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이규
장이규 展
이상화된 자연과 그 탈속한 경계
자연을 표현의 대상으로 삼는 것은 동서를 막론하고 이미 오래전부터의 일이다. 동양은 이를 산수라 부르고, 서양은 풍경이라 지칭한다. 원칙적 의미에서 산수와 풍경의 가장 큰 차이는 산수가 자연의 이상화를 요구함에 비하여, 서양의 풍경은 상대적으로 객관적 표현을 강조한다. 이는 자연이라는 대상에 대한 시각 및 접근 방식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이른바 자연을 외경의 상징으로 인식하느냐, 아니면 대립의 실체로 파악하느냐가 바로 그것이다.
작가 장이규의 작업 역시 자연을 대상으로 하며, 그것에 접근하는 시각은 전형적인 풍경의 그것이다. 향리의 자연을 그만의 독특한 필치와 시각으로 담아내는 작가의 작업은 이미 타인과는 뚜렷이 구분되는 그만의 특질로 인정받고 있다. 지역적 특성과 개인의 개성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그의 조형성과는 이미 일정기간을 두고 부단히 응축되고 성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특히 강렬한 대비를 통해 구축되는 독특한 공간운용과 자연의 해석방법은 풍경을 단순한 낭만적 서정에서 벗어나 또 다른 의미와 가치를 지니게 하였다. 이는 바로 작가의 자연에 대한 접근방식과 이해가 반영되어 발현된 조형적 성과라 할 것이다.
자연을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대단히 이성적이고 냉철하다. 서두름 없는 절제된 표현으로 화면 곳곳을 더듬는 그의 필촉은 흐트러짐이 없다. 그것은 일견 금욕적인 것으로 느껴질 정도로 절제와 함축의 묘를 보이고 있다. 분명 그의 화면은 일반적인 풍경의 단순한 서정이나 재현적인 것에서 일정부분 빗겨나 있다. 그것은 일종의 가공된 자연이자 설정된 풍경이라 함이 보다 적확할 것이다. 비록 객관적인 자연을 대상으로 하고 있으나 그의 시선과 관심은 이미 구체적인 사물의 형상에서 벗어나 특정한 사유를 동반한 형이상학적 공간으로 전이되고 있음이 여실하다. 그럼으로 그의 화면은 마치 투명한 유리를 사이에 두고 바라보는 것처럼 아득하게 다가온다.
명징한 화면은 마치 절대정적의 고요를 드러내 듯 미동도 없다. 그것은 그저 움직임이 없는 정지된 것이 아니라, 고요함으로써 오히려 더욱 팽팽한 긴장감이 감도는 역설적인 정적이다. 마치 잘 당겨진 활시위처럼 팽팽한 긴장감은 작가의 화면과 보는 이를 가르는 경계이다. 그것은 마치 쉽게 범접을 허용치 않는 성역의 결계처럼 언제나 보는 이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다. 절대정적의 공간에 움직임을 더하는 것은 오로지 보는 이의 시선이다. 시선을 옮김에 따라 동반되는 미세한 움직임은 모양이 아닌 소리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그것은 조심스럽게 울리는 카랑카랑한 맑은 금속성의 소리이며 투명한 얼음이 부딪치며 내는 울림 같은 것이다. 작가의 화면은 분명 빛과 투명한 공기를 통하여 자신의 풍경과 보는 이와의 절대거리를 확보하고자 한다. 이렇게 확보되어진 거리를 통하여 바라보는 그의 화면은 이미 객관의 풍경이 아니라 특정한 사유를 담고 있는 이상화된 자연이라 할 것이다.
원근을 통해 분명하게 구분되고 있는 화면의 공간구획은 작가가 견지하고 있는 특징적인 조형방법이라 할 것이다. 작가의 화면들은 대체로 근경에 배치된 소나무와 아득한 원경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단순하고 명쾌한 설정은 현실의 복잡다단한 객관적 조건들을 주관적인 취사선택과 수렴의 과정을 통해 경영되어진 결과일 것이다. 객관적인 자연에 대한 개괄과 함축적인 표현은 작가의 관심이 단순히 자연의 객관적 재현에 있는 것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어쩌면 이러한 공간의 구분과 함축적인 형상들을 통하여 성스러운 것과 속된 것, 혹은 현실과 이상 같은 상대적인 가치를 표출하려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의 화면에 드러나는 공간의 구분과 구획은 엄정하고 단호한 것이기 때문이다.
작가의 화면에 특징적으로 등장하는 근경의 소나무들은 이러한 서로 다른 공간을 구분하는 지표처럼 우뚝하다. 그것은 탈속한 자연, 객관에서 주관으로의 변환을 암시하는 것이라 풀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근경의 객관적이고 상대적으로 밝고 설명적인 표현을 통하여 보는 이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화면의 종심으로 인도한다. 그것은 펼침의 방만한 시선이 아니라 절제와 수렴을 통한 화면의 깊이로의 공간 확장이다. 이에 이르면 이제 모든 것은 보는 이의 몫이 될 것이다. 그것은 이미 객관의 재현에서 벗어난 주관의 산물이며 육안으로 관찰되는 현실세계가 아니라 일종의 심안에 의해 파악되고 이해되는 이상세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형상으로 인식되는 것이 아니라 감각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그것은 보는 것이 아니라 느끼는 것이며, 대립하며 마주하는 것이 아니라 합일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러한 성스러움과 속된 것, 이상과 현실의 경계를 확보하기 위하여 마치 유리처럼 투명하고 얼음처럼 차가운 공기로 보는 이와 일정한 거리를 견지한 것이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분명 자연의 이상화를 통하여 탈속한 화면을 구축하고 있지만, 그것에 특별한 신격이나 절대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 작가는 객관성을 바탕으로 합리적 보편성을 확보하고, 독특한 사유와 관조의 시각으로 절대정적의 탈속한 공간을 구축하고 있지만, 이러한 내용들은 그 자체로 의미를 지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은 서로 어우러지며 보는 이의 시선을 화면으로 이끌며 그 안에서 소요하고 거닐며 사색할 때 비로소 가치를 지니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의 화면에는 언제나 보는 이의 자리, 사고할 수 있는 공간의 여지가 마련되어 있다 할 것이다. 그 공간은 이미 탈속되어 이상화된 공간이기에 육안을 통한 물리적인 접근이나 상투적인 낭만의 서정적 해석을 지양할 따름이다. 그것은 극히 인간적인 것이며 감성적인 것이다. 결국 그는 풍경이라는 형식을 통해 산수가 지니고 있는 이상의 경계를 지향하고 있다 할 것이며, 그에 이르는 방편으로 독특한 향토색과 개성을 수단으로 차용하고 있다 할 것이다.
구상회화, 특히 풍경에서 작가는 이미 나름대로의 고유한 영역을 확보하고 있다 할 것이다. 건강한 시각으로 향토성 짙은 자연을 보편적인 방식을 통해 표출해 내고, 이를 다시 탈속된 이상의 풍경으로 변환시켜 승화시킴으로써 이루어 낸 성과는 전적으로 작가의 조형적 성취라 할 것이다. 그가 견지하며 지향하고 있는 풍경에 대한 독특한 해석방식은 단순한 조형의 문제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접근과 표현에 있어 많은 시사점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것이다. 우리가 그의 작업에 주목하는 것은 기왕의 성과를 통해 확보된 신뢰를 바탕으로 다음을 기약할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김상철 미술세계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