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창
홍석창의 문인화
열린 미의식과 자유로운 운필의 힘
나는 글을 쓰면서 최근에 본 홍석창의 문인화를 머릿속에 떠올려 본다. 먹선의 움직임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사유(思惟)의 파장을 일으키며 종이 위를 유영하는 듯 하다.
원래 문인화란 시인이나 학자 등 선비들이 여기(餘技)로 그린 그림을 말한다. 직업적인 화가가 아닌 문인들에 의해 그려진 시적(詩的) 격조가 있는 그림을 말하는 것이다.
문인화의 시조는 당나라의 시인 왕유(王維)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그림은 직업화가와 달리 물감을 많이 사용하지 않아 수묵 위주의 맑고 우아한 정취가 흐른다. 소동파(蘇東坡)는 왕유를 가리켜 “그림 가운데 시가 있고 시 가운데 그림이 있다(畵中有詩 詩中有畵)”고 하여 왕유의 격조높은 예술세계를 찬양한 바 있다. 오늘날 문인화에 대한 생각들은 다소 모호하게 변질되어, 문인화 하면 사군자(四君子)같은 사대부들의 교양으로 여긴 화제나, 간결한 붓놀림에 내면적 정신의 세계를 담은 그림을 가리키기도 한다. 폭 넓은 독서량과 지적 깊이도 없는 화가들이 문인화를 그린다고 하는 것을 보면 참으로 어이가 없는 일이다. 문인화는 결코 능숙한 손놀림에 의해 나올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넓은 지식과 심오한 내면적 성찰과 맑은 심성을 뿌리로 해서 향기처럼 문인화는 그려질 수 있는 것이다. 권력에 눈이 먼 화가나, 세속적 지위에 연연하는 사람들이나, 돈에 눈이 먼 사람들은 절대로 그릴 수 없는 것이 문인화이다. 따라서 시중에 나도는 상당수의 문인화는 가짜요 허구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 그렇기에 진정한 문인화의 가치는 무엇과도 바꿀 수가 없는 것이다.
문인화를 감상하는 사람도 당연히 일정한 내면적 수준을 갖추어야 제대로 볼 수가 있을 터이다. 세속적 욕망의 때로 얼룩진 사람들은 절대로 문인화의 오묘한 그리고 맑고 소박한, 그러면서도 그 소박함이 고도의 세련미로 통하는 정신의 세계를 이해할 수는 없다.
삶이라고 하는 ‘작은 집’에 갇힌 우리 인간들은 항상 무한한 세계를 작은 창문을 통해서만 바라 볼 뿐이다. 집 안과 집 밖을 연결하는 작은 창문은 우리 자신과 무한한 세계와의 사이에 놓인 유일한 인식(認識)의 통로인 셈이다. 그 삶의 창문에 먼지와 오물이 끼면 무한한 세계의 맑은 실상을 제대로 볼 수는 없는 것이다. 깨끗한 삶의 창문을 지닌 자(者)는, 투명하게 세계를 응시할 수 있는 사람이며,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자, 여기 홍석창의 문인화가 있다. 무한한 세계의 입구에 놓인 암호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그려진 듯한 홍석창의 문인화들이 우리의 앞에 던져져 있는 것이다.
볼 수 있는 사람들은 그저 사심없이 그의 작품 앞에 서면 자연스럽게 그가 열어 보이는 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다. 《氣의 파동》이란 제목의 작품을 보자. 공간을 휘저으며 힘있게 그어나가 알 수 없는 형상의 파격적 출현을 본다. 구체적인 대상이 작가의 디오니소스적(Dionysos 的) 열정에 의해 가시적(可視的) 이미지를 버리고 추상적 선의 울림으로 변모한 것이다. 가시적 이미지는 일정한 질서를 띤 아폴로적(Apollo 的) 조화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것이지만, 때론 작가의 내면에서 화산처럼 분출하는 디오니소스적 열정에 의해 가시적 질서를 전복시키며 추상적 선의 울림으로 폭발하기도 한다.
현상계(現象界)를 뒤덮고 있는 이미지의 허구를 벗기고 나면, 미(美)․추(醜)를 떠난 생명의 근원적 약동만이 세계 속에 남는 것이다. 철학자 쇼펜하우어(A. Schopenhauer)는 이것을 “삶의 意志(Wille zum Leben)”라고 했고, 니체(F. Nietzsche)는 이것을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라고 했다.
작가는 형상을 만들고 다시 그것을 부수면서 조형의 근원으로 돌아가 새로이 약동하는 창조의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홍석창의 《氣의 파동》은 추상적 선의 울림을 통해 세계의 심장을 느끼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氣의 파동》에서 보여 주고 있는 추상적 조형의 세계는, 그가 이번에 전시하는 다른 작품들에서는 완전히 안으로 숨어들어 간결하고 소박한 이미지로 발아(發芽)하고 있다. 《淸》, 《빛》,《心閑》,《醉紅》,《5월》,《7월》,《化生》,《淸香》,《幽香》이란 제목이 붙은 그의 그림들은 《氣의 파동》과는 매우 다른 조용하고 정돈된 단아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상반된 성격의 그림들이 개인전에 함께 선보이는 것을 의아해 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자기세계가 확립되지 않은 미숙한 화가의 개인전이라면 모를까. 이미 우리 화단의 거목으로 인정받고 있는 원로급 화가의 개인전인데 말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일찌감치 우리 미술계가 버렸어야 할 어이없는 편견일 뿐이다.
홍석창의 그림에는 자연스러운 마음의 움직임과 그에 따르는 걸림이 없는 붓의 운용이 느껴진다. 나는 작년에 열린 그의 화갑(華甲)전 평론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홍석창의 회화세계를 특정한 시각으로 정의 내리고 이야기 하기는 매우 어렵다. 왜냐하면 그는 열려진 思考의 넓이와 깊이를 지닌 화가로서 자유로운 그림을 그려 온 작가이기 때문이다. 그의 그림은 매우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인위적이거나 거창한 구호가 없이 자연스럽게 세계를 열어 보이고 있는 것이다. 생각이 흐르는 대로 붓이 움직여 그려진 것 같은 그런 그림들이 홍석창의 회화이다. 그 자연스러움이 세계를 열어 보이는 홍석창 회화의 독특한 힘이 되고 있다”( 任斗彬, 洪石蒼 채묵40년 도록 평론문에서 발췌)
소나무와 해바라기와 연꽃과 대나무와 장미, 국화, 난초, 조롱박, 매화, 포도, 복숭아 등을 소재로 하여 그린 그의 그림들은 전통의 향기를 시간의 다리를 넘어 따듯한 온기를 담고 전달해 준다. 이들 소재들을 작가는 특별히 파격적인 화법이나 세련된 붓의 운용으로 멋을 부리지 않고, 순진할 정도로 소박한 형태 표현과 선의 움직임에 의해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의 선묘는 간혹 어떤 때엔 매우 어수룩하게까지 느껴질 정도인데, 사실은 이 어수룩함 속에 세련된 붓놀림을 능가하고 영혼의 내면적 향기가 풍겨나오고 있다.
화면에 그어나간 선(線)이 보여 주고있는 다양한 울림의 진폭을 파악하는 것. 이것은 문인화를 감상하기 위한 최초의 시각적 열쇠이면서 그 정신적 요체(要諦)인 것인데, 이것을 고도의 경지에서 제대로 파악하고 이해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화폭 위에 그어진 선(線)은 그 화가의 모든 것을 놀랍도록 반영한다. 선은 불가사의 (不可思議)할 정도로 화가에 따라 다른 풍부한 울림의 진폭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좋은 울림을 지닌 선을 만나는 것은 큰 기쁨이다. 달필이면서도 욕망의 때가 끼어 죽어버린 선(線)이 있는가 하면, 서툰 듯한 움직임을 보이면서도 깊은 정신의 향기를 뿜어내며 살아 있는 선(線)이 있다. 고도의 경지에 오른 탈속한 선(線)은 그것 만으로도 마음을 정화(淨化)시키는 깊은 기쁨을 준다.
홍석창의 이번 그림들을 보면, 그가 세속의 잡사로부터 벗어 나와 고요한 영혼의 대지를 산책하듯 한가하고 맑은 시각으로 나무와 풀과 꽃들을 그린 것을 느낄 수가 있다. 대나무에서도 난에서도 국화에서도 내면의 맑은 향기가 감돌고 있다. 그가 그은 선 하나를 화면에서 떼어내 도시의 거리에 날려버리면, 번잡한 도시의 시간이 멈추고 작은 휴식에 잠겨들 것만 같다.
존재의 근원으로부터 너무나 멀리 벗어 나온 현대인들에게 홍석창의 문인화는 그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해주는 조용한 계기가 될 것이다.
임두빈(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