自然과 表現
金源 金永周 南寬 朴得醇 朴泳善 柳景埰 張斗建 裝利錫 崔榮林 黃瑜燁
1)
表現되지 못한 진실은 진실이 아니라고 한다. 이 말은 진실은 객관적으로 따로 있는게 아니라 주관적이고, 構成적으로 나타난다는 뜻을 상대적으로 비유하고 있다. 가령 公正이라는 말이 예술하고는 전혀 무관한 추상적인 언사에 불과하다는게 여기서의 반증이다. 누구에게도 公正하게 인정받고 公正하게 평가되는 예술이란 있을수 없기 때문이다. 피카소의 미술은
마티스의 미술하고는 판이하게 다르다. 이들의 미술을, 금강산의 절경 앞에서 우리들이 共感하는 식으로 균등한 精感을 公正하게 나누어 느낄수는 없다. 피카소보다 마티스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정반대로 피카소를 더 좋아하는 사람이 있기 마련이다. 예술은 公正이라는 사상누각을 가리키는 이름은 아니다. 그것은 하나의 분명한 主觀으로부터 탄생하는 이름이전의 생명체를 뜻한다. 現代美術의 기반은 바로 여기서부터 태동하는 거며, 이른바 「再現」으로부터 「表現」으로의 移行이란 이러한 경과를 두고서 가리키는 말이었다. 말하자면「自然의 形式」이 문제인게 아니라 그것을 느끼고 구성하는「表現의 形式」이 문제라는것이었다. 美術은 自然 바로 그 자체는 아니다.
2)
再現은 그것을 原本 그대로 옮겨 베끼는 작업을 뜻하기 때문에 미술가보다도 그 原本이 먼저 있어야 된다. 다음으로 미술가는, 옛날 한국 아낙네들이 버선본을 본뜨듯이, 그 본을 그대로 본뜨면 되는 것이었다. 산을 산처럼, 숲을 숲처럼 그려내면 되는게 이러한 미술이다. 그런데 이 경우 「自然 그것으로서의 形式」과 그것이 미술이 되는 自律的인 「美術形式」으로서의 문제로 분화되면서 전기한 表現이란 무엇인가가 時代의 문제로 대두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이 表現의 문제는 이른바 線, 面, 形 등인 造形의 自律面과 다른 한편으론 그러한 表現을 人間 生命의 基本衝動으로 환기하는 生命現象의 두경향으로 갈라지면서 近代라는 分化現象을 나타내게 된다. 상대적으로 말해서 근대의 미술가란 이러한 갈림길에서부터 자신의 퍼스널리티를 굳혀온 작가들로 이해하는게 바른 길목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여기서 이길이냐 저길이냐를 마치 동전의 앞뒷면으로 걸어보는건 매우 유치하다. 그 두길은 한몸의 미술가가 가야하는 길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一身으로 二代를 산다는 비유는 이러한 近代의 아이러니를 가리키고 있다.
3)
이번 松園畵廊이 초대하는 열분의 서양화가들은 전기한 갈림길로부터 자신의 藝術標式을 모색해온 작가들이다. 따라서 여기서의 表現이란 어떤 絶望을 안티테제로 하는 출발인 것이었다. 表現은 인간생명의 기본욕구이지만 그 形式을 객관적으로 喪失한 近代의 미술가들엔 表現 그것이 벌써 어떤 絶望을 뜻하는데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은 그러나 生成한다. 이 絶望의 克服이 다름아닌 表現인것이다. 그래서 絶望을 克己하지 못한 表現이란 허위라 함은 이 까닭이며 여기의 畵面들은 모두 그 나름의 克己의 프로세스를 보여주고있다. 近代는 바로 시련을 뜻하며, 교훈은 진통을 통해서 탄생한다는게 여기서의 계몽이다. 이번 초대전을 통해 우리들이 느껴야되는 점은 바로 이상의 전제들이다.
-유준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