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민수
강민수의 달항아리
보름달을 담았다
임창섭(미술평론가, 문학박사)
강민수는 달항아리만 만든다. 첫 번째 개인전에도 달항아리를 선보였고, 2007년에는 순백자 달항아리만을 발표하였고, 이번 노화랑 전시도 달항아리만 출품한다. 왜 달항아리만을 고집하고 있지 하는 이의에 그거야 개인취향이지라고 무심하게 보면 그만 같기도 하지만, 조선시대에 만들었던 달항아리를 지금 만드는 것이 굳이 21세기에 필요한 일인지 궁금하다. 예술이란 것이 일상에 유용한 일만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이미 예술일 수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지만, 작가에게 물어본다. 왜 달항아리를 만들고 있냐고.
강민수 그의 대답은 예상했듯이 특별한 이유가 없다고 대답한다. ‘그냥’ 크고 둥글고 하얀 항아리가 좋다는 말뿐이다. ‘그냥’이라는 말이 좋을 때도 있지만 이럴 때는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약간 난감하다. 하긴 ‘그냥’이라는 대답은 달항아리만이 아니라, 요즘처럼 넘쳐나는 물질 아니 물질이 정신을 압도하는 시대에, 우리나라가 도자의 나라였다는 것도 대부분 우리는 인식이 없는 시대에 그릇 굽는 일을 업으로 삼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기에 무슨 다른 이유가 타당하겠는가. 그러나 신자유주의 시장이라고 명명되는 새로운 삼천년기에 들어선 이즈음에 잘 알아주지도 않는 일에 자신의 모든 의미를 쏟아 붓는 일을 강민수는 지금 하고 있다. 따지면 예나지금이나 흙으로 그릇을 빗는 일은 아무나 하는 일도 쉬운 일도 아니다. 조선의 사기장들은 자신의 질박한 삶을 물레를 돌리고 흙과 씨름하면서 오로지 좋은 그릇만이 나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달랬을 지도 모르는 일이다. 달항아리를 만드는 강민수의 마음도 그런 것이 아닐까 하는 가벼운 추측을 한다.
경기도 광주 옛 도자가마터가 산재한 그곳, 그것도 쌍령동 마을 끝자락에 산기슭으로 난 좁은 길을 헉헉거리며 올라간 곳에 자리 잡은 강민수의 작업장과 가마는 이런 생각이 틀리지 않다는 것을 증명한다. 산비탈에 세 칸짜리 오름 가마로 한 아름되는 항아리를 하나씩 안고 작업장에서 오르락내리락 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 영락없는 조선 사기장의 투박한 삶이 그러했을 것이라는 상상은 충분하다.
달항아리는 강민수만이 아니라 많은 우리나라의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작품소재로 다루어 왔다. 라일락과 백자를 즐겨그렸던 도상봉을 비롯해, 돌과 책 등과 같은 것을 면밀하게 그렸던 고영훈은 조선의 백자를 소재로 대형작품을 발표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사진으로는 구본창이 있다. 그중에서 수화 김환기는 달항아리를 너무 좋아해서 글을 쓰다가 막히면 항아리 엉덩이를 어루만지면 글이 금방 풀린다고 자랑할 정도로 조선백자를 사랑한 작가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무슨 매력이 있어 많은 작가들이 달항아리를 그리고 사랑했을까.
대부분 어떤 사물에 혹은 물건에 붙은 이름은 특별한 경우 혹은 아주 널리 사용되어 그것을 지칭할 필요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나라 도자기에는 사용처를 표시하는 이름 이외에는 이렇다할 명칭이 별로 없다. 무늬도 색도 형태를 가르치는 이름을 가진 것이 거의 없다. 지금에 붙은 어려운 한자 이름은 근대에 붙여진 것이다. 다만 ‘사발’, ‘접시’, ‘종지’ 그리고 특별하게 ‘입기’니 ‘탕기’니 하는 정도이고 크기에 따라 대중소로 나눈 정도이다. 다만 제례에 사용하는 그릇은 엄격하게 그 용도와 위치, 명칭이 아주 세세하게 규정하여 이름을 붙였다. 그러고 보면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정식 이름이 아닐 것이다. 아주 특별하게 그 형태가 달처럼 생겨서 붙여진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널리 사용된 것이어서 일수도 있다. 어느 쪽이든 달항아리라는 이름은 아주 썩 잘 지은 것이라는 생각은 항아리만큼이나 아름다운 이름이기 때문이다.
달은 언제보아도 좋은 친구를 보는 것처럼 푸근한 마음을 느끼게 한다. 추운 겨울밤에 어두운 길을 비추는 것도 달이 있으면 외롭지 않게 걸어갈 수 있는 것처럼 푸근한 빛을 비추는 것이 달이다. 한여름 뜨거운 태양이 사라지고 나면 그 열기를 달래주는 것이 달빛이다. 언젠가 백남준이 ‘달은 그 옛날의 텔레비전’이라고 했던 말이 떠오른다. 굳이 떡방아 찢는 토끼를 떠올리지 않아도 달은 우리의 수많은 사랑과 기쁨, 한탄과 좌절, 그리고 아름다운 상상을 보여주는 둥그런 만물상자다. 그런 달을 닮은 달항아리가 조선시대만이 아니라,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있는지도 모른다. 조선의 어느 이름모를 사기장은 떠나온 고향에 떠오른 달을 생각하며 달항아리를 빚었을지도 모르지만, 달은 사기장의 고향에만 뜨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 마음의 고향에도 뜬다. 달을 생각하면 누구나 푸근한 마음을 갖게 되고 그래서 달항아리는 이런 우리의 마음을 간직하고 있는 그릇이 되는 것이다.
이미 알려진 대로 달항아리는 제작방법부터 다른 것들과는 다르다. 백토로는 그렇게 커다란 항아리는 한 숨에 물레에서 차올리기는 쉽지 않다. 백토는 설힘이 약하기 때문에 위아래를 따로 만들어 적당히 굳으면 서로 합친다. 그러니 사기장의 솜씨가 예사가 아니어야 한다. 그릇의 두께도 서로 엇비슷해야하고 크기도 서로 비슷해야 한다. 이렇게 만들다 보니까, 서로 연결되는 부분이 약간씩 뒤틀려 정확한 원형이 되기가 쉽지 않다. 조금이라도 흙 두께가 다르거나, 서로 붙이는 손동작에 힘이 균등하지 않으면 가마 속에서 약간씩 다르게 구워져 불룩 나온 배가 그만 일그러지고 만다. 그래서 서로 잘 아귀를 맞추지 않으면 달항아리는 제 모습대로 가마를 나오기 어렵다. 설혹 아주 위아래를 잘 만들어서 붙였다 하도라도 불의 조화는 노숙한 사기장의 실력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다만 불의 선처대로 따를 뿐이다.
강민수는 젊다. 그런데도 이런 달항아리의 구조와 형태에 대한 높은 이해를 가지고 있다. 오로지 달항아리만을 만들고 오직 그것만을 생각하고 그것을 위해 다른 모든 것은 다 버렸기 때문이다. 좁은 작업장에서 큰 것은 60센티나 되는 항아리를 물레를 돌려 만들고 건조시켜 혼자 유약을 입힌다. 이정도 크기의 그릇에 유약을 혼자 입힌다는 것은 웬만한 힘과 기술이 아니면 실수하기 십상이다. 하지만 강민수는 조수 하나 없이 이 모든 것을 혼자 힘으로 한다. 조선의 사기장은 자신이 만드는 달항아리를 예술품으로 생각하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강민수는 이 모든 행위를 예술을 위한 고독한 길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것이 또 예술이 아니면 어떤가.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여 달래고 어르고 기쁨을 주면 그것으로 달항아리를 빚는 충분한 이유가 될 것이다.
한달에도 몇 번씩 쌍굴뚝을 가진 가마에 불을 지피며 강민수는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전히 지금도 우리는 달항아리의 푸근한 마음을 그리워할 것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