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현실과 꿈의 교직
오광수 전국립현대미술관장, 미술평론가
박형진의 화면은 독립된 하나 하나의 작품이지만 개별로서 끝나지 않고 일종의 연작으로 이어지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일상의 연장으로서 작품이 놓이고 있다는 사실과도 흥미롭게 연계된다. 그래서인지 그림이란 형식에 앞질러 일기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게 된다. 유독 과수나 텃밭이 많이 등장하는걸 보면, 그의 생활공간이 과수원과 텃밭으로 에워싸인 전원이란 사실을 유추케 한다.
그래서인지 화면엔 싱싱한 식물적 상상력이 소담스럽게 피어나고 있음을 엿보게 한다. 예컨대 <제법 커다란 열매>나 <제법 커다란 잎사귀>에 보면 화면 가득히 과일과 나뭇잎이 채워지고 이들 가장자리에 꼬물꼬물 움직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가까스로 점경된다. 사람보다도 열매나 잎사귀가 훨씬 크게 그려지고 있다. 이 너무나 단순한 정경 속에 나타나는 대비의 극적인 설정은 저절로 웃음을 머금게 하고 있다. 아마도 그것은 식물을 가꾸고 열매를 기다리는 작가의 소망이 상상의 나래를 펴고 끝없이 비상함에서 생겨난 결과이리라.
“아주 커다란 텃밭에 물을 주는 상상을 해보고 커다란 잎사귀와 커다란 열매가 달린 나무를 상상해본다”는 작가의 소망이 화면이란 매개를 통해 아름답게 꽃피어난 결과이리라.
화면에 등장하는 낯익은 사물들은 평범하기 짝이 없다.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일상으로 만나는 대상일 뿐이다. 그러한 일상이 이 작가에게 오면 마치 무지개처럼 화사한 빛으로 채색되어 나타난다. 꿈꾸는 듯한 황홀의 경지로 전이된다. 평범한 삶이 경이로움으로 다가온다. 작가가 만들어 낸 단어인<상상다반사 想像茶飯事>란 명제에서도 읽을 수 있듯이 흔히 있는 생활의 단면이 소중한 한 순간의 기념으로 각인된다. <상상다반사-친구>는 텃밭 가운데 집이 있고 집 가운데 테이블에 마주앉은 두 여인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상상다반사-가족> 역시 테이블을 둘러싼 가족의 단란한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이 평범한 일상이 기념적 사건으로 탈바꿈함을 엿볼 수 있다.
그의 화면은 일정한 거리의식이 없다. 작가는 대상 속에 유영하듯 분산된다. 물을 주는 식물은 어느덧 작가자신이 되고 자신의 아이가 된다. 꽃 속에 환히 떠오르는 아이의 얼굴 <개나리 소년>이나 피어나는 꽃봉오리 속에 빼꼼히 얼굴을 내미는 <아기 꽃>은 인간과 식물이 분화되지 않는 범신적 풍경으로 다가온다. 자잘한 일상의 자락들이 아주 소중한 사건으로 다루어짐으로써 삶은 더욱 풍요로운 단계로 나아간다. 술을 따르는 아버지의 모습은 보이지 않지만 그의 손놀림에서는 온 가족의 행복이 묻어난다. 잔이 화면 가득히 자리 잡고 손은 가까스로 등장하는 화면이지만, 나른한 한 때의 정감이 독특한 익명성으로 인해 더욱 달콤함을 전해준다.
그의 화면은 읽기 위한 이야기 그림이다. 서술적 형식이다. 그것도 어디에서나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일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순한 일상의 기록이기보다 생활 속에 피어난 꿈의 각인이요 상상의 개화다. 살벌한 개념만이 판치는 현실에서 그의 그림은 더욱 이채를 발한다. 삶의 소중함을 일깨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