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규
Solo Exhibition
자연의 인간화
자연을 질서와 영원함의 상징으로 보는 화가 장이규의 자연관은 고도(古都) 경주의 계림 숲에서 형성되었다. 미술학도 지망생 어린 소년의 눈에 얽히고설킨 나뭇가지와 잎사귀, 그 사이로 힐끗 힐끗 비치는 하늘은 마치 풀어야 할 뭉쳐진 실타래처럼 비춰졌을 것이다. 미로처럼 형성된 대상을 어떻게 완벽하게 화폭 위로 재현해 낼 것인가? 소년을 당혹시키는 동시에 강한 호기심으로 몰고 간 이 문제를 풀기 위해 작가는 강산이 수차례 변한 세월 동안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연구를 멈추지 않았다.
장이규의 궁극적인 목표는 불안정하고 가변적인 자연환경을 조형적 질서와 내재적 조화로 충만한 화면 안에 순화시키고 이를 통해 미적 향수를 이끌어 내는 것이다. 이런 그에게 17세기 유럽 풍경화의 다양한 전통은 자연에 대한 성찰의 모델이 된다. 그 예로서 초월적인 명상의 세계를 지향하던 푸생(N. Poussin)의 신화적 풍경화, 빛과 색으로 가득한 시적 분위기의 자연을 추구했던 로랭(C. Lorrain)의 아르카디아(Arcadia)의 자연을 들 수 있다. 또한 높은 곳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것이 아닌 낮은 시점을 잡아 지평선을 강조하고 전경에서 원경을 자연스레 연결하는 그의 구도는 네덜란드 풍경화의 방법론을 상기시킨다.
고전지향과 이상적 풍경화의 전통은 오늘날 화단에서 구태의연하다 못해 오히려 경이롭게 느껴진다. 우리는 이미 오래 전 반 예술(anti art) 선언 이후 다양한 예술 영역 간의 구분이 사라지고, 나아가 예술과 비예술의 구분이 없이 삶 그 자체가 예술이 되어 버렸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전통 미학에 원리적인 문제를 제기한 반 예술 개념이 이렇듯 예술의 종식 대신 역설적으로 예술 영역의 확장과 소통을 가져오고 예술을 진일보시키는 결과만을 초래한 것은 아니다. 미술 본연에 대한 선입견과 고정관념을 부정하는 태도는 모든 사회적 금기에 도전하여 혐오의(abject) 미술로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렇게 급변하는 사회ㆍ예술 현상으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 장이규의 태도를 단순히 의고적인 자연주의를 향한 집착이라고 볼 수는 없다. 왜냐하면 그에게 자연은 진정한 창조적 진화의 매체이고 이를 통해 그는 일관되게 예술의 초토화와 비인간화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과 균제를 추구하는 작가의 의지는 독특한 질서 감각으로 충만한 화면을 창조하고 그 안에 인간과 자연이 서로 공감하며 융화되는, 즉 생명이 존재하는 비전을 제시한다. 질서정연한 그의 풍경화는 자연이 지닌 혼돈의 욕구가 정제되어 버린 상태, 즉 제들마이어(H. Sedlemeier)가 말하는 ‘자연의 인간화’ 상태에 이른 것으로 볼 수 있다. 현대인의 인간성 회복을 위한 자연으로의 회귀,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그의 고전적 자연주의 풍경화에 애정 어린 시선을 보낼 수 있다.
멀고도 가까운
장이규는 이번 전시에서 소나무, 전나무와 같은 상록수를 화면의 축으로 삼아 구성한 풍경들을 선보인다. 전통적인 풍경화 구도인 전경과 중경을 구분 짓는 공간이 생략된 화면에서 한 그루 혹은 일군의 나무들 뒤 산자락은 올 오버 방식으로 펼쳐져 있다. 이는 마치 나무에 포커스를 맞추고 줌 렌즈를 사용하여 배경을 가까이 혹은 멀어지게 하는 듯한 효과를 내며 본질적으로 적요한 그의 화면에 묘한 긴장감과 운동감을 부여한다.
비리디언에 흰색이 첨가되면서 점차 뿌연 청회색 톤으로, 비리디언에 검은색이 첨가되면서 점차 또렷한 암녹색 톤으로 변화하는 그의 팔레트 또한 은근히 밀고 당기는 유희의 연속선상에 있다.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넓은 배경과 최대한 낮게 자리 잡은 지평선 위 나무들 사이의 공간감은 이런 유채색과 무채색의 변주에 의해 달라진다. 때로는 선명하고 때로는 흐릿한, 이 멀고도 가까운 이미지는 우리의 시선을 그 안으로 끌어당기는 동시에 밖으로 내몬다.
거의 빈틈없이 점점이 채워진 녹색 계조의 색점들에 의해 대상의 형태가 드러나는 회화 공간에서 작가의 색채감각은 경쾌함과 가벼움 대신 중후함과 견고함을 찾는다. 그의 색채감각은 응축되어 있고 이것이 현재 그의 그림의 주제가 된다. 그의 예술 세계에는 이성과 이상미의 구현은 선적인 조형성에서, 그리고 감성과 본능의 거침없는 표현은 색채의 가치에서 비롯된다는 서양회화의 전통적인 선/색 이분법이 존재하지 않는다. 흔히 그를 정확하고 탄탄한 소묘 능력, 즉 선에 의한 데생에 기반을 둔 작가라 평한다. 그러나 초기부터 그는 선과 색, 이 두 시각적 상징 중 어느 하나에 치중하지 않았다. 데생을 하듯이 채색한다고 작가 스스로 말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색채는 그에게 화면을 치밀하게 구축해 나가는 유일한 요소이고, 색점들의 연장을 통해 형태가 완성된다. 응축된 색채감각으로 충만한 화면의 회화적 질서 그 자체가 그림의 본질이 되면서 점차 작가는 색채의 묘사적인 기능을 벗어나려고 시도한다.
상투적인 들과 산 풍광이 아닌, 과감할 정도로 화면을 가득 채운 산은 그림에 평면성을 부여하고 밀고 당기는 긴장감과 함께 회화적인 표면에 관심이 쏠리도록 한다. 이는 표면이라는 주어진 실체와 매체-물감의 역할이 중요함을 의미한다. 작가는 그림이 제작되는 과정에서 매끈하고 진득한 유화물감의 물성에 매료되고, 수평적 화면 대신 풍경화에서 드물게 사용하는 정사각형 캔버스를 사용하는 시도도 한다. 그림의 내용을 논의하는 대신 회화가 가진 물질적인 속성, 즉 물감과 캔버스 형태, 그리고 화면의 평면성을 실험하는 것은 바로 모더니티의 화신 그린버그(C. Greenberg)의 논지가 아닌가. 의고적인 자연주의에 근거한 작가 장이규와 모더니티의 담론을 연결시키는 것이 억지스러울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조금만 다른 시각으로 조형 형식에 대한 작가의 진지하고 꾸준한 탐구를 바라보면 이러한 연결이 결코 허구만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 바로 이러한 관점이 자연 외관의 충실한 재현을 뛰어넘어 캔버스라는 물질에 구현된 형식적 질서와 조화 감각을 추구하는 21세기 자연주의자 장이규의 독창성이라 할 것이다.
2006년 8월, 박소영 (미술평론, Paris I 대학 조형예술학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