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의 꿈과 낭만
한국인의 꿈과 낭만: Park Soo-Gun, Lee Chung-Sup, Kim Whan-Ki, Chang Ucchin
최광진/미술평론가
많은 사람들은 오늘의 사회를 역사상 최악의 시기로 진단한다. IMF를 겪은 이후 경제는 좀처럼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정치는 여전히 후진성을 면치 못하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의 발달에 따른 사회 규범은 마련되지 못하고, 각종 새로운 위협 속에서 불안과 위기의식이 고조되고 있다. 그러나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오늘의 위기는 경제적인 이유도 정치적인 이유도 아닌 듯하다. 우리 역사를 되돌아 볼 때, 지금처럼 경제적 풍요와 자유를 누리는 시기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거보다 정신적 공황과 불안을 강하게 느끼는 이유는 그러한 외적 조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입증한다. 최근 급격한 사회 외적 조건의 발달과 반비례하여 우리의 내적 정서는 황폐화되었고, 그 간격이 점차 커지면서 생기는 내적 소외현상이 오늘날 위기의식의 실체라고 진단된다. 따라서 지금 우리에게 절실한 것은 경제 회복이 아니라 우리 조상들이 지녔던 고귀한 정서를 회복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번 전시회는 한국 근대기를 살면서 우리의 전통적 정서를 가장 잘 승화시킨 작가로 평가되는 4인의 작가를 통해 사라져가는 우리의 미감을 조명하자는 의도로 기획되었다. 현실적으로 우리의 근대기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역사적으로 가장 불행한 시기에 해당된다. 이번 전시회에 선정된 박수근, 이중섭, 김환기, 장욱진은 그러한 극심한 사회 불안과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의 독특한 정서를 조형언어로 승화시킨 대표적인 작가들이다. 양식적인 측면이 아니라 정신적인 특성으로 볼 때 이들은 하나로 묶을 수 있는 고리가 있고, 이들이 꽃피운 독특한 꿈과 낭만, 그리고 여유와 해학은 극도로 혼란한 외적 조건에서 이루었다는 점에서 오늘날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들은 모두 서양화 도입기의 단순한 재료와 기술의 습득 차원을 넘어 자신들의 독특한 정서를 실현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고, 또 그것이 한국인의 미감을 대변하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더욱 소중한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작품은 유화를 사용했다 하여 서양화로 분류되지만, 정서적으로 보면 명백히 한국적이고 한국화라 불려야 마땅한 작품들이다.
사실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매체에 의한 장르의 구분은 재고되어야 한다. 지금은 종이와 먹, 붓, 등 전통적 재료와 매체를 사용한 작품을 한국화라고 하지만, 매체만 가지고 따진다면 이러한 그림은 중국화라고 불러야 한다. 이러한 명칭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굳이 한국화라 부르려면 이에 상응하는 특징이 있어야 한다. 재료와 매체는 필요조건은 될 수 있으나 충분조건은 될 수 없으며, 그 한국화라 부를 수 있는 조건과 기준은 ‘미적 정서’가 되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사실 한국미술은 양식사로서보다 정신사로서 접근할 때 가치가 살아날 수 있다. 이제는 모두 고인이 되었지만 이들의 작품 속에 스며 있는 미적 정서의 실체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그려보임으로써 우리의 본 모습을 새삼 확인하고 오늘날 우리의 좌표를 재설정하는 노력이 우리에게 절실해 보인다.
박수근: 소박미(素朴美)
이 네 명의 작가 중에서 우리의 독특한 정서를 파악하기에 가장 용이한 작가는 박수근(朴壽根, 1914-1965)이다. 그의 작품은 일단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독특한 개성이 있다. 절제되고 담백한 회갈색으로 두텁게 올라온 화면은 세련되지도 화려하지도 않지만 오랜 풍파를 거친 화강암이나 낡은 벽화처럼 담담하고 은은한 정서를 환기시킨다. 이러한 표면에 풍경이나 서민들의 모습이 단순화되어 평면적으로 배치된다. 거기에는 대상을 정확히 묘사하려는 집착도 자신의 울분을 토해내는 격렬함도 없다. 또 남에게 과시하려는 욕심도 계몽하려는 구호도 보이지 않는다. 선이 있으나 기교가 없고, 색이 있으나 튀지 않는다. 그저 담담한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사람들은 무언가를 한다. 아이를 업거나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걸어가는 아낙네, 절구질하는 여인, 거리에 무심히 앉아있는 노인들, 농악놀이 하는 사람들, 공기놀이를 하는 어린이들 등, 모두 당시 평범한 서민들의 모습이다. 그들의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잎사귀하나 남지 않은 앙상한 고목나무는 당시의 궁핍하고 암울한 시대상황을 암시하는 듯 하지만, 사람들은 그저 무심히 무언가를 할 뿐이다.
이러한 정서에 가장 부합되는 가까운 단어는 ‘소박’(素朴)이 아닐까 한다. 소박이라는 단어는 우리의 일상언어로 자주 쓰이지만 그 개념을 헤아리기가 쉽지 않다. 사전적 의미로는 “거짓이나 꾸밈이 없이 순수하고 자연스러움”을 가리키지만, 그것은 개인의 인위적인 욕심과 사심이 제거되었을 때 도달될 수 있는 경지이다. 그것은 정복이나 개척 같은 인간의 욕망이 가미된 불완전한 의지가 아니라, 대자연의 질서를 그리워하고 이에 순응하려는 수준 높은 정서이다. 따라서 소박함이 지향하는 순수함과 자연스러움은 인간이 최고의 경지에 다다랐을 때 가능한 수준 높은 정서이고 우리민족이 전통적으로 그리워했던 지향점이기도 하다.
그는 현실적 어려움 속에서도 소박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해 감동을 받았으며 그것을 조형으로 담고자 하였다. 그가 어려서부터 밀레를 좋아했던 이유도 밀레의 작품에는 평범하면서도 진실되고 소박한 삶을 살아가는 서민들의 모습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의 선함의 진실함을 그려야 한다.”는 것을 평생 자신의 예술철학으로 삼았다. 여기서 ‘선함’은 대자연의 질서에 순응했을 때 가능한 소박의 경지이고, ‘진실함’은 그러한 상태에 도달하기 위한 자질과 토대가 된다. 그는 그러한 삶을 그리워 했고, 그러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고자 했다. 그가 노점에서 생선을 살 때, 한 사람에게 사지 못하고 여러 사람에게 한 마리씩 샀다는 일화는 그의 따뜻한 심성과 인간애를 짐작케 한다. 이러한 심성이 요즈음처럼 물질적 풍요 속에 싹튼 것은 결코 아니다.
이중섭: 천진미(天眞美)
이중섭(李仲燮, 1916-1956)의 작품은 유화를 사용하지만 동양화를 연상시키는 힘찬 선과 속도감 있는 필력이 특징을 이룬다. 그런 측면에서 미술사적으로 표현주의의 혈통에 닿아 있지만 서구의 표현주의자들과 다른 독특한 낭만이 있다. 그것은 특히 <가족도>를 그린 작품에서 잘 드러난다. 그는 자신과 부인, 그리고 두 아들을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겼는데, 이들은 모두 평면적이면서 특이한 자세로 뒤엉켜 있다. 이들은 대개 옷을 벗은 상태로 특정부위가 변형되는데, 엉덩이가 하늘로 치솟기도 하고, 고개가 완전히 돌아가기도 하며 천진난만하게 어우러진 모습이다. 여기에 가끔 비둘기나 닭, 물고기 같은 친근한 동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도 인간과 동등한 자격으로 하나로 어우려져 있다. 거기에는 성별이나 나이가 무의미하고 인간과 동물의 구분도 없는 모두가 평등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된 순수한 세계이다.
이것은 천상에서나 누릴 수 있는 천진무구한 순수한 세계이자 그가 그리워한 꿈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역설이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에서 그와 정반대의 사회를 살았기 때문이다. 그가 산 시대는 일제시대와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인권은 바닥을 쳤고, 전쟁 직후 무일푼으로 월남한 그는 너무 가난하여 처자식을 일본으로 보낼 수밖에 없는 처절한 상황을 경험해야 했다. 그가 또 하나의 주제로 많이 그린 <소> 시리즈는 그러한 현실에 대한 저항의식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작품들이다. 붉은 배경에 울부 짓는 듯이 고개를 쳐들거나 미친 듯이 돌진하는 소의 모습은 순수함이 상실된 현실에 대한 자신의 저항이자 민족의 애환을 상징하고 있다. 그의 작품은 이러한 꿈과 현실의 양면성이 대립구조를 이루면서 강한 긴장을 자아낸다. 그가 궁극적으로 지향했던 세계는 모든 이념과 인종, 계층간의 갈등이 사라지고 원초적인 에너지가 평등한 조건으로 만나 기쁨으로 어우러지는 천진난만한 세계이다. 이것은 계산적이고 이타적인 감정을 버리고 원초적 순수함을 통해서만 도달될 수 있는 경지이다.
실제로 그는 그러한 순수함과 천진난만함을 지닌 인간이었다. 그는 내성적이었지만 언제나 약자 편에서 있었으며 불의를 보고 참지 못하였다. 그의 지인들은 그를 “천사가 지상에 잠깐 다녀갔다”는 말로 그의 천진함을 표현 하였으며, 그럴수록 세상과의 괴리가 컸다. 그의 꿈을 펼쳐보일 곳은 그림 밖에 없었기 때문에 어느 상황에서 어느 재료든지 쉬지 않고 그림을 그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현실과의 괴리는 정신분열로 이어져 입원비도 갚지 못한 채 병원에서 무연고자로 쓸쓸하게 사라졌지만, 그가 지향한 숭고한 천진미의 세계는 시대를 초월하여 우리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김환기: 격조미(格調美)
김환기(金煥基, 1913-1974)는 50년대 이후의 작품에서 자신의 독특한 정서를 펼쳐보인다. 30년대 일본 유학시절에는 서구 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아 추상화를 시도하여 한국추상회화의 선구자로 남아있지만, 50년대 들어서는 그러한 조형상의 실험보다 한국적인 정서에 대한 관심을 드러내고 있다. 이 시기 그는 백자 항아리, 달, 여인, 매화, 산, 나무, 사슴, 구름 등 전통적인 소재를 검은 윤곽선을 사용하여 평면적으로 배열하면서 화면을 구성하였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서 정서를 느끼게 하는 것은 그러한 소재에서보다 선이나 색에서이다. 그의 선은 기하학적이지도 않고 심한 왜곡도 없다. 직선이나 곡선을 지향하되 기하학적이지 않고 비대칭적이고 자연 만큼의 미묘한 틀어짐이 있다.
그러한 선의 미감은 도자기 같은 전통미술에서 중요한 특질로 자리해왔다. 사실 그는 한국도자기에서 많은 영감을 받았으며, 도자기를 무척 좋아하여 그의 집안을 온통 도자기로 장식하였다. 그는 거기서 자연의 서정을 읽었고 자연의 체온을 느꼈다. 특히 그는 우리 백자 항아리가 갖고 있는 달덩이 같은 푸근함과 고요한 움직임, 따뜻한 체온, 미묘한 색감을 평면으로 전향 시켰다. 그는 백자나 문인화에 느낄 수 있는 속되지 않는 고귀한 품격과 멋을 그리워 했다. 단순하나 간단하지 않고, 고요하나 정지하지 않으며, 법이 있으나 얽매이지 않고, 화사하나 촌스럽지 않은, 그러면서 모든 것을 흡수할 수 있는 후덕한 큰 맛, 이것이 김환기가 추구한 격조(格調)의 세계이다. 그것은 인간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도달할 수 없는 세계이며, 인간의 주관과 자연의 객관이 하나되어 탄생시킨 중성적인 무엇이다.
그는 “가장 세계적인 것이 가장 민족적인 것”임을 믿었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나온 70년대 <점>시리즈는 모노크롬이라는 모던 시대의 보편성을 따르면서도 격조와 낭만적 정서를 잃지 않았다. 모든 형태는 점으로 환원되었고 뉴욕의 도시구조 같은 사각형들이 점들을 에워싸며 화면을 가득 채웠다. 여기서도 차가운 기하학은 등장하지 않으며, 마치 수묵화를 연상시키는 번짐 효과로 따스한 체온과 고요한 울림을 담아내었다. 그가 작품 제목으로 즐겨 사용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라는 시적인 문구가 암시하듯, 그는 도시화된 삭막한 뉴욕에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의 시정(詩情)을 밤하늘의 별처럼 영롱한 점을 통해 펼쳐보였다. 그가 뉴욕에서 작고할 때까지 그토록 그리워한 고향은 물리적 공간으로는 서울을 가리키지만, 보다 심층적인 차원에서 보면 격조 있는 탈속의 세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장욱진: 단순미(單純美)
흔히 장욱진(張旭鎭, 1918-1990)의 작품을 어린이의 그림에 비유하곤 한다. 어린이 같은 순수한 상상과 단순하고 치졸해 보이는 형태 때문일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소재도 다소 유아적이다. 해와 달, 나무가 있는 한가한 동네 풍경에 자신의 자화상이나 가족의 모습이 등장하고, 소나 새, 개 같은 인간과 친근한 동물들이 어울린다. 그것들은 모두 자신의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평범한 것들이나 본래의 크기와 위치를 벋어나 자유롭게 구성되는 점 역시 아동화에서 흔히 보여지는 특징이다. 이는 그의 의식이 어린이 같은 단순하고 천진난만함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에 나오는 형식이지만 간단히 아동화로 치부될 수 없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것은 단순함에 대한 철학적 깊이이다. 그는 항상 “나는 심플하다”고 말하고 했다. 그가 말하는 단순은 어린이들처럼 경험 이전의 원초적인 단순과는 다르다. 그것은 모든 다양하고 복잡한 개별현상을 감지하고 이를 종합하고 통일하는 수준에서 획득된 것으로서 복잡과 대비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포용하는 개념이다. 결과적으로는 비슷하지만 그 단순함이 함의하는 수준은 매우 다르다. 그것은 어려서부터 줄곧 시골에만 살아 단순한 생활을 하는 사람과, 복잡한 도시에서 온갖 체험을 하고 노후에 전원에 대한 가치를 깨닫고 귀향한 것과는 같은 시골 생활이라 하더라도 그 가치가 다른 것과 마찬가지다. 실제 그는 자신의 삶 자체가 심플해지고 순수해지기를 바랬다. 그래서 남들이 선망했던 서울대 교수직(54년-60년)도 버리고 덕소, 수안보, 신갈 등지를 옮겨가며 오직 그림에만 전념했다. 그는 찾아온 제자들과 술 먹는 것을 즐겼으나 자신에게 엄격하여 새벽에 일어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잊지 않았다.
단순함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순수하고 관조적이어야 한다. 그는 수필에서 “많이 알고 깨달아 행하는 것이 우리 생활일진대 안다는 경지가 밑바닥부터 알고 촉감부터 알아야 할 것이며 모든 것을 알기 위해서는 모든 사물을 철저히 보아주어야 한다.”고 적고 있다. 여기서 철저히 본다는 것은 편견이나 잡념 없이 보는 것이고 이것이 순수한 상태로서 이를 통해서만 생명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었다. 우리가 관습적으로 사물을 볼 때 자기식으로 보게 되어 실제 생명의 미묘한 약동과 울림을 감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의 작품에는 작고 단순한 그림에는 언제나 이러한 미묘한 약동과 울림이 있다. 그래서 밀도가 섬세하고 촉감적이며 체온이 느껴진다. 그는 이러한 느낌을 담는데 캔버스가 커서는 안된다고 생각하여 작은 것을 신조로 삼았다. 그의 엄격한 구도과 치밀한 밀도에 회화적 활력을 주는 상식적 크기와 위치를 역전시키는 독특한 상상력이다. 이러한 해학적인 변형은 그만의 독특한 낭만으로 모든 억압과 속박이 사라지고 시간의 제약이 없이 한가로우나 명상적인 무욕의 꿈을 실현한 것이다. 또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이나 짐승의 단순한 표정은 욕심과 아집에 빠지고 무언가에 쫒기고 불안과 공포에 떠는 현대인에게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귀중하게 다가온다.
그의 작업에서 “오래된 이미지들”은 그것을 처음 만들고 작업한 당시의 시간이 정지된 듯 이 위치하고 있으며,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식의 이미지가 그의 전달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안내된다. 이 이미지는 하나의 상징처럼 많은 시간을 거치면서 변형되기도 한다. 첫번째 이미지를 만든 사람의 의도가 강화되기도 하고, 전혀 다른 느낌으로 전달되기도 한다. 그것을 만든 사람의 의도가 전달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 때 그 첫번째 이미지는 그의 작업에서 하나의 생명력을 갖게 되는데, 그 생명력은 시간에 대한 새로운 인식에 근거한다. 이 발견된 이미지들은 발견 이전부터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서 존재해왔다. 이 곳에서 그는 “선택이라는 간섭”을 통하여 첫 번째 이미지를 만든 사람을 만나고 있으며, 첫 번째 이미지를 만든 사람의 의도와 깊은 관련 없이 과감하게 변용시켜, 새로운 이미지로 활용한다.
이러한 활용에 있어서, 그의 솜씨는 아주 예민하고 치밀하게 작용하는데, 첫 번째 이미지를 그대로 활용하면서, 그것과 더불어 그가 만든 새로운 오브제적 이미지를 자연스럽게 무명화 시킨다. 이 무명화는 이미지라는 관념에 의해 화석화된 이미지를 향하여 새로운 생명과 이름을 부여하는 과정이다. 또한 이 의도를 강조하기 위해 기존의 패러디 기법과 더불어 익명화라는 기법을 사용한다. 여기서의 무명화는 이름이 없음을 의미하며, 익명화는 무명이라는 이름을 가진다는 의미이다. 이러한 한만영식의 패러디는 시간의 문제를 병치 시킬 때 적용될 수 있는 창의적인 기법이다. 또한 이 기교적 방법에 의해서 새로운 공간적 해석을 시도하는데, 이 새로운 공간에 불리워진 이미지들은 캔버스라는 평면속에서 입체화된 형식으로 보여지기도 하고 또 다른 평면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그 이미지들은 다빈치의「모나리자」, 미켈란젤로의「다비드상」, 마사치오의「낙원의 추방」, 보디첼리의「비너스의 탄생」, 베르미어의「부엌의 하녀」, 고야의「나체의 마야」, 모딜리아니의「나부」, 정선의「인왕제색도」, 신윤복의 산수화와 속화, 고구려의 고분벽화의 주작도, 수렵도, 행렬도, 민화 속의 호랑이 그림, 마릴린 몬로의 얼굴, 가야의 갑옷, 병마도용, 목기처럼 보이는 오리, 잡지와 사진 등이다. 그는 이처럼 이미 알려진, 발견된 이미지들의 본래 성격을 적절히 인정하면서, 그의 잠재의식의 통제를 통과한 경우에만 사용한다. 이 통제력이 바로 한만영의 창조 의식으로서의 조형 어법이다.
그의 작업에서 “오랜 시간을 머금은 오브제들”은 이미지가 아닌, 쓰임이 있는 것들이다. 그 오브제는 현의 활대, 철사나 와이어, 종이부조, 만든 나무상자, 텔레비전, 레코드판, 시계태엽, 모래시계, 바이얼린, 책, 만든 도용, 유리, 거울, 오래된 나무, 시가상자, 나뭇가지, 전화 수화기, 깃털 등이다. 이러한 경우, 그의 캔버스는 그림을 그리는 지지대가 아닌 하나의 단층적 상자나 오브제로서 작용되고 있으며, 그것을 더욱 강조하기 위해 비슷한 개념으로서 종이 부조를 만들어 종이 섬유질의 예민한 지층을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이때의 캔버스는 하나의 지지를 위한 필드로서 변화된 천이 아닌, 의식의 심층을 담아내는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다른 경우는 상자형식의 틀을 만들어 그 안에 사진의 이미지나 책을 붙이는 등, 혼성적인 오브제를 동원 한다. 평면과 입체, 현재와 과거, 동양과 서양, 오래된 것과 새로운 것, 만든 것과 만들어진 것들이 공존한다. 이 공존은 매우 복합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하나의 서술적 이야기를 만들고 있다.
이야기는 서술적이나, 그것을 해석하는 방법과 접근은 정지된 측면을 가지면서 기존의 시간 개념을 깨부수려는 시도이다. 이러한 시도에서, 한만영은 극단적인 기법과 대비적인 도래를 취한다. 부드러운 것과 딱딱한 것의 대비, 집적된 것과 표면으로서의 예민함, 공예적인 측면과 아주 회화적인 것의 대비 등이다. 이 대비는 빗을 수 없는 것을 빗어내려는 탐색 같기도 하며, 무명화와 존재상실 이라는 익명인으로서의 현대인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의 익명은 “인간은 존재”라는 성명성과 개체적 속성을 극명하게 기술하려 하고 있다. 고대벽화의 이름 모를 어떤 사람과 익명처럼 살아가는 현대인의 대비를 통해서 물리적 시간의 제한적 문제와 그 변형으로서의 만남을 시도하고 있다. 따라서 그 변형은 의식의 자유로운 변용을 통해서 이루어지며, 그 오브제들은 “시간의 간섭”을 무화 시킨다. 이 변용은 시간이라는 수직적 개념을 뛰어넘어, 시간의 중량을 진공의 상태로 되돌리는 기능을 한다.
이처럼 그의 최근 작업은 고요하나 움직이고 있는 하나의 가능태이며, 그 만들어진 오브제를 매개로 하여 시간을 복제하고 있다. 이때 그의 복제는 비슷한 유형과 형식을 반복하면서, “변형된 신화”를 만들어 낸다. 이것은 시간에 지배당할 수 밖에 없는 인간의 한계를 인정하는 행위이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한계는 한만영의 변형된 신화가 가질 수 있는 복제의 새로운 가능성이며, 기억의 현재형이 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