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수동
이수동
사랑이라는 말은 이제 전설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고 이를 표현하기에 열심이다. 저마다 사랑이라는 말을 발설하거나 쓰면서 동시에 그 말이 아무런 의미도 내포하고 있지 않은 공허한 말(공중에 흩어지는 말)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에 더욱더 그 부재하는 의미를 그리워한다. 사랑이란 부재를 그리워하는 것이다. 그 부재의식은 너무나 개인적이고 존재론적인 것이어서 심지어는 그 대상이 곁에 있을 때조차 결코 해소되거나 채워지지가 않는다. 오히려 그 대상이 곁에 있음으로 해서 더 그립다. 사랑은 욕망이며 부재의식이다. 그리고 너는 나로 하여금 시시각각 그 부재를 의식하게 만든다.
이수동은 마치 부도수표처럼 여전히 남발되고 있는 탓에 오히려 사어가 돼버린 사랑이라는 감정을 그린다. 그 말로써 형언할 수 없는 애틋한 감정의 결을 그린다. 그 그림은 사랑이 남용되고 오용되는 시대, 사랑이 표면이 된 시대, 사랑이 전설이 되고 박제가 된 시대, 사랑이 부재하는 시대, 사랑은 없고 그 풍문만 무성한 시대를 증언하고 있어서 더욱 절실하게 와 닿는다. 그 간절함이 때로는 통속과 신파를 떠올리게도 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쉽게 공감이 가고 진정성이 느껴진다.
이수동의 그림은 문학적이고 서사적이다. 영화의 스틸 컷이나 삽화에서처럼 어떤 이야기를 암시한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 연인들의 이야기이다. 천지가 하얀 눈으로 덮인 적막한 풍경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연인들의 사랑 이야기가 애틋하고 절절하다.
기암절벽이 첩첩이 중첩된 산곡 아래쪽의 둥그스름한 능선 위에서 연인이 몸으로 눈을 밀면서 서로에게 다가가고 있다. 압도적인 풍경 탓에 거의 눈에 잘 띄지도 않는 여인의 손에 꽃다발이 들려져 있다(꽃 마중). 그리고 마침내 서로에게 가닿은 연인이 포옹을 한다(눈이 다 녹을 때까지). 화면은 클로즈업되고 사방천지 눈으로 가득한 화면 한가운데에는 오롯이 포옹하는 두 연인만이 그려져 있을 뿐이다. 서로를 향한 그리움이 사방천지 눈을 다 녹일 만큼이나 뜨겁지만, 오히려 그 열정의 강도만큼 더 쓸쓸하고 고독해 보인다.
이수동의 그림들 중에는 가로로 긴 그림들이 많다. 화면은 눈밭과 칠흑같이 캄캄함 밤이거나 회흑색의 희뿌연 대기로 나눠지며, 자작나무숲이 그렇게 구분된 화면을 하나로 이어준다. 그리고 그 풍경을 배경으로 연인의 사랑 이야기가 그려진다. 주제는 사랑 이야기이지만, 화면은 풍경이 압도하고 있다. 그 이야기는 그래서 오히려 더 눈에 띠고 더 잘 들린다. 화면을 뒤덮고 있는 눈밭이나 눈길 그리고 자작나무숲이 비현실적이리만큼 크고 아득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비록 현실을 참조하거나 재현한 것이기는 하지만, 단순한 현실을 넘어서는 심의적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사랑의 감정이 평범한 풍경을 황홀한 풍경, 애절한 풍경, 가슴 떨리게 하는 풍경으로 바꿔놓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