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훈성
박훈성 展
살아있는 것들에 바치는 부(賦)!
: 박훈성의 근작 <<사이>>
박훈성에게서 꽃은 2천년대 그의 트레이드 마크이자 분신이다. 처음에는 장미과의 강열한 적색⋅황색⋅백색⋅핑크에 이르는 계보를 등장시키다 점차 섬세한 꽃망울의 다양한 식물, 예컨대 동백과에 속하는 비교적 작은 꽃잎을 거쳐 아주 작은 망초과에 이르고, 근자에는 연약한 나팔꽃과 진달래꽃에 이르렀다.
그에게 있어서는, 꽃의 종류를 가리자면 다양하고, 모양이나 크고 작음, 색조의 선택, 모두가 계절과 장소를 가리지 않아 무슨 꽃이냐가 중요치 않다. 중요한 것은 왜 꽃이냐다. 왜 약한 것의 대명사인 꽃을 주요 모팁으로 등장시키느냐다.
사실, 그의 꽃을 감상하는 올바른 방법 또한 그가 왜 어떻게 꽃을 다루는 지를 이해하는 데 있지 않을까 싶다. 초기의 꽃은 실제의 꽃잎보다 두께가 두꺼운, 이를테면 특수화학 물질로 재생산해 꽃보다 한층 강열한 발광체 같은 꽃이었다. 그래서 식물의 아이콘(이미지)이라기 보다는 질량이 큰 ‘사물’로서의 꽃이었다. 종종은 꽃 주변에 견고한 기하입체를 오브제로 꼴라지함으로써 생명체로서의 꽃을 다운시켜 견고한 사물로서의 꽃잎을 확인시켰다.
이러한 방식은 적어도 지난 해까지 계속되었다. 그 가운데는 꽃의 질량을 감소시켜 생명에 근접한 ‘이미지’를 엿보게 하는 바 없지 않았으나, 이번 개인전부터는 생명의 이미지가 전폭적으로 강조되는 변화를 보여준다. 오브제(사물)로서의 꽃이 아니라 생명을 내재한 아이콘으로서의 이미지를 부각시킨다.
종래의 무겁고 엄격하던 꽃에서 떠나 지금은 우리의 주변에서 볼 수 있는 소담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는 생생한 자태가 강조된다. 한여름 날 비온 후 마당가 담장에서 볼 수 있는 나팔꽃의 가는 넝쿨하며, 조밀한 잎맥의 얇고도 가냘픈 잎파리는 물론, 연지색의 붉은 꽃잎은 흰서리 아니면 설산에서 떠온 듯한 백설같은 흰빛을 머금고 있다. 진달래는 또 어떤가. 엷고도 가녀린 연분홍의 잎은 차라리 청랑한 아픔을 간직한 채 청순하여 가련하다. 식물학에 조예가 없는 사람으로서는 이것들 말고도 그가 등장시키고 있는 많은 꽃들을 일일이 열거하기가 어렵다.
모두가 생명을 잉태한 얇고 가벼운 있는 그대로의 꽃이다. 살아있는 것들의 표정 그 자체다. 그런데 여전히 작가는 작품명제를 <<사이>>로 고집한다. 꽃만을 보여 주고자 꽃을 그린 것이 못내 아쉬워서일까? 그러나 여전히 ‘사이’일 수밖에 없는 단서가 있다. 꽃을 중심에 둔 여백만은 결코 꽃을 위한 여백이 아닌 것처럼 다루고 있기에 그렇다. 난필로 채우거나 일필휘지라는 말 그대로 넝쿨만큼이나 길고 자유로운, 강세와 속도가 다양하고 분방한 필세가 상승하고 하강하는 운필을 실어 휑한 여백을 채운다. 운필은 연필 말고도 브러싱이 가세해서 조성(調性)을 만들기도 하고 잔필로 꽉 채워 ‘올오버’로 설정하기도 한다.
왜 잘 그린 꽃의 배경을 이렇게 처리하는가? 그가 ‘사이’라는 별난 컨셉을 여전히 고집하면서 작품명제를 <<사이>>로 하고 있는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바로여기에 있다. 나는 2001년 그의 개인전 도록에 쓴 ‘사이’를 지금도 기억한다. 그리고 그의 근작들에서 이를 새로운 느낌으로 주시한다. 근자의 그의 생명의 꽃들이 여전히 ‘사이’를 테제로 다루어지고 있음을 본다. 그것은 생명을 간직한 이미지, 아니 이미지의 생명체가 탄생하기 까지는 그 너머에 존재하는 혼돈 내지는 무(無)의 경계가 엄존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존재하는 한 송이의 꽃은 한 송이의 꽃으로 존재하기 이전의 비존재에서 탄생했다는 것을 시사하기 위해서다.
종래 사물(오브제)로서의 꽃을 다루었을 시는 꽃의 너머 여백에 뚫린 바늘구멍의 선이나 지그재그 형태의 금속오브제를 꼴라지 해서 꽃이 아닌 비존재의 가능성을 모색했지만, 이제는 브러싱이나 일필휘지 같은 필획의 가늘고 굵은 필세가 꽃들의 생명이미지의 그 너머에 존재할 비존재를 시사한다. 그것들은 여백에다 힘차게, 아니면 현란하게, 나아가서는 휘몰이의 동세를 부여한다. 그럼으로써 어느 시인의 담론처럼 먹구름 속에서 울고 아픔으로 지새던 잉태의 몸짓을 꽃의 전신(全身)에 부여하기 위해서다.
박훈성의 근작 <<사이>>는 화사한 생명의 탄생 저 너머에 존재하는 비존재의 울음을 통해서 살아있는 존재가 비로소 탄생한다는 것을 수사(修辭)적으로 처리한다. 이를 두고 나는 박훈성이 근자에서야 ‘생명의 유희’를 다루고 있다고 힘주어 말한다. 이 말은 하나의 생명이 탄생하는 데에는 이것과의 대척점에 존재하는 무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뜻한다. 그는 이를 말하기 위해 흔히 사물을 있는 그대로 고정시켜 그리는 게 아니라, 거기에다 시간의 흔적들을 투사하여 생명이 없음에서 있음으로 이어지는 변증법적 과정을 그리고자 한다. 이것이야 말로 생명의 유희를 드러내는 가장 설득력을 갖는 방법이 아닐까 싶어서다.
이를 위해 정치하게 그린 이미지의 아이콘 저 너머에 가장 비(非)정치한, 이를테면 무(無), 비(非)를 머리글자로 하는 반어(反語, irony)를 내재한 허구를 불러들일 필요가 있었다. 존재와 비존재의 쌍생체제가 절실하였다. 박훈성의 낙서에 가까운 일필휘지의 의의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다시 묻노니 왜 꽃인가? 왜 왜소하기가 그지없는 꽃을 빌려서인가? 종류를 떠나, 가장 화려한 데서 그렇지 않은 데까지 모든 꽃들이 그의 분신으로 등장한다. 그래서 꽃은 그의 잃어버린 실존의 가장 화려한 부활의 모습이다. 꽃은 그 자신과 세상의 사이를 메우는 가교이다. 그의 영혼이 내재한 ‘아니마’(anima)라고 하는 게 더 적절할 것 같다. 그는 꽃에다 자신의 영혼의 대명사인 아니마를 부여함으로써 약한 꽃을 강열화하고, 그럼으로써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을 가장 강열한 것으로 되살리고자 한다. 그래서 그의 꽃을 감상할 때 이를 알아차리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의 <<사이>>가 십여 년의 연륜을 마감한다. 지금은 사물의 자태가 아닌 생명의 자태를 그리려는 반환점에 서있다. 당연하다. 미더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걸로 그는 회화는 여전히 회화여야 하고 일러스트여서는 안된다는 신념을 완곡하게 주장한다. 어떠한 이론(異論)이 제기될지라도 회화가 회화인 최후의 경계를 지키려 한다. 존재하는 사물들과 존재하지 않는 것의 상징 사이를 영원히 배회하는, 그래서 종착이 아니라 끊임없는 진행이 있을뿐이라는 것을 그는 그림으로 말하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