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형진
인사미술제
박형진
2009.11.18 ~ 11.24
덜 가지고 더 존재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공주형(미술평론가)
인간이 존엄을 잃지 않고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최소한의 품목들은 무엇일까요. 하버드 대학을 졸업한 후 스물여덟의 나이에 홀연히 고향인 매사추세츠 주 콩코드의 숲 속으로 들어가 이 질문에 스스로 답을 구한 이가 있습니다. 미국의 사상가이자 작가인 소로우(Henry David Thoreau, 1817~1862)입니다. 1845년 봄부터 두 해 뒤 가을까지 숲 속 호숫가에 머물며 그는 꿈꾸었고 실천했습니다. 최소한의 물질로 가능한 최대한의 인간적인 삶에 대해서였지요. 그런 삶을 살기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일지 궁금합니다. 그가 가졌던 물건 중에 가장 덩치가 큰 것은 남들이 오두막이라 부른 통나무집입니다. 28달러가 조금 넘는 비용을 들여 만든 집은 가로 4.6미터, 세로 3미터, 높이 2.4 미터 크기였습니다. 바로 그 안에 그가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던 인간적인 삶을 위한 최소한의 필요들이 놓입니다. 나무로 만든 침대와 탁자, 책상과 벽난로, 의자와 커다란 창입니다.
‘아이’라는 이름의 아이가 등장하는 박형진의 근작들과 소로우의 화두는 같습니다. 작가와 미국의 사상가 모두 ‘최소한의 소유로 누리는 최대한의 존재’에 대해 알고 싶습니다. 화두는 같지만 접근의 방법은 다릅니다. 작가는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그처럼 일상을 송두리째 내려놓는 결단을 감행하는 대신 어제와 다름없는 오늘의 일상을 살아갑니다. ‘일한만큼 먹고, 먹은 만큼 생산 한다.’ 그처럼 거창한 원칙을 세우는 대신 모든 것을 마음의 순연한 흐름에 맡깁니다.
박형진은 캔버스를 소로우의 통나무집 삼아 그 안에 꼭 소용이 되는 몇 개의 존재를 가져다 놓습니다. 애완동물들, 커피, 구름, 나뭇잎. 자유롭고 인간적인 삶을 위해 일상 속에서 작가가 마음으로 써 내려간 답안지에 적힌 품목들입니다. 값비싼 양탄자, 고급스러운 주택, 호화로운 가구에 비하면 참 사소한 것들입니다. 작가 작업의 특별함은 바로 이 사소함을 대하는 태도에서 비롯됩니다. 작가는 변함없는 애정을 사소함에 보냅니다. 우리는 사소함에 관심을 두지 않아 초래된 치명적인 결과에 대한 경고를 잘 알고 있습니다. 깨진 유리창 같은 사소한 허점을 방치해 둔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범죄로 이어진다거나 한 번의 큰 일이 있기 전에는 일 백 번의 사소한 징후와 서른아홉 번의 작은 일이 벌어진다는 ‘깨진 유리창의 법칙’이나 ‘하인리히의 법칙’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소함의 소중함을 잘 알고 있지만 작가는 거창한 결말을 얻기 위한 통과 의례로 사소함에 관심을 두는 것은 아닙니다.
다슬기의 감칠맛, 상쾌한 해바라기, 총총한 별빛, 기막힌 노을. 정채봉의「사소한 것이 소중하다」가운데 나오는 사소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은 헛헛한 마음으로 곳간을 채우느라 잊혔던 감각을 깨우고, 유보 되었던 의미를 찾게 합니다. 의례 사건의 중심에는 미간 사이가 유난히 넓고 동그란 눈을 가진 사랑스러운 아이가 있습니다. 아이 머리 위로 애완동물들이 자리합니다. 추운 겨울 시린 바람을 막아주는 소중한 털모자처럼 든든한 존재들입니다. 주황빛 금붕어들이 헤엄칩니다. 투명한 어항 너머 생의 활기를 더하는 마법의 주문 같습니다. 커피에 더운 김이 모락모락 납니다. 입천장을 대지 않도록 완급을 조절하도며 하루를 열도록 말없이 훈수하는 것이 영락없이 지혜로운 친구의 모습입니다. 자연의 놀이터에 왔으니 선물도 있어야겠군요. 일곱 개의 흰 구름을 일곱 아이가 사이좋게 나누어 갖습니다. 뛰어놀다 졸음이 몰려와도 염려 없습니다. 초록 나뭇잎 이불이 있으니까요. 그러고 보니 작가가 소중히 여기는 것들은 모두 공통점이 있습니다. 따뜻함입니다. 온기입니다. 몸과 마음을 훈훈하게 하는.
욕심 사나울 것 없어 보이는 작업에서 유일하게 욕심이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나의 것’이라 박형진이 이름 붙인 제목들입니다. 애완동물이 아니라 〈나의 애완동물〉입니다. 개가 아니라 〈내 개〉이고, 새가 아니라 〈내 새〉입니다. 분명 그림 속 애완동물들은 ‘아이’의 것처럼 보임에도 말이지요. 작가가 굳이 이런 제목을 택한 이유는 나의 소유를 분명히 하기 위함이 아닙니다. 소유자의 권한을 내세워 소유물의 존엄을 좌지우지하기 위함도 아닙니다. 각별함의 표현일 뿐입니다. 우연히 얻어 기르게 된 십자매가 텃새의 공격으로 처참히 최후를 맞게 되었을 때의 충격과 오랫동안 공 들여 보살폈지만 어찌된 일인지 시름시름한 선인장에 대한 애처로움, 작가의 작업 소재로 널리 이름을 알리고 있는 붉은 개 ‘다숙’에 대한 추억 등이 작업들에 투영됩니다. 오래 눈길을 주고 찬찬히 감정을 나눈 존재들은 작가와 경계를 명확히 그을 수 있는 타인이 아닙니다. ‘너’와의 관계에서 자꾸 돌아다 봐지는 것이 ‘나’이니 분명 ‘나의 것’일 수밖에 없습니다.
특별한 계획도 꼭 해야 할 일도 없는 일상의 반복입니다. 혼자이지만 쓸쓸하지 않고, 침묵하지만 답답하지 않은 일상입니다. 하지만 지켜보는 이들은 그렇지 않은 모양입니다. 혹자는 단순한 일상의 일정한 박자에 익숙해진 작가를 걱정합니다. 혹자는 캔버스에서 사라진 치열함을 염려합니다.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듣는 음악에 맞추어 걸어가도록 내버려 두라.
그 북소리의 음률이 어떻던,
또 그 소리가 얼마나 먼 곳에서 들리든 말이다.
그가 꼭 사과나무나 떡갈나무와 같은 속도로
성숙해야 한다는 법칙은 없다.
그가 남과 보조를 맞추기 위해
자신의 봄을 여름으로 바꾸어야 한단 말인가.
작가는 호숫가 숲 속 오두막에서 소로우가 쓴 『윌든』의 한 구절처럼 하얀 털 고양이와 붉은 부리 십자매 등과 함께 좀 더 그러한 일상에 머물며 작업을 할 생각입니다. 아이들에게는 아이들의 동화로, 어른들에게는 어른들의 동화로 읽히는 박형진 작업의 결말은 이번에도 해피엔딩입니다. ‘공주님과 왕자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가 아니라 ‘너와 내가 함께 잘 존재했습니다.’로 끝이 나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