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만영
한만영
차용과 원본의 감각적 체계
김미진(예술의전당 전시예술감독, 홍익대미술대학원 부교수)
한만영은 명화와 오브제, 평면과 입체, 시간과 공간을 해체시키고 재조합하면서 현실과 비현실적인 세계가 동시에 공존하는 작업으로 시대를 앞서가는 독창적인 예술세계를 펼쳐오고 있는 작가다.
최근에는 하늘을 상징하는 텅 빈 배경과 유리가 4면에 내장된 직 사각형 박스 안에 명화를 꼴라주한 바이올린을 붙인 일련의 시리즈작업을 하고 있다.
한만영은 그동안 많은 오브제를 선택하고 조합해 왔지만 악기자체만으로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고 있는 바이올린에게서 시각과 청각예술의 조합을 발견하게 된다. 그는 현악기중 가장 화려한 음색을 지닌 바이올린에서 그 고유성과 특성을 떠난 미술의 질료로 선택한다. 그리고 앤디워홀, 모네, 백남준, 리히텐슈타인 등 미술사속 대가의 작품들을 인쇄한 이미지의 부분으로 악기표면을 꼴라주해 감쌌다. 이것은 그가 지속적으로 해왔던 근원과 발생이 다른 오브제들을 병치시키면서 현실과 이상 세계를 동시에 존재하게 하는 작업위에 청각까지 더한 확장된 감각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연주나 연습에 사용했던 바이올린은 현악기로서의 역사성 뿐 만 아니라 연주자, 관중, 콘서트 홀, 연주, 장인 등 많은 기억과 경험을 갖고 있는 축적된 아날로그의 향수적 기호라고 볼 수 있다. 그 위에 명화의 파편들 덧입히기는 역사 속 최고가치의 신성성이 이미지가 되어 정보로서 대중의 손안에 들어와 버린 이 시대의 기호로 작용한다. 그 이면에는 음악적 원형을 간직한 대량생산품인 바이올린 위에 시각예술의 원형인 명화가 복제되어 입혀져 있다는 또 다른 역설과 은유가 존재한다. 고급문화로서의 상징은 예술원형의 기의로서 언어나 추상으로만 남고 모조품으로 뒤덮인 현실의 기표로 공산품 바이올린과 복제품 명화가 사용된 것이다.
한만영의 작업은 사회, 문학, 예술 간의 다중적 개념의 게임에 관한 해석을 요구한다. 결국 기성품은 작가만의 감각과 수공적 노동으로 조정 배치되어 특별한 조형성을 만들어 하나밖에 없는 예술품이 되어 버린다. 그는 복제의 텍스트인 포스트모던의 패러다임을 예술가로서의 주체적 감각을 사용해 형이상학적 가치와 하나밖에 없는 창조적 예술을 추구했던 모더니즘의 원본성으로 되돌려 놓는다. 그러나 이것은 이전시대의 질료적 추상성에서 표현되었던 모더니즘가치가 아니라 많은 것을 경험하고 난 후의 매체와 장르의 차용 범주 논란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대안적 모더니즘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시대적 아방가르드였던 대가의 인쇄된 작품은 파편화, 단절, 불연속성이라는 후기 구조주의의 옷을 입고 상이한 문화, 이론, 경험을 가진 악기와 자연스럽게 접하여 키치적이면서 동시에 원형적 모더니즘 예술품이 된 것이다.
이미지가 조합된 기성품은 비어있는 공간배경인 하늘과 극명한 대립을 보인다. 이것은 자연에 대치될 만큼의 미적가치를 지닌 물성으로 마침내 전체 화면은 팽팽하게 균형 잡혀 조화로우면서 세련된 형태를 만들어 내고 있다.
이번 작업에서는 바이올린의 둥글면서 날카롭고 예민한 입체적 공간 위에 명화의 부분들이 조형적인 미를 구성하고 있다. 한만영이 말했던 획일적이고 객관적일 수밖에 없는 관념이나 개념이 다른 세계를 만나 스스로의 미적구성을 할 수 있는 위치를 찾아가면서 그 공간에 맞추어 체계화되며 하나의 궁극적 조형세계로 통일된 것이다.
이번 작업은 반복적 형태로 제작되고, 공간에 따라 하나 혹은 여러 개를 붙여 설치된다. 이때 원본성은 또 다시 다수가 되는 주체분열의 과정을 겪는다. 더 나아가 사각박스 안 거울테두리에 비친 형태는 사방으로 무한하게 뻗어나가며 입체적인 만화경 공간을 만들고 음악의 소리 같은 파장을 시각화 한다. 그것은 보이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른 화면을 만들어 낸다. 정면에서는 그가 지금까지 해 왔던 작업과 마찬가지로 오브제가 있는 사각 박스로만 보이나 방향을 약간 바꾸면 박스 안에 둘러쳐진 사면의 거울을 통해 관람자, 주체, 작품, 회화, 틀, 평면, 입체가 무한하게 변형되며 시뮬라시옹의 세계를 경험하게 한다.
한만영은 역사적 공간에서부터 새로운 인터넷 매체의 사이버 공간이라는 지금, 이 시대에서 경험되어지는 비가시적 무한공간까지 공존시킨다. 미술사속의 아방가르드 작업을 차용하며 전통과 현대, 현실과 이상, 회화와 조각 등 예술과 삶의 실존적 경계를 표현해 왔던 한만영은 이상, 과거, 초 현실이라는 추상적 시공간이 사이버와 함께 현실적 공간이 되어버린 시대를 이미 예견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그는 늘 작품 안에서 이중적 요소들을 병치시킴으로 존재의 세계가 단절과 분화가 아닌 종합적이며 총체화 된 하나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서 한만영은 복잡한 시대를 반영하면서도 ‘단순한 순수성’이라는 절제와 세련된 형식의 작업으로 보여준다. 이것은 작가가 매체시대를 삶과 작업으로 경험하면서 수십 년 간 같은 주제를 가지고 지속적으로 실험 해온 내공의 결과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