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강소
기운과 여운
오광수 (미술평론가)
– 이강소의 근작에 대해 –
자연을 그리는 방식에 있어 서양은 일정한 테두리 속에 어느 부분을 가두는 것 같은 단면화가 두드러지는 반면, 동양은 어느 부분이 아니라 언제나 전체를 담으려는 특징이 있다. 화면에 자연의 일부가 그려지고 있긴 하지만 그것은 전체로 이어져 있고 전체로서의 전제에서만 성립되어지는 편이다. 이강소의 화면은 서양식의 풍경으로서 자연의 어느 단면이 아니라 한정되지 않는 전체로서의 자연이 담겨 있다는 점에서 동양적 회화와 문맥 된다.
이강소의 근작은 몇 가닥의 간결한 필선으로 마무리되는 특징을 들어내 놓는다. 회화를 선적(Linear)회화와 회화적(Painterly)회화로 분류한 바 있는 뵐프린(Wölfflin)의 논지에 기대면 모필과 수묵의 안료에 의한 동양의 회화가 선적 회화라 부를 수 있고, 두터운 붓과 진득한 안료에 의해 이루어지는 서양의 회화는 회화적 회화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분류에 적용시킨다면, 이강소의 회화는 단연 선적 회화라 지칭할 수 있다. 선적 회화란 또 다른 표현에 의하면 드로잉적인 요소가 풍부한 그림을 이름이기도 하다. 동양의 회화가 드로잉적인 회화란 점에서 이강소의 그림 역시 동양적 회화라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동양의 회화를 드로잉적이라고 보는 관점은 필획筆劃의 자유로운 구성에 기인된 것이다. 필획의 자유로운 구성은 대상을 정밀하게 묘사하는 방법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린다는 것이 자연의 대상을 옮겨오는 것이 아니라 자연 속에 내재하는 생명의 기운氣韻을 재빨리 포착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그래서 동양의 회화를 말할 때 기운생동氣韻生動을 그 첫 머리에 놓게 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그의 운필은 간결하면서도 단호하다. 요지부동의 절대성을 추구하는가 하면 흐르는 물처럼 유연한 여운을 남긴다. 벼락치듯 붓은 달리고 거기 가까스로 잔흔만이 아련하게 남아 난다. 화면에 남아 난 운동의 잔흔, 그것들이 꿈꾸는 형상의 여운만이 화면을 풍성하게 가꿀 뿐이다.
이강소의 화면은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이 공존한다. 어느 부분에 가선 구체적인 영상이 잡히는가 하면 어느 듯 영상은 화면 속에 자취를 감춘다. 현실의 풍경적 요인을 지니면서 언제나 기억의 공간 속을 부유하게 한다.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과의 간극으로 인해 화면은 긴장에 넘친다. 이 대비적인 요소는 정적과 격정으로도 구현되어 나온다. 빈 배가 떠 있는가 하면 오리들이 한가롭게 물위를 유영해간다. 한편으론 비구름이 몰려오고 벼락이 치며 격렬하게 소나기가 쏟아 붓고 있다. 정제된 하나의 선으로 자연이 묘출되는가 하면 격렬하게 요동치는 붓 자국에 우주의 기운이 강하게 뿜어져 나온다.
그러기에 이강소의 풍경은 언제나 현실 저 너머의 세계를 지향한다. 오리가 자맥질하는 물가엔 비스듬히 나무들이 줄지어 가고 강기슭엔 임자 없는 배가 누군가를 기다리는 고즈넉함이 묻어져 나온다. 저 멀리 운무雲霧 속에 어슴푸레 떠오르는 집 속엔 가난하지만 여유로운 삶을 사는 노인의 모습이 있을 것이다. 현실 속에서 유토피아를 지향하는 염원이 이강소의 작품이 지니는 이데아일 것이다. 그것은 동시에 그의 회화가 지닌 매력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