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동
열린 상상력으로 이루어내는 허무와 밤의 美學
– ‘삶이란 작은 고독의 상처들로 이루어져있다’ (롤랑 바르뜨) –
朴榮澤 성대•수원대 강사
Ⅰ.
이수동의 그림에서 우선적으로 접하게 되는 것은 고독의 세계이다. 황혼의 우아한 슬픔이 배경으로 자리한, 설경으로 휩싸인 고도의 산자락 혹은 허망한 외길 위에 위치한 인물이 전해주는 그 고독은 왠지 모르게 느리고 우울하다.
현실적 의미의 삶도, 근원적 의미의 삶도 모두 텅 비어있는 듯한 삭막한 풍경 속에는 이른바 ‘허무함의 미학’이 짙게 스며들어있다. 간결한 화면에 위치한 울적한 침묵은 절대적인 고독에 묻히기를 희망하는 동시에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내면의 세계를 서식시키고 있는데, 그 속에는 홀로이고 싶은 고독 그리고 추억의 힘과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면서 자기 연민의 애처로움 혹은 아려옴과 맞서고 있는, 아니 허물어지고 싶은 민감하고 섬세한 서정이 섬모처럼 반응하고 있다.
따라서 그의 그림은 내밀한 고백조를 띤다. 자기 노출을 통하여 자아를 반사하고 내면적 생활을 풍자 하는가 하면 내면의 공허를 토닥거리는 것이다. 내면을 탐구 하는 데는 그 고독이 필요하다. 자기 진정의 고백조 가락은 그래서 상상의 공간 속에서 오르내린다. 실상 그림이란 ‘열린 상상력’(바슐라르)의 소산이며, 열린 상상력이란 비일상적인 상상의 현실을 살고자 하는 의지인 동시에 감동하려는 정서적•공감적 의식의 산물이다. 이수동에게 있어 상상력은 바로 자신의 내면을 파고드는 그리고 자기를 아는데 필요한 유일한 도구에 다름 아니다.
왜, 무엇 때문에 작가는 절대의 고독과 내면세계 속에서 맴돌며 상상력에 기대는 것일까?
이수동은 체질적으로 외로움을 잘 타는 성격이라고 고백한다. 누군들 이 세상에 태어나 고독과 허무, 빈곤과 허기의 내상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마는 사실 예술가는, 작가는 그 누구보다도 이 고독과 단절, 불임과 소외의 세계와 싸우면서 타자와의 소통을 꿈꾸는 존재이다. 자기의 생존에 대한 이유 없는 불안을 뒤집어쓴 아웃사이더로서, 삶의 의미를 발견 하려는 데서 오는 절망에도 불구하고 그 의미를 찾아나가는 끈을 포기하지 않는 성찰적 니힐리스트로서 또한 민감하고 섬세한, 부드러운 감성을 지닌 휴머니스트로서 낭만주의자로서, 외로운 자유인으로서 자신의 삶과 고독, 추억 및 경험과 대결하는 자가 바로 화가인 것이다.
이수동 역시 그와 같은 속성을 예민하게 감싸면서 선천적인 고독과 외로움, 막연한 불안과내적 공허감 및 향수와 그리움이 혼재된 심리세계를 다소는 단촐하고 더러는 유약하게 표현해 내고 있다.
이수동의 그림은 얼핏 보아 동화적 상상력과 낭만성, 삽화적이며 캐리커처적인 단순성과 소박성•장식성 등을 몸에 지니고 있지만, 그 이면에 자리잡은 심리세계 및 그림을 통해 섬세하게 들춰내는 한 개인의 꿈꾸기와 추억 등은 지난 시대 우리미술계에서 지나치게 간과되어 오고 폄하되어 왔던 것들에 다름 아니며, 그에 따라 이 작가가 소중하게 드러내는 모종의 서정성과 순수성은 많은 것을 시사해주리라고 생각한다. 자연 친화적인 밝은 서정과 순수성의 세계는 그의 전 작품을 관통하는 중심축이다. 그러나 그것을 이 야만적 세계에 대한 병든 낭만주의적 감성만으로 치부하기에 오늘 우리는 너무 메마르고 건조하다.
실상 우리의 정신은 자질구레한 일상의 껍질에 갇혀서 우리의 참존재가 바라지도 않는 행위에 에너지를 소모하고 흥분한다. 그리고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을 보아도 그 순수를 느낄 줄 모르고 그저 구차한 사회적 알레고리로만 받아들이려는 정신의 폐쇄성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우리들은 오염된 정서로 무장되어 있다. 이러한 때 존재의 순수성을 강조한다는 것은 어느 면에서 현실감각을 상실한 환상주의라고 비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순수 존재의 아름다움 역시 이 세상의 존재 당위성이 의존 할 수 있는 바탕이 아닐까?
이수동의 서정은 무엇보다도 사물에 대한 민감한 감성과 나름의 상황성과 이야기를 상상해서 구축해낸 자연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진다. 그 서정은 바로 오늘 우리의 사회구조에서 벗어난 깊은 산골과 섬, 자작나무숲, 외길위로 풀어지는 것이다.
옛날의 전원시대를 벗어나 모든 것이 물질적 가치에 의해서 재단되고 그 의도에 따라 확대 재생산되는 이 전면적인 도시 산업사회 속에서 사람들은 산과 숲을 상실한 채 자족적인 도시공간의 미학에 길들여져 있다. 따라서 도시인들에게는 자연물로 환기되는 서정이란, 현실이 아니라 오히려 비현실에 가까운 것이다.
이수동의 그림 속에 위치한 산과 숲, 인물 등이 이루어내는 서정은 사실적인 자연물의 심상을 조립한 것이 아니라 미술이 만들어내는 환상의 심상을 조립한 것이다. 그 ‘스크린 위의 환각’은 자연적 서정의 비현실성을 오히려 강화하며 역이용함으로써 우리에게 익숙한 타성화 된 자연주의적 서정을 다른 기능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이 지점에서 그는 일련의 풍경을 그리는 구상작가들과 갈라선다. 그는 자연과 인물을 사실적으로 그려내면서 자연 친화나 모종의 서정성을 우려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의 환각과 기억, 경험으로 자연과 인물을 재구성(단순화•상징화)하고 그를 통해 강렬한 서정성을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사실 제대로 된 서정은 인간과 자연과 존재에 대한 애정과 무한한 경외감으로 충만 되어있다. 개인적 감상에만 매몰 되지 않고 개인의 감성을 세계에 대한 열린 정서로 받아들이는, 살아있는 서정성은 인간의 원초적 감성과 순결성을 응측된 힘으로만 간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구체적인 모습으로 풀어내는 것이다.
이수동이 그 비현실적인 자연의 서정을 탐구하는 까닭의 하나가 고통스러운 현실을 도피하거나 혹은 그 현실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려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잘못된 삶과 훼손된 욕망을 일깨우고 잊혀진 감수성을 회복시키려는 의도아래 이루어지고 있다면, 그의 순수와 서정의 세계는 제대로 된 서정의 길을 모색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Ⅱ.
유니크 하면서 세련되고 감각적인 데생력과 환상적이면서 통일된 색채감에 힘입어 곁은 문학성과 상징성을 띠고 있는 그의 순수와 서정의 세계는 단촐 하나 군더더기 없는 예리한 구성의 힘으로 이루어져 있다. 길, 섬, 풍경(태백인상, 자작나무숲), 남녀 간의 연정을 주된 테마로 설정하고 있는 그의 그림에는 감상적이고 예민한 신경의 흐느낌 같은, 그래서 세련되고 함축적인 여백의 맛이 차갑게 풍겨지는데 그 곳에는 어떤 고고함, 초연함 아니면 냉랭하게 그러면서 애틋하게 조여주는 모종의 시정이 짙게 흐르고 있다. 외형적으로 봐서는 어느 면에서 빈 분리파의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에서 엿보이는 양식적인 평면구조, 장식적 꾸밈, 심미적요소 그리고 센티멘탈하고 음산한 분위기 및 절제적인 선으로 세련된 감각을 불러 일으키는 윤곽선 등을 엿볼 수 있다. 아울러 소박하고 스산한 느낌을 주는 루소의 숲 그림이나 샤갈의 몽환적이고 환상적인 상황설정의 자유로움과 꿈의 세계 및 에곤 쉴레의 에로틱한 선과 추상적인 평면디자인 등의 요소도 일정 부분 검출되는 동시에 문인화의 정신과 여백의 미, 우리의 고분 벽화나 민화에서 차용한 시각 그리고 한국적 색채감과 우리의 정서에 부합하는 모종의 울림 또한 염두에 두고 이루어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그의 일련의 ‘길’그림은 처량하고 외로운 길이다. 그런가 하면 목가적인 순수함으로 위장되어 있는 듯한 가공의 길이기도 하다. 중성계통의 단색조 화면에는 가느다랗게 이어지는
길과 키큰 가로수, 달그림자, 부엉이, 언덕, 달려가는 여인의 뒷모습 등이 그려져 있다.
대개 가위에서 내려다 본 시각으로 설정되어 있는데, 세련되고 감각적인 구도와 환상적인 색채감이 함축성 짙은 여운을 농밀하게 간직하고 있다. 더욱 이 시선의 박진감을 강조하기위해 양 옆으로 비껴선 나무와 지평선의 위치를 화면 밖으로 잡아끄는데서 오는 돌발감은 한순간의 상황을 느닷없이 낚아채는 순발력 및 기억에의 민감한 집착을 반영하고 있다.
기억, 여정이야기, 해질 무렵, 갈대?,
귀향, 산행일기 등 그의 길 그림에 나오는 그 길은 어느 의미에서는 비탄의 길이다. 그 길은 어딘가로 우리들의 몸을 이끌어 간다. 그래서 떠남의 이미지로 읽히는 그 길은 다시금 돌아오고, 또 다시 어디론가 떠나는 순환적인 과정 속에서 미래는 없고 다만 현재화된 과거만이 존재하는 길이다. 작가는 그 위에 지난추억과 경험을 풀어놓는다. 너와 나를 이어주는 길의 속성상 그것은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이며 그자체인지도 모른다. 삶은 길 위에 있다는 말처럼 삶이 흔들리는 자와, 삶의 의미에 목말라하는 자는 집을 나서서 길을 떠나는 것이다. 이수동의 길 위로는 여인의 뒷모습이 조심스레 얹혀져 있다. 애처롭게 이어진 길은 그러나 끝내 가고야 말, 희망을 부여잡아야 할 길로 제시되고 있는 듯하다. 그것은 또한 절대
고독의 길이다. 누구도 대신 가줄 수 없는, 홀로 고독의 그림자를 끌면서 가는 길이다. ‘섬’
또한 그의 그림의 주된 소재다. 청색과 적색의 강한대비와 달의 이동과 순환이 한 화면 내에 공존하는 환상적인 화면에 외로운 섬 하나가 떠있다. 고독과 단절로 상징화 되는 작가의섬은 또한 일종의 이상향이자 유토피아이다. 꿈꿀줄 아는 자들에게 섬은 언제나 동경의 대상이었다. 그래서 현실이라는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격리되어 있음으로 해서 그곳에는 현
실에서는 불가능한 꿈과 아름다움이 서식하는 곳으로 인지되어 왔다. 그러나 그 섬에서의 모든 황흘과 아름다움은 철저한 격리와 고독 속에서만 존재한다. 작가의 고독과 허무, 그러면서도 회귀의 꿈을 버리지 못하는 의식의 단초가 섬 그림을 통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다.
“섬들을 생각 할때면 숨이 막히는 느낌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 난 바다의 시원한 공기며 사방의 수평선으로 자유롭게 터진 바다를 섬 말고 어디서 만날 수 있으며, 육체적 황홀을 경험하고 쓸 수 있는 곳이 섬 말고 또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는 섬에 가면(격리된다)-섬(fie)의 어원 자체가(혼자뿐인)인간, 섬들, 혹은(혼자씩일 뿐인)인간들.”(쟝그르니에) 길과 섬 그림 이외에 숲, 태백인상 및 일련의 풍경화에는 이수동의 특색이 보다 명료하게 드러난다. 흰 자작나무숲 그림은 길게 길게 자리한 자작나무와 숨겨진 여인의 모습 그리고 평면화된 장식적 화면 처리로 인해 달콤한 우수가 배어있는 아름다운 환상의 숲이다.
한편 일련의 풍경에는 설경 및 고요한 평야와 능선지역을 질주하는 한 마리 호랑이가 그려져 있다. 홀로 다니는 성격을 지닌 호랑이 역시 고독의 상징이며, 처량과 스산함을 암시하는 달 그림자는 이수동 그림의 특징인 ‘밤의 미학’을 대변한다. 중성적 색채의 덤덤함과 냉랭함, 텅 빈 화면과 설경은 또한 더할 나위 없는 허무감을 부추겨 준다.
태백인상 연작과 산 그림에는 작가의 고향(경북영천)근교의 험하고 높은 산에 대한 추억과 경험 및 일종의 외경감 그리고 왠지 지루한 슬픔을 반영하고 있다. 산속의 세계에는 산 만있을 뿐, 산과 나는 하나가 되고 세속의 홍진도 없다. 어느 의미에서 이수동의 산은 세속적 삶의 혼탁성으로부터 비껴난 풍경이다.
그런 면에서 그 산은 바로 진정한 존재의 참 진리를 발견하는 곳이 다름아닌 자연의 세계로서의 산이며, 이상향으로서의 산이라는 인식하에 자리한 산이다. 작가의 정체성회복의 열망은 바로 인간과 자연의 화해를 전제로 하면서 산속에 자리한 원초적 순수성의 세계로 몸을 뻗고 있는 것이다.
나무와 풀은 꿋꿋한 삶과 덧없음을 상징하는 가하면 바람과 달빛은 존재의 외적 조건으로 설정된다. 특히 해와 달은 원초 회귀를 연상시켜주는데, 그 둥금이 뜻하는 것은 모든 것을 감추고, 중심을 없애고, 해체하고 모든 것을 포용하는 둥금이다. 그것은 바로 존재의 결핍을 채우고 싶어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해와 달을 향한 작가의 그리움은 그래서 일상의 구체적 삶에서 벗어나려는 지향의 한 모습이자 시원에의 갈증이고, 그 아래 뒤뚱거리며 달려가는 여인의 뒷모습은 파악할 수 없는 이세상에서의 헤맴이다.
아울러 평면적인 색 면 처리와 단조로운 구성 속에 너무도 조용히 위치해 있는 풍경과 인물은 고요한 정적만이 흐르는 미묘한 분위기 속으로 잠수해 있는 듯하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비록 서양화풍의 그림을 그리지만, 그 방법론은 오히려 문인화에 기대고 있다는 데서 그 함축적인 화면이 전개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문인화란 다소 거칠게 표현하면 이형득의(離形得意),즉 사물의 외현적 형태를 떠나 그 속에들어 있는 정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 정신주의는 때로는 순진무구(純員無垢)의 세계를 지향하기도하고 무애자재(無碍自在)의 세계를 지향하거나 고절(孤絶)의 경지, 선적(的)인 세계를 지향한다.
이수동의 그림 속에는 그 같은 모종의 정신주의가 자리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그의 그림은 동양화의 여백을 적극활용(析技雲의 화면응용)하는가 하면, 지극히 절제된 색과 선으로 정신성에 충만한 심상의 이미지를 소박하게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