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성민
박성민 展
박성민의 아이스캡슐, 실재와 허상을 넘나드는 중도의 미학
글_김윤섭(미술평론가, 한국미술경영연구소장)
박성민 작가가 얼음조각을 작품의 주인공으로 선보인 것이 2002년 5월부터니까, 올해로 만 10년이 되었다. 그리고 박성민 작가를 처음 만난 것도 10년의 세월이다. 그동안 옆에서 지켜본 일명 ‘박성민의 아이스캡슐(Ice Capsule)’ 시리즈는 같은 듯 다르게 그 모습을 꾸준히 변모시켜 왔다. 얼핏 보면 단순히 극사실 화법의 얼음그림에 지나지 않은 듯하지만, 깊이 들여다볼수록 다양한 ‘볼거리’와 ‘읽을거리’를 발견해가는 재미가 쏠쏠하다. 짧지 않은 시간동안 꾸준히 인기와 인지도를 유지해오고 있는 ‘박성민의 얼음그림’이 풍기는 매력은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실상과 가상, 실재와 부재, 이성과 감성 등 상반되거나 동떨어지진 이중 혹은 다중적인 관점을 한 화면에 녹여내는 매력의 힘은 또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허상의 중도미학
박성민 작품의 첫인상은 사진과도 같은 실재감으로 눈길을 끈다. 하지만 그것이 정교하게 묘사된 그림임을 알아챈 순간 첫 번째 감탄을 자아낸다. 미술대학에서 디자인과 회화를 연이어 전공한 만학도의 숙련된 노련함이 돋보이는 순간이다. 최근엔 캔버스의 평면작품과 주요 형상을 알루미늄 판으로 따낸 작업을 동시에 선보이고 있다. 그러다보니 시각적 비주얼에 있어 사진과 회화의 경계를 넘어 입체조각과의 경계까지 넘나드는 형국이다.
역시 박성민 작품의 빼놓을 수 없는 매력은 모두 ‘100% 수작업’이란 점이다. 화가가 손수 그린다는 행위는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최대한 간편하고 편리함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의 실태를 미뤄본다면, (여성이 립 라인 그리는 아주 작은 크기의 1호 붓으로) 일주일 이상을 하루에 최소 12시간씩 투자해야 완성되는 그의 작품 앞에선 특유의 집중력과 장인정신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다.
최근 만나본 박성민 작가는 자신의 그림이 “중도(中道)적인 회화의 성향이길 바란다”고 전했다. 도자기와 만난 얼음조각 그림이 과연 ‘중도(中道)’와 어떤 연관이 있을까 싶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엉뚱한 소리도 아니다. 오히려 아주 적절한 해석과 비유일 수 있겠다 싶다. 그의 작품은 구상 초기단계부터 철저히 중도적이라 할 수도 있겠다.
단순히 평면회화인데 뛰어난 묘사력으로 입체감을 더해서만은 아니다. 재밌는 에피소드가 있다. 그의 작품이 2004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는 과정의 일이다. 박성민의 그림을 두고 기법으로 볼 때 어느 영역에 속하는가 물으면, 거의 대부분 (극)사실적인 구상회화라고 한다. 그렇지만 그는 ‘비구상’부문으로 대상을 수상했다. 최종 마지막 순간까지 심사위원 간에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음에도, 결국 영예의 대상을 놓치지 않은 결정적 이유는 ‘박성민 특유의 얼음 표현법’ 때문이다.
기본 형상이나 표면 재질감은 영락없는 얼음이지만, 그가 그린 얼음은 이 세상엔 존재할 수 없는 얼음조각들이다. 얼음은 태생적으로 고정된 틀에 액체인 물이 담겨져 고체로 굳은 상태인데, 박성민의 얼음은 적어도 다섯 면에서 식물줄기들이 자유롭게 들쑥날쑥 드나든다.
결국 박성민의 얼음회화는 극사실 기법을 차용하고 있지만, 초현실에서나 가능한 허구적인 연출인 셈이다. 있는 듯 없고, 사실인 듯 허구이며, 현실과 비현실의 모호한 경계에 서 있다. 그렇다고 박성민의 그림이 정확히 어느 영역에 속할까 연연할 필요는 없다. 적정한 수준의 혼선이 바로 작가가 제작의도이며, 최종의 해석은 보는 이의 몫이기 때문이다.
따뜻한 얼음과 힐링
박성민의 얼음그림은 따뜻한 기운을 발산하는 것이 또 다른 매력이다. 그의 얼음이 유독 따뜻하게 느껴진 요인은 몇 가지가 있겠지만, 무엇보다 먼저 푸른 생명의 기운 때문일 것이다. 싱싱하고 신선함이 돋보이는 식물들의 등장은 ‘가장 화려하고 정점에 오른 생명력’을 채집해 놓은 듯하여, 삶의 활력이 절로 난다.
약 5년 전부터 얼음조각과 함께 등장하는 도자기도 역시 한 몫 한다. 단순히 매끄러운 표면질감이나 정돈된 미감의 속성도 닮은꼴이지만, 바로 도자기는 물과 불의 만남이 빚어낸 최고 경지의 예술품이 아니겠는가. 이미 차가움과 뜨거움 그리고 도공의 예술혼이 혼연일체 되어 도자기가 태어나듯, 박성민의 얼음회화 역시 이 세상엔 없었던 전혀 새로운 개념의 얼음을 통해, ‘차가운 얼음에 묻힌 생명존엄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성민 작가가 처음 ‘아이스캡슐(Ice Capsule)’ 시리즈를 시작한 초기엔 작품제목에 ‘물질의 삼태(三態)’를 사용했다. 그의 얼음이 단순한 물체를 넘어, 물질의 기본 원성인 삼태(三態, 기체-액체-고체)를 대변한다고 강조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더 나아가 삼태(三態)를 ‘액체는 유기적인 사고, 고체는 고정된 기억, 기체는 망각의 존재성’ 등으로 비유했다고도 볼 수 있다.
또한 최근 작품에선 배경이 아예 없거나 빈 여백에 가깝게 텅 비어 있지만,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물(水)’과 관련된 요소들로 표현됐다. 가령 얼음덩어리, 물방울, 냇가나 바다 등까지 배경에 등장하곤 했다. 이렇듯 박성민에게 ‘아이스캡슐(Ice Capsule)’ 시리즈는 자연의 생태적인 생명주의나 삶의 아름다운 기억을 보관하는 감성적 서정주의를 동시에 표현하는 수단이 되고 있다.
“특별히 ‘무엇’이란 정의보단, 보는 관점에 따라 여러 해석이 가능한 그림을 그려가고 싶다. 얼음 속에 갇힌 생명은 언제든 되살아날 수 있는 휴면상태이듯,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는 그림이길 바란다.”
박성민의 말처럼, 그의 그림은 하나의 얼음조각 그림임에도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다. 요즘 트렌드의 대세인 ‘힐링’ 코드와도 상통한다. 우선 쉬운 예로 ‘아이스캡슐’ 속에 갇혀 있는 소재 중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청미래 넝쿨이다. 청미래는 박성민의 아이스캡슐 시리즈를 탄생시킨 결정적 소재이다. 처음 출발부터 함께 해서인지 작가의 ‘청미래 애정’은 유별나다.
실제로 청미래 넝쿨은 해독효과가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온갖 독을 푸는 최고의 명약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은이나 납, 카드뮴 같은 중금속의 독을 풀어준다고 한다. 또한 땀을 잘 나게 하고 소변을 잘 보게 하여 신진대사에도 도움을 준다고 하니, 박성민의 아이스캡슐 그림을 보고만 있어도 지친 육체와 정신까지 맑게 해줄 것만 같다.
그리고 최근엔 아이스캡슐을 담은 도자기가 평면 캔버스 고정 틀을 탈피해 독립된 형태로 선보인다. 이 역시 빈 여백에서마저 자유롭게 해방되어, 고유의 형상 자체만으로도 존재감을 부각시키기 위함으로 엿보인다. 특히 얼음 덩어리가 도자기를 가득 채웠던 구성에서, 일부만 채우거나 아예 텅 빈 그릇으로도 등장해 동양적 여백의 미를 자아낸다.
극과 극은 서로 상통하고, 채움의 욕구가 극에 달하면 다시 비워지듯, 박성민의 그림도 드디어 비움의 미학을 시작한 듯하다. 원래 얼음은 녹아 바닥에 스미고, 다시 그 물은 대기로 증발해 자연과 하나가 되는 것이 순리이다. 박성민의 그림도 옭아매던 배경의 틀을 벗고 진정한 자유를 얻었다. 더불어 그림 속에 점차 사라진 얼음의 무게만큼, 보는 이의 정신적 무게감을 덜어내 주고 있다. ‘아이스캡슐’ 시리즈 10년을 맞은 박성민의 다음 행보는 과연 또 어떤 변화로 우리의 기대감을 충족시켜 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