 나위도 없다. 그가 이번에 발표하는 근작도 과거의 작품과 크게 괴리되는 것이 아니다. 일정한 선획의 반복을 추구했던 작품의 연장선상에 있다. 단 그것이 더욱 내밀한 구성을 획득하고 있다는 심화의 양상을 점검할 따름이다. 그의 작업은 일견 단조롭기 짝이 없어 보인다. 일정한 방향으로 진행되는 단속적인 선획의 집적이 구성의 기본이자 동시에 전체로 귀결되기 때문이다. 일정한 두께로 구획된 칸 속에서 빼곡하게 밀집된 선획의 집적은 촘촘히 엮어진 직물의 단면을 확대해 놓은 것 같기도 하고 원삼국시대의 토기 표면에 시술된 빗살문을 보는 느낌이기도 하다.
어디에서고 작위적인 수단은 찾을 수 없고 그저 무심코 그려나간 행위의 무상성만이 기념비적인 공간을 일구어내고 있을 따름이다. 하나의 선이 그어지면 자연스레 여기에 반응하는 또다른 선이 유도된다. 선들은 서로 밀쳐내면서 동시에 서로 비비듯이 밀착한다. 초묵에서 농묵으로 이어지는 농담의 변화가 기계적인 반복을 벗어나는 내면의 숨결을 일구어내면서 결곡한 구성에 상응되고 있다. 안으로 잠겨드는 내밀한 구조의 울림이 화면 전체로 번져나간다. 변화 없음에서 변화를 유도하고 변화 속에서 절제를 가다듬는다. 선은 자기해방을 통해 확산되고 동시에 자기통어를 통해 환원의 논리에 부단히 부응한다. 화면은 빼곡한 선획으로 차 있고 동시에 반복의 무념으로 비어있다. 호흡은 단속적이지만 긴 띠를 이루면서 무한으로 닿는다.
운필의 작동은 이제 단순한 표현의 장이 아닌 자신을 가다듬는 고른 호흡의 명상의 깊이에 대응된다. 남천의 작업은 수묵이 지니는 안의 구조에 깊은 신뢰감을 잃지 않으면서 조심스럽게 밖으로의 표현에 다가서는 인상을 준다. 그것은 수묵이 지니는 매재적 속성을 제대로 이해하고 있음에서 나올 수 있는 태도에 다름 아니다. 그의 수묵이 많은 사람들에게 공감을 지니고 많은 후진들에게 영향력을 지님도 이에 근거한다.
오광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