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아트페어-강연균
강연균의 축복
나는 지난 80년대에 저 무등산을 지키고 있는 강연균의 예술과 만나기 시작했다.
아니 그것은 그의 예술과 인간의 동시성이 아니라면 성립될 수 없는 예술이기도 했다.
그 시절의 그로서는 어떤 결정력으로도 성급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광주’ 의 비극과 동떨어질 수 없는 그의 침묵이라는 무거운 명제를 걸머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런 부담으로부터 한 예술가의 자유를 발견할 때마다 강연균은 실로 강연균의 복수(複戮)임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에게는 여러 예술가들의 궤적에도 있을 법한 어린 시절 이래의 수고 많은 풍상 자체가 충분히 조선후기의 화가들의 소외와도 이어져 있고 20세기 초 서구 화가들의 불운과도 맞닿아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때문에 그의 인간이 그의 예술의 가능성과 현실성을 파국으로 몰고 가지 않은 사실이 퍽이나 종요롭다. 그의 운명은 그를 억압하지 못했다. 그의 예술은 미술비평의 수작으로 몇 갈래의 분석이나 해명을 시도하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다. 이를테면 강연균을 사실주의의 확신으로 규정하는 것 자체를 정작 작가는 그것조차도 고도의 무애로 벗어나는 것이다. 이를테면 그의 농촌적인 주름살투성이의 인물이나 <시장사람들>이 그런 범주에 들고 있다. 하지만 <탄광촌 설경>이나 <황토길>, <고부>시리즈, <고목>시리즈 외 그 우렁찬 의지의 확대는 차라리 고전적인 엄중성이나 추상성까지도 무시로 넘나들고 있는 성 부르다. 그런가 하면 그 외 누드미학의 절정에서 끝까지 지키고 있는 그 정감의 생명력을 무엇이라고 설명할 수 있겠는가. 이와 함께 걸핏하면 간과하기 쉬운 그의 정물화의 그 난숙한 파격에 대해서도 함부로 이것이다 저것이다 라는 몇 마디의 소감을 용납하지 않고 있는 감상(鑑賞)의 난관을 낳는다.
-’93년 동아 갤러리 초대전때 시인 고은의서문中에서