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익환
한익환선생의 백자 달항아리
Ⅰ
우리나라는 항아리의 나라라고 불리 울 만큼 수많은 항아리들이 만들어져 사용되어 왔다.
생활상의 필요에 따라 容器로서 간장, 된장, 고추장이나 각종 젓갈류와 임시로 먹을 김치나 깍뚜기, 각종 양념을 담는 항아리로서, 그리고 쌀이나 잡곡 및 식수를 담는 용도인 크고 작은 항아리들이 만들어 졌다. 이러한 항아리들은 용도에 따라 순백자 항아리나 청화백자철화백자의 항아리로 만들어 겼으며, 시대에 따른 美感과 백토, 안료에 따라 여러 빛깔과 형태를 갖춘 항아리들로 만들어졌다. 이들 항아리 중 18세기 전반을 중심으로 하는 숙종, 영조연간의 항아리로서 백자 달항아리가 있다 口部의 각이 은행알처럼 예리하게 깎여지고, 몸체가 달처럼 둥글며, 빛깔은 눈빛깔이나 우유빛깔의 雪白色, 乳白色을 띄고 있다. 18세기 전반 경기도 광주의 궁평리와 오향리, 금사리요에서 제작되었으며, 조선백자 달항아리의 흰색과 둥근 맛의 형태를 잘 보여주는 항아리이다. 실용에 잘 쓰이도록 견실하게 제작되었고, 장식이나 기교가 없는 단순하고 풍만한 모습에 담백한 설백색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이들 백자 달항아리들이 만들어진 18세기 전반은 우리 세계에 대한 재발견이 이루어졌던 시기로, 오늘날 한국적이라고 하는 진경산수그림이나, 판소리, 탈춤, 목기, 옹기, 민화 등이 이 시기를 중심해서 새롭게 만들어 겼던 것으로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던 시대의 산물이었다.
조선 18세기 전반 숙종 연간의 문인인 담헌(擔軒) 이하곤(李夏坤) (1677~1724)의 문집인 『두타초(頭陀草)』, 冊子, 詩 속에, “앵자산 북쪽 우천 동쪽에 남한산성이 눈 안에 있고, 강구름은 밤마다 계속해서 비를 만들며 산골 나무에는 열흘 계속해서 바람이 길게 부네.
도공들은 산모퉁이에 사는데 오랜 부역이 괴롭다네
스스로 말하길 지난해 영남으로 가서 진주 백토를 배에 실어 왔단다.
선천토(宣川土) 색상은 눈(雪)과 같아서 어기(御器) 번조(辯造)에는 제일이라, 감사가 글을 올려 백성의 노역은 덜었지만, 진상품은 해마다 쓰지 못할 물품이 많네.
수비(水飛)하여 만든 정교한 흙은 솜보다 부드럽고, 발로 물레 돌리니 저절로 도네. 잠깐
사이 천여개를 빚어내니, 사발, 접시, 병, 항아리 하나같이 둥글다네
진상할 그릇 종류는 삼십 가지요.
사옹원 본원에 바칠 양은 사백바리나 되네. 깨끗하고 거칠은 색과 모양 논하지 말게. 바로 무전(無錢)이 죄이로다.
회청(回靑)으로 칠한 한 글자를 은처럼 아껴, 갖가지 모양 그려내어도 색깔이 고르다. 지난
해 대전에 용준(龍樽)을 바치니, 내수사(內需司)에서 면포를 공인에게 상으로 주었다네.
칠십 노인 성은 박씨라
그 안에서 솜씨 좋은 장인으로 불린다네. 두꺼비 연적은 가장 기이한 물품이고, 팔각 중국풍 항아리 정말 좋은 모양이네.”
담헌이 숙종 35년(1709)에 묘지사번(墓誌私燔)을 위해 광주 분원에 머물면서 제작 과정
을 직접 지켜보고 지은 시로 선천토(宣川土)의 색상이 눈과 같아 어기 제작에 제일이라 하였고, 창화백자 안료인 회청은 은처럼 소중히 다루면서 제작에 임하였다. 원형미가 주류를이루어 둥근 모양이 대부분이었음을 알려주며, 조선백자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 차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조선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가득한 시대에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간직한 백자달항아리들이 제작되었음을 담헌의 시로서 이해할 수 있다.
현대에 들어, 백자달항아리를 보고, 최순우 선생은 부잣집 맏며느리를 보는 것처럼 넉넉함을 느낀다고 하였고, 이동주 선생은 백자달항아리에서는 조선 사대부의 지성과 서민의 질박함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다고 말하였다.
이우복 회장은 백자항달항아리를 생명이 깃든 마음속의 신령(神靈)님으로 느껴졌으며, 모든 분별심과 집착을 넘어선 선적 지혜와 아름다움이 담겨있다고 하였다.
김원룡 선생은 이런 백자 달항아리에 대해
<<백자대호(白磁大壺>>
“조선 백자의 미(美)는 이론(理論)을 초월한 백의(白衣)의 미(美)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껴서 모르면 아예 말을 마시오.
원(圓)은 둥글지 않고 면(面)은 고르지 않으나, 물레를 돌리다 보니 그리 되었고, 바닥이
좀 뒤뚱거리나 뭘 좀 괴어 놓으면, 넘어지지야 않을게 아니오.
조선백자에는 허식(虛飾)이 없고 산수(山水)와 같은 자연(自然)이 있기에, 보고 있으면 백
운(白雲)이 날고, 들고 없으면 종달새 우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는 백의(白衣)의 민(民)의 생활 속에서, 저도 모르게 우러나오는 고
금미유(古今未有)의 한국의 미(美)
여기에 무엇 새삼 스러이 이론을 캐고 미를 따지오.
이것은 그저 느껴야 하며 느끼지 않는다면 아예 말을 맙시다”
이처럼 백자달항아리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그 아름다움이 새롭게 인식되고 있으며, 보면 볼수록 더욱 가까이 하고 싶은 매력을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Ⅱ
한익환선생은 올해 여든하나로 백자에 손을 댄지 오십여 년이 흘러 백자제작에 생을 바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첫 결실로 1979년 1월 국립중앙 박물관회의 초청으로 제1회 전시회를 가졌었다.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이었던 최순우 선생께서 한익환선생의 백자에 대한 전시회 서문의 글이 있다.”
아름다운 옛 도자의 나라 한국의 관록을 되살려내려는 노력이 요사이처럼 맹렬한 때는 또 없었다. 오늘의 도예인들은 마치 숨판을 잊고 있는 듯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바라보기에 민망할 때가 있을 정도이다. 말하자면 오늘의 도예인들 중에는 신이 난 사람들이 적지 않다는 뜻이다.
이렇게 신이 오른 사람 중의 하나가 韓益換씨이다.
우리 옛 도자기의 조종(祖宗)은 말할 것도 없이 고려의 翡色靑奈였고 여기에 버금하는 것이 朝鮮白瓷였으며, 고려청자와 조선백자 사이의 과도기에 희안하게 아름다웠던 것이 粉靑沙器였는데 오늘날 우리의 생활감정이나 생활환경으로 봐서 오늘의 우리 것으로 되살려낼 수 있는 가장 합당한 대상은 물을 것도 없이 白瓷라고 생각한다.
이 백자의 回生을 염원하고 나선 도예인들이 하나 둘이 아니지만 여기에선 조선백자의 정통을 찌를 만큼 성공한 이가 바로 한익환씨이다.
유태(釉胎)의 질과 청화(靑畵)의 발색에 있어서 한익환씨가 도달한 경지는 바로 과거의 도예왕국이던 한국인의 관록을 여봐란듯이 보여 주었다고 할만하다. 즉 유(釉)나 태(胎)의 질감이 조선시대의 좋은 백자에 박진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된 것이다.
이러한 성과는 근래 우리 도예계가 다다른 進運에 적지 않은 의의를 보태주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유태의 질이 조선시대 것에 같아졌다는 뜻만이 아니라 우리의 현대도예가 생기를 되찾고, 또 과거의 영광의 자리를 다시 약속할 수 있는 저력의 증거라는 뜻에서이다.
이번 한익환씨가 近作을 모아 발표전을 갖는 것은 그 동안에 이룬 노고의 성과를 겸허하게 사회에 선보이려는 뜻이라고 나는 짐작하고 있다.”조선백자의 전통을 되살려, 옛 조선백자의 아름다움에 가깝고 그 신비를 재창조한 한익환선생의 백자에 대한 진솔한 평가였으며 찬사였음을 최순우선생의 서문을 통해 느낄 수 있다.
1970년 12월 한국 고미술 자기 연구소 부설로 설립한 그의 ‘익요(益窯)가 경기도 용인군 백암마을에 있으며, 그 주변에 양질의 백토가 나오는 광산이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는 길림대학 이과반에 적을 두기 전 일찌기 간도공업학교 광산과를 나왔다. 해방 뒤 혼자 월남하여 문교부 도자기 기술원 양성소 요업과를 1기로 수료하고 1950년 중앙공업시험연구소 요업과에 근무하였다. 공업연구소 시절의 투철한 시험 생활이 기반을 다지게 했다.
그는 도자기에 미쳐서 살았다.
공업연구소 시절부터 그가 색상 연구의 독보적 존재가 된 것은 이러한 탐구열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가 전통 도예에 눈을 돌린 것은 공업연구소에 들어온 지 7년째 되는 해로 은사 한 분이 조선백자를 재현해 볼 수 없겠느냐고 묻고 “자네라면 할 수 있다.”고 격려한데 힘입은바 크다고 하였다. 그가 본격적으로 전통도예를 한 것은 ‘익요’시절인 1970년대부터였다.
익요에서의 생활은 수도승의 그것과 같아, 그는 손수 밥을 지어 먹고 낮엔 온종일 실험실에서 실험을 하였다.
유약의 배합이 갖는 함수가 풀리지 않을 때, 빛깔이 생각만큼 나오지 않을 때 등 그간 수 십만번 조합을 했고 시험품이 천 개도 넘었다.
조선백자는 철분이 적은 백토를 쓰며 백토, 차돌을 가루로 내어 점토, 도석, 장석과 합쳐 백자를 만든다. 그의 ‘익요’ 앞뜰에는 광산에서 캔 백토와 홍천, 하동 등지에서 실어 온 도석, 점토가 골고루 쌓여 있어 이것을 잘 조합하여 질 좋은 백자가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도자기는 흙과 불의 싸움이라고 하지만, 도자의 근본은 첫째도 흙, 둘째도 흙, 셋째도 흙임을 알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형태와 색채 중 그가 백자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색이다. 백자의 빛깔은 흙이 희니까 유약을 뚫고 나와 잘 익은 것이 흰색이고 덜 익은 것은 푸른 색이 난다.
좋은 백자색을 내기 위해 노력한 것이 그의 일생의 작업이었음을 알 수 있으며, 그 비결은 백자를 만드는 흙인 백토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익요’에서 구워내는 작품을 유달리도 설백색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그것은 그가 오랜 탐구 끝에, 백자의 완성을 위해 백토와 유약의 탐구 속에서 이루어진 결실이었다.
세계도자사상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높은 美에 도달한 조선백자의 백색의 기술은 오랜 세월 비밀로서 간직되어 왔던 것이다. 그 비밀의 문을 두드린 수많은 도예가 중에서 그는 누구보다도 진심에 가깝게 그리고 그 아름다움에 가까이 다가선 것이다.
물론 그도 말하듯이 도자기에 있어서 또 다른 중요한 것은 形態美의 완성이다. 그러나 그 형태감에 도달하기 전에 그가 하여야 할 일이 바로 완벽한 백색에의 도달이었던 것이다.
그가 만든 백자의 색은 옛 조선백자의 작품들과 비교해보면, 조선백자에 버금가는 아니 그 이상에 도달하였음은 그의 오랜 노력의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 18세기 전반, 우리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높았던 시대의 산물이었던, 백자달항아리를 주제로 해서 한익환선생의 오랜 노고 끝에 만들어진 21세기 초의 백자항아리들은 설백색의 신비한 백자색과 둥글고 원만스러운 항아리의 형태가 잘 조화되어 새롭게 탄생된 백자항아리의 아름다움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하겠다.
50여 년 간에 걸쳐, 더 나은 백자유약과 태토를 찾아 끊임없는 실험을 해왔으며 전통에 바탕을 둔 조선백자의 형태를 찾아서 끊임없이 노력해왔던 한익환선생의 모습을 백자달항아리에서 찾아본다.
윤 용 이 | 원광대 교수•미술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